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제임스 켄트
주연 : 알리시아 비칸데르, 키트 해링턴, 태론 애거튼
개봉 : 2015년 4월 9일
관람 : 2015년 4월 14일
등급 : 12세 관람가
나도 모르는 영화가 있다.
저희 회사에서도 저는 못말리는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회사 동료들이 제게 "이 영화는 어때요?"라며 묻곤 합니다. 만약 제가 "이 영화, 아직 못봤는데..."라고 대답하면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못본 영화도 있어요?"라고 되묻습니다. 제가 아무리 부지런히 영화를 보러 다닌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나봅니다.
지난 화요일, 영업부 직원이 "이 영화 보셨어요?"라며 [청춘의 증언]이라는 영화의 예매권을 제게 내밀었습니다. 저희 회사의 브랜드에서 후원한 영화라서 예매권이 회사 앞으로 몇장 지급이 되었나봅니다. 공짜 영화표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저는 "무슨 영화인데요? 이 영화, 아직 개봉 안한 영화인가 보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직원은 "이 영화, 이미 지난 주에 개봉한 영화인데... 우와! 못말리는 영화광님도 모르는 영화도 있네요."라며 놀라더군요.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사실 [청춘의 증언]이라는 제목이 낯설었기에 당연히 아직 개봉이 되지 않은 미개봉작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청춘의 증언]은 이미 지난 4월 9일에 개봉했고, 제 블로그에서도 '2015년 4월 9일 개봉작'에 버젓이 소개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영화를 싫어하는 제 영화 취향상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영화였던 것입니다.
뒤늦게 저는 [청춘의 증언]을 검색해봤습니다. [엑스 마키나], [7번째 아들]에서 매혹적인 연기를 펼쳤던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비롯하여, 미드 <왕좌의 게임>으로 인기를 얻은 후 [폼페이 : 최후의 날], [7번째 아들]에 출연하여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등극한 키트 해링턴,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의 HOT한 배우 태론 에거튼까지 일단 캐스팅이 꽤 호화롭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찬란한 젊음을 뒤로 하고 전쟁에 참가한 이들의 비극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부분이 제가 [청춘의 증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춘의 증언]은 노골적인 전쟁 영화가 아닌, 전쟁의 참혹함 속에 쓰려져간 아름다운 청춘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남은 이들이 전쟁의 희생자를 위해 해야할 역할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메시지가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목조차 몰랐을 정도로 관심없는 [청춘의 증언]에 막상 "이 영화, 봐야겠다."라는 결심이 생겼지만, 언제나 그렇듯 케케묵은 문제가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몇몇 상영극장이 있었지만, 오전이나 아예 새벽시간대가 전부였습니다. 결국 저는 제가 갈 수 있는 모든 극장을 검색한 끝에 부천의 한 극장을 찾아냈고, 퇴근 후 웅이한테 가는 것도 포기하고 [청춘의 증언]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아름다웠던 그들 그리고 전쟁
[청춘의 증언]의 시작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베라(알라시아 비칸데르), 베라의 동생이자 든든한 지원군인 에드워드(태론 에거튼), 그리고 베라를 남몰래 짝사랑하는 에드워드의 친구 빅터(콜린 모건)가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수영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베라에게도 한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을 하고 싶지만, 여성이 대학에 가서 뭘하려고 하느냐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베라가 좋은 신랑감을 만나 빨리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베라는 "난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을거야."라며 반항을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도 에드워드의 도움으로 해결이 됩니다. 베라의 부모는 베라가 옥스포드 대학의 입학 시험을 치루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즈음 베라는 옥스포드에서 베라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길을 꿈꾸는 롤랜드(키트 해링턴)와 사랑에 빠집니다. 드디어 옥스포드 입학 시험에 합격을 한 베라. 이제 그녀의 청춘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옥스포드에서 아름답게 펼쳐질 일만 남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전쟁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그들은 전쟁에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드디어 내게도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생긴거야."라며 참전을 기뻐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잘 아는 베라의 아버지는 에드워드의 군대 지원을 반대합니다. 그때 베라가 나섭니다. 에드워드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자신이 옥스포드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줬듯이, 베라도 아버지를 설득해서 에드워드가 군대에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베라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에드워드가 기를 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러한 베라의 말은 전쟁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전쟁은 그저 "난 전쟁에 참가한 참전 용사다."라는 자랑거리의 소재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진정한 지옥입니다. 하지만 베라도, 에드워드도 그러한 사실을 그땐 몰랐던 것입니다.
베라가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게 된 것은 롤랜드가 최전방에 배치되고 나서부터입니다. 베라는 신문에 실린 끝없이 이어지는 전사자 명단을 보고나서야 롤랜드가 전쟁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옥스포드를 휴학하고 전쟁터의 간호사로 지원해서 직접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있을까?
어쩌면 베라는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것은 베라 뿐만이 아닙니다. 에드워드, 롤랜드, 빅터도 앞다퉈 군에 지원입대합니다. 그들에게 전쟁은 삶과 죽음을 오고가는 지옥의 경계선이 아닌, 전쟁에 참여해야지만 남자라며 어깨를 펼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시력 때문에 군에 갈 수 없었던 빅터도 재검을 통해 끝내 입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베라는 군의 간호사로 근무를 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두들 그녀가 옥스포드 대학 출신이라며 경계를 하지만, 그녀는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병원에 실려온 부상을 당한 병사들처럼 자신의 연인도, 자신의 동생도 부상을 당하면 어떻게하나라는 걱정이었습니다.
롤랜드의 첫 휴가때 보여준 모습은 그러한 베라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입대전의 롤랜드라고 할 수 없을만큼 내면적으로 참혹하게 무너진 롤랜드의 모습은 롤랜드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더이상 예전의 롤랜드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베라는 그러한 롤랜드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굳건히 먹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여지없이 짓밟습니다.
영화를 보며 내가 만약 베라였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청춘의 증언]은 베라에게 잔인했습니다. 두번째 휴가날 롤랜드와 약혼하기로 했던 베라. 하지만 롤랜드의 두번째 휴가 날에 베라를 찾은 것은 롤랜드가 아닌, 그가 전사했다는 잔인한 소식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롤랜드의 첫번째 휴가날, 군에 입대하지 않은 빅터에게 "군대에 가지 않은 네가 뭘 알아?"라며 핀잔을 줬던 베라. 그런데 어느날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해 죽어가는 빅터가 베라 앞에 나타납니다. 그는 짝사랑했던 그녀의 핀잔을 들은 이후 재검을 통해 군에 입대했다가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머리에 큰 부상을 당한 빅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베라는 일부러 최전방에 지원해서 부상을 당해 죽어가는 에드워드를 살려내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군에 복귀한 에드워드가 전사했다는 잔인한 소식 뿐이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그들은 그렇게 베라만 남겨두고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하나씩 목숨을 잃어갑니다. 남겨진 베라는 그저 흐느껴우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뿐 다른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습니다.
용감한 자기 반성을 통해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다.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이들에게 잔인한 상처만 남겨두고 끝납니다. 종전 선언 이후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멍하니 서있던 베라의 모습은 그러한 잔인한 상처를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사랑도, 동생도, 친구도...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영화의 메시지가 시작됩니다.
전쟁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 어느 공간.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며 독일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칩니다. 바로 그때 베라가 발언을 신청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전쟁으로 인하여 약혼자와 동생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떳떳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베라는 에드워드가 전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그땐 그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전쟁에 참가해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라는 깨닫습니다. 적군인 독일군도 그들과 똑같이 전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청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전쟁의 진정한 적은 독일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싸우라고 선동한 위정자였던 것입니다. 베라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을 반대한다라고...
제가 전쟁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단순한 흑백 논리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아군과 적군으로 나눠고, 적군을 죽이는 행위는 영웅적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아군과 적군은 과연 무엇으로 나뉘는 것일까요? 영화를 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아군은 적군이 되고, 적군은 아군이 됩니다. 그저 흑백논리로 간편하게 아군과 적군을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전쟁의 진정한 적은 적군이 아닙니다. 바로 전쟁 그 자체입니다. 국가를 위해 싸우라고 선동하며 뒤에 숨어서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는 그들을 위해 우리 국민들은 애국이라는 허상 속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죽여야 하는지는 나중에 가면 잊어버립니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군인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 싸우는 것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실체이며, 그렇기에 전쟁의 참혹감은 온데간데없이 영웅만 내세우는 전쟁영화를 저는 싫어합니다.
[청춘의 증언]은 용기있게 외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희생을 당한 이들을 위한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적국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또다른 전쟁을 일으켜 희생자 수를 늘리는 것 뿐입니다. 적국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과연 우리는 이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부터 반성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청춘의 증언]은 영화의 주인공이기도한 베라 브리튼이 1933년 쓴 동명의 회고록을 토대로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책은 마로니에북스 선정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여성의 몸으로 이렇게 용기있는 자기 반성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베라 브리튼의 회고록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이 될 자격이 있으며, 그러한 회고록을 원작으로 했기에 [청춘의 증언] 또한 꼭 봐야할 영화입니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그녀,
사랑하는 약혼자와 동생, 친구를 잃은 그녀는
독일에 대한 증오 대신,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전쟁을 되돌아본다.
그렇기에 그녀의 증언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용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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