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강제규
주연 : 박근형, 윤여정, 조진웅, 한지민, 황우슬혜
개봉 : 2015년 4월 9일
관람 : 2015년 4월 14일
등급 : 12세 관람가
늙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
늙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최근들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땐 늙음이 내겐 까마득히 먼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나이 마흔이 넘어가니 노후을 준비해야 하고,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무얼 하면서 살아야할지도 걱정을 하게 되네요.
예전에는 늙으면 자식들의 부양을 받으며 집안 어른으로써의 역할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웅이가 저와 구피를 부양할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시대가 변했고, 저와 구피 역시 웅이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성있는 구피는 국민연금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며 개인연금을 들어야 한다며 벌써부터 노후준비에 열을 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금전적인 문제보다는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더 걱정됩니다.
금전적인 문제는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그리고 개인연금 등을 잘 활용하면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아껴서 어떻게든 버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종일 남는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할까요?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시간이 많아도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멍하니 공원에 앉아 시간을 죽이지는 않을런지 솔직히 걱정이 되네요.
최근에 봤던 영화들도 그러한 제 때이른 걱정에 부채질을 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 [화장]은 오랜 암투병으로 아내를 잃은 중년의 대기업 중역 오정석(안성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부하직원 추은주(김규리)를 남몰래 짝사랑하지만 결국 그 사랑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버립니다. 중국으로 떠나기전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찾아온 추은주를 피해 정체없이 걷는 오정석의 뒷모습이 참 처량해 보였던 영화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본 [헬머니]는 감옥에서 출소후 엄마노릇을 하기 위해 두 아들을 찾아나선 김영옥(김수미)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헬머니]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기쎈 처가에 엊혀 살면서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기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며 살고 있는 첫째 아들 승현(정만식)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참 짠했습니다.
이렇듯 늙는다는 것은 사랑을 마음 속으로 삼키며 내색해서는 안됩니다. 자칫 늙은 주제에 주책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식은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버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잃어버린 자신의 인생 대신 자식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는 김영옥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관람한 [장수상회]는 까칠한 할아버지 성칠(박근형)과 고운 외모의 할머니 금님(윤여정)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노년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장수상회]는 재개발을 앞둔 강북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장수마트에서 일하는 성칠과 그의 앞집에 새로 이사온 금님의 노년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성칠과 금님의 사랑은 마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데, 그 이유는 성칠만이 유일하게 재개발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 재개발 위원장인 장수(조진웅)는 성칠의 재개발 승낙을 얻어내기 위해 미인계를 쓰기로 하고 금님이 나선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칠과 금님의 사랑은 순수할 수가 없습니다. 금님의 성칠을 향한 마음에는 재개발 승낙이라는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칠과 금님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금님은 영락없는 악녀 팜므파탈일 수 밖에 없으며, 금님에게 이용당한 성칠은 이용당한 후 버려지는 비련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칠과 금님의 사랑은 순수해보입니다. 금님에게 분명 숨겨진 의도가 있음이 뻔히 보이는데, 성칠과 금님의 사랑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왜그럴까요? 그것은 이 사랑이 그들에게 마지막이 될 것임을 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님에게는 숨겨진 의도가 있고, 성칠은 금님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함께 식사를 하고, 놀이공원을 가며 보내는 그 시간들은 그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지막 행복일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젊었을 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오르고 싶은 야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일생에 단 한번뿐인 사랑은 영화나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늙었을 때는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야망보다는 현재의 사랑이, 행복이 더 중요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이죠.
성칠과 금님의 사랑이 순수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금님에게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성칠은 진정 행복해 보였습니다. 금님을 위해 화장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아마 젊은 사람들이라면 '창피해.'라며 피했을 일입니다. 하지만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성칠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금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칠이 재개발을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과거에 대한 추억 때문입니다. 평생을 보낸 마을이 어느순간 높다란 아파트숲이 되는 것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보다 소중한 것은 현재이기에, 성칠도 금님과의 사랑을 통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렇게 성칠은 금님을 만나며 과거의 추억에만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진정으로 웃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아름다운 세대교체
영화의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장수상회]는 뻔해 보였습니다. 까칠한 할아버지 성칠이 금님과 서투른 사랑을 하면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금님의 숨겨진 의도가 밝혀지며 두 사람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위기는 어떤 계기를 통해 해소되며 해피엔딩을 맞이하겠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성칠과 금님이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는 아마도 금님의 병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장수상회]는 지속적으로 금님에게 병이 있음을 암시했고, 금님의 병에 의한 갈등 해소, 위기 극복은 노년의 사랑을 소재로한 [장수상회] 입장에서도 자연스러운 전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며 제 예상은 엇나갑니다. 성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금님에게는 재개발이라는 이유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에 극장 안이 술렁였고, 제 코끝은 찡해졌습니다. 성칠과 금님의 사랑이 순수해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심을 다해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 더 상대방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수상회]는 성칠과 금님의 사랑과 재개발이라는 두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성칠과 금님은 늙음, 예전의 것을 의미한다면 재개발은 젊음,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성칠이 그토록 재개발을 반대하고, 장수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성칠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 것은 예전의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인 셈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것을 위해 예전의 것이 스스로 자리를 비켜주는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보여줍니다. 마치 젊은 이들을 위해 더이상 늙은 이들이 폐를 끼쳐서는 안되겠다는 성칠과 금님의 굳은 의지처럼 보입니다. 성칠과 금님의 사랑에 실컷 눈시울을 적시며 영화를 봤던 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늙었고,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성칠과 금님처럼 뒤로 물러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회의 전반에 나선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늙을 것이며, 우리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뒤로 물러나야겠죠. [장수상회]는 [화장], [헬머니]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제게 늙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블록버스터를 벗어던진 강제규
[장수상회]는 강제규 감독의 영화입니다. 강제규 감독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 중의 한명입니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한국 판타지 영화의 한 획을 그었던 그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린 [쉬리], 천만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흥행불패의 신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2011년 야심차게 준비한 [마이웨이]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마이웨이]의 흥행 실패후 강제규 감독의 선택은 의외로 [장수상회]입니다. 지금까지 규모가 큰 영화만 연출을 했던 강제규 감독이기에 노년의 아기자기한 사랑을 다룬 [장수상회]가 어울릴까?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어깨에 힘을 쫙 빼고 담백하게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어쩌면 [장수상회]가 젊은 세대를 위해 뒤로 물러서는 성칠과 금님의 이야기처럼, 이제는 한국영화를 이끌어나갈 대작의 짐은 벗어던지고, 조금은 가벼운 영화로 한발 물러서겠다는 강제규 감독의 고백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며 [장수상회]를 다시금 바라보니 세대교체는 시대의 흐름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저 역시 웅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름답게 뒤로 물러나야죠. 성칠과 금님처럼 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려 놓고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세대교체는 내가 거부한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름답게 뒤로 물로나는 것,
어쩌면 나의 늙음은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위한 준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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