감독 : 피에르 모렐
주연 : 숀 펜, 자스민 트린카, 하비에르 바르뎀, 이드리스 엘바
개봉 : 2015년 4월 16일
관람 : 2015년 4월 20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선물을 사준다고 내 잘못이 사라지는 것일까?
4월 20일은 저와 구피의 결혼기념일입니다. 2003년 4월 20일에 결혼했으니 어느덧 12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것입니다. 구피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었더니 결혼 후 10년이 넘도록 짝퉁 가방을 들고 다녔다며 이제는 명품 가방을 사달라고 하네요. 그 순간 '아차'싶었습니다.
물론 제 주머니 사정을 잘 아나는 구피는 몇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이 아닌, 50만원 한도내에서 가방을 고르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열심히 모아뒀던 비상금과 지난 4월초에 받은 용돈을 모두 합친 제 총재산은 구피의 결혼기념일 선물로 모두 투자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피의 환한 미소는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4월 4일에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난 저는 그만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시는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저마다 지우고 싶은 과거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실수일수도 있고, 잘못된 판단으로 놓친 기회의 순간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겨준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날의 실수를 지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SF는 아니기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과거를 조정하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과거의 잘못을 지우기 위한 각자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보다 가장 좋은 것은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저질러 버렸다면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더 건맨]은 과거의 실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내전에 휩싸인 2006년 콩고민주공화국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거대광물회사의 용병으로 고용된 전직 특수대원 짐 테리어(숀 펜). 그에게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업부 장관을 암살하라는 지령이 떨어집니다. 짐 테리어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을 수행해내지만 그로 인하여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연인 애니(자스민 트린카)를 떠나 자취를 감춰야 했습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어느날 그날의 사건은 올가미가 되어 짐 테리어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한 올가미는 짐 테리어는 물론 당시 작전 설계자인 펠렉스(하비에르 바르뎀)와 팀원들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모두 8년 전의 잘못에 발목이 잡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더 건맨]의 캐릭터들은 그러한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은 각기 다릅니다.
속죄로 과거의 실수를 지울 수 있을까?
가장 흥미로운 방법으로 8년전의 잘못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은 주인공인 짐입니다. 그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부정부패와 맞서 싸우려 했던 광업부 장관을 암살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잘못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애니를 떠나야 했고, 8년동안 애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짐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자원봉사를 하며 죄책감을 씻어내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짐을 죽이기 위해 그가 자원봉사중인 마을을 덮치는 사건이 발생됩니다. 짐은 자신이 존재가 오히려 마을의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콩고민주공화국을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낸 자들을 알아내기 위해 옛 동료들을 찾아갑니다.
이 부분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옛 동료인 펠릭스와 애니가 결혼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애니를 향한 펠릭스의 순정은 영화의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짐과 키스를 나누는 애니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질투 어린 표정. [더 건맨]은 애니를 사이에 둔 짐과 펠릭스의 삼각관계를 통해 짐의 암살 사건의 배후로 펠렉스를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애니도 펠릭스도 과거의 상처와 잘못을 지우기 위해 발버둥치는 짐과 비슷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애니의 경우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펠릭스와 결혼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업부 장관 암살이라는 죄에 대한 속죄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짐과 비슷한 심리인 셈입니다.
애니는 짐이 떠난후 콩고민주공화국의 무장단체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했고, 그러한 그녀의 상처를 헌신적으로 보듬어준 펠렉스에 대한 보답으로 그와의 사랑없는 결혼을 이어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애니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8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짐에 대한 펠릭스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업부 장관 암살의 설계자인 펠릭스는 애니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저격수로 짐을 선택했습니다. 작전 후 콩고민주공화국을 떠나야한다는 원칙을 이용한 것이죠. 그 덕분에 그는 애니와의 결혼이라는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8년동안 애니가 자신을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며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불안감은 결국 허무한 파멸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짐도, 애니도, 펠릭스도 8년 전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과거를 지우려 할 수록 더욱 옥죄는 올가미
짐과 펠릭스, 애니가 8년전 과거의 잘못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불안해하고, 잘못을 씻어내려고 노력하는 반면 짐을 고용했던 광물회사는 8년전의 비밀작전에 연루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과거를 덮으려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더 건맨]의 스토리 라인이 됩니다. 하지만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과거를 덮으려 하면 할수록 그들이 덮고 싶었던 과거는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과거를 덮어버리는 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우리의 대처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속죄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과거를 잊고, 과거를 덮으려하는 방어기제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은 그렇게 쉽게 덮어지지 않습니다. 그 잘못이 크면 클수록 덮으려는 행위는 더 큰 위험요소를 동반하게 됩니다. [더 건맨]의 경우를 보면 8년전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업부 장관 암살을 덮으려는 회사의 음모는 또 다른 살인과 대규모 테러를 불러 일으킵니다. [더 건맨]을 보면서 8년전의 잘못보다도, 그 잘못을 덮으려는 현재의 범죄가 더 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짐에게 은밀하게 접근하는 인터폴 재키 반스(이드리스 엘바)의 충고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짐에게 아내의 성화로 아이들을 위한 나무위 오드막집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듭니다. 굉장히 귀찮은 일이지만, 언젠가 꼭 해야할 일이라면 빨리 후다닥 해치우는 것이 속편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으로 인하여 최악의 위기에 당면한 짐을 향한 조언입니다.
짐은 8년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만약 그가 8년전의 잘못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죄의 댓가를 받으려 했다면 목숨을 건 총격전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받아야할 죄의 댓가라면 그것을 안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죄의 댓가를 빨리 받는 것이 과거의 잘못에 발목이 잡혀있는 지금의 상황보다 좋은 선택인 셈이죠.
과거의 잘못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것입니다. 짐처럼 속죄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광물회사처럼 과거를 지우려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댓가를 치룬다면 과거의 잘못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로인한 올가미에 걸려 [더 건맨]의 주인공처럼 허우적거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 2의 [테이큰]을 기대하지 말라.
[더 건맨]은 [테이큰]의 피에르 모렐이 메가폰을 잡은 액션 스릴러 영화이기에 많은 분들이 제 2의 [테이큰]으로 기대를 모았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북미에서도 흥행 참패를 거두었고, 뒤늦게 개봉한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성적이 참담한 수준입니다. 많은 분들이 [테이큰]과 같은 속시원한 액션을 기대했지만, [더 건맨]은 속시원한 액션 대신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이들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저는 [더 건맨]이 흥미로웠습니다. 주연을 맡은 숀 펜은 [테이큰]으로 늙은 나이에 액션 영웅이 된 리암 니슨과는 달리 탄탄한 근육과 묵직한 액션을 선보이지는 못합니다. 그대신 지친 표정과 몸돌림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한 숀 펜의 모습은 [더 건맨]의 액션 영화적인 쾌감을 반감시키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인하여 죄책감에 시달리는 짐 테리어라는 캐릭터와는 완벽하게 부합되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역할을 할 것만 같았던 하비에르 바르뎀도 짐 테리어가 나타남과 동시에 무너지는 펠릭스의 치졸한 모습을 잘 연기했습니다. 그는 짐 대신 애니와 결혼했지만, 언젠가는 짐에게 애니를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8년을 버틴 것입니다. 액션 스릴러 영화에서 펠렉스와 같은 캐릭터는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키기 마련인데, 하비에르 바르뎀은 무리없이 펠렉스를 완성해 냈습니다.
스페인의 투우장에서의 마지막 장면도 색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액션 영화는 더 많이 때려부수는 것으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려합니다. 하지만 [더 건맨]은 투우 경기장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이용해서 많이 때려 부수지 않아도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습니다.
물론 [더 건맨]과 [테이큰]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액션 스릴러 영화로써의 쾌감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고 [테이큰]이 더 탄탄합니다. 하지만 [더 건맨]에게는 [테이큰]에는 없는 색다른 재미가 있죠. 그것이 바로 과거의 잘못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 속에 표현해냈다는 점입니다. 왜 그들은 과거 죄의 댓가를 치루지 않기 위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결국 더 큰 댓가를 치루는 것일까요?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죄의 댓가를 치루고 애니를 찾은 짐의 모습은 굉장히 홀가분해보였습니다. 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전 그가 벌인 잘못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테지만, 더이상 그날의 잘못이 그의 발목을 잡고 수렁으로 밀어넣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그날의 잘못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제가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반성의 자세를 조금이라고 구피에게 전해주지 않을까요?
짐 테리어처럼 과거의 잘못을 지우기 위해 허우적대는 것보다는,
과거 잘못의 댓가를 빨리 치뤄 그것을 떨궈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가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그 수많은 잘못들도
댓가를 치룸으로써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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