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화장] - 마음으로 지은 죄의 댓가

쭈니-1 2015. 4. 15. 17:44

 

 

감독 : 임권택

주연 : 안성기, 김규리, 김호정, 전혜진

개봉 : 2015년 4월 9일

관람 : 2015년 4월 12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거장의 무거움

 

2007년 6월 8일은 제 개인적으로 잊기 힘든 날입니다. 당시 저는 다니던 회사를 무작정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어느 지역 언론사에서 임권택 감독의 인터뷰를 진행해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인터뷰라니... 저는 임권택 감독에게 인터뷰에서 할 질문을 정리하기 위해 전날 밤새 인터넷으로 임권택 감독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며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인터뷰 당일. 사진기자도 없이 지역 언론사 대표와 단 둘이 참가한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동안 저는 임권택 감독의 대답을 노트에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100번째 연출작인 [천년학]의 흥행 실패로 아쉬워 하고 있었고, 저는 인터뷰를 마친 후 꼭 [천년학]을 챙겨 보겠노라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나가도록 [천년학]은 물론 2010년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 취향 탓입니다. 가벼운 오락영화를 선호하는 제게 거장의 무거운 영화는 아무래도 꺼려졌던 것입니다. [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4년의 투병 끝에 죽은 아내를 두고 젊고 매력적인 부하직원 추은주(김규리)를 가슴에 품었던 대기업 중역 오정석(안성기)의 이야기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항상 그러했듯이 묵직한 무거움으로 제 외면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 5월에 관람한 [하류인생]이후 무려 11년만의 임권택 감독 영화와의 만남은 우연한 곳에서 이어졌습니다. 포털사이트 Daum에서 [화장]의 영화 예매권을 5천원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에 판매를 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2007년 6월, 제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던 임권택 감독의 모습이 떠올라 [화장]이 어떤 영화인지 예고편이나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화장]의 감각적인 예고편을 보고나니 '이 영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5천원의 금액을 결재해서 [화장]의 예매권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상영하는 극장이 별로 없는 탓에 일요일 밤까지 기다리고 나서여 [화장]을 관람할 수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화장]을 굉장히 인상깊게 봤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제가 지금까지 봐왔던 상업영화가 갖춰야하는 영화적 재미는 현저하게 부족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도 추은주를 가슴에 품은 오정석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불꽃같은 사랑은 없습니다. [화장]에는 불륜, 음모, 배신 등 자극적인 소재 또한 찾아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그저 오정석의 내면을 조용히 따라가기만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화장]은 사회적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중년 남자의 가슴 깊이 품은 사랑을 현실적으로 풀어낸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오정석은 화장품 대기업의 마케팅을 총괄하는 중역입니다. 그는 부하직원에게 존경을 받는 직장상사이며, 회장이 가장 총애하는 부하직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외동딸 오미영(전혜진)의 자상한 아버지이자, 암에 걸린 아내(김호정)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착한 남편이기도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중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아내의 암이 재발한 이후 만난 부하 여직원 추은주를 가슴속 깊이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회사에서의 위치를 이용해서 추은주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멀찌감치에서 추은주를 바라보며 그녀의 젊음을 탐미할 뿐입니다.

과연 오정석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참 애매한 부분입니다. 그는 법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 어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에 아내가 아닌, 품어서는 안될 부하직원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화장]의 예고편에서는 "당신 마음 속에 품은 여자가 누구야?"라며 다그치는 아내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에서는 그러한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오정석에게 감정이입이된 저는 아내가 오정석이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나 않았을까 조마조마해야 했습니다.

 

오정석은 불륜을 저지른 적도 없고, 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당신은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며 비난하고, 딸은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적은 있어?"라며 묻습니다. 오정석은 아내에게, 그리고 딸에게, 난 남편으로, 아버지로 최선을 다했는데, 왜 날 비난하냐며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저 대답을 회피하고 맙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정석의 인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는 오미영의 대사를 통해 오정석과 그의 아내의 관계가 간략하게 나옵니다. 오정석은 아내가 벌어주는 돈으로 대학을 나왔던 것입니다. 단칸방에서 시작했던 그들의 결혼생활은 이제 몇십억이 넘는 초호화 주택에서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내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정석은 묵묵히 남편의 자리를, 아버지의 자리를 지킵니다. 아내는 자신보다 키우는 개, 보리에게 더 신경쓰지만 오정석 또한 그러한 것 따위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저 남편으로써, 아버지로써 할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오정석이 아내를 사랑했냐고요? 아내가 죽길 마음 속으로 바랬냐고요? 어쩌면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4년간의 간병에 지쳐 아내가 죽길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늙음에 대한 죄책감

 

어쩌면 오정석은 아내에게는 그 어떤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별장에서 발기부전 치료제를 먹으면서까지 아내와의 마지막 섹스에 최선을 다했던 그였습니다. 그렇기에 아내가 죽는 그 순간 눈물을 흘리는 대신 묵묵히 장례를 준비합니다. 그에게 아내의 장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일 뿐입니다. 

하지만 추은주에게는 한없는 미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전립선 비대증이라는 병에 걸린 그는 소변 조차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비뇨기과 의사는 오정석의 전립선 비대증에 대해서 이건 병이 아닌 노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오정석은 너무 늙어서 남성으로써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가 젊음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추은주를 마음 속으로나마 탐한 것입니다. 

오정석이 추은주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추은주에 대한 오정석의 죄책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직장상사로써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 질책을 한 이후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오히려 그녀를 다독거립니다. 추은주의 결혼식은 지방 출장 핑계로 피하고, 그녀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려하자 추천서를 써주기까지합니다. 그저 오정석이 다정다감한 직장상사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과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순간까지 오정석은 추은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피합니다. 어쩌면 그러한 그의 행동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래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기에 자신의 욕망을 꾹 눌러 참는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별장으로 자신을 찾아온 추은주를 끝내 피하는 오정석의 모습은 그렇기에 서글펐습니다. 이제 아내는 죽고 없습니다. 딸은 취업비자을 취득해서 조만간 미국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추은주는 더이상 부하직원도 아닙니다. 오정석이 추은주를 사랑한다고해도 그러한 그의 사랑이 사회적 비난을 받을 명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늙었고, 추은주는 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늙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늙음으로 인하여 남성적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오정석 입장에서는 추은주에게 만큼은 늙음이 죄스러웠던 것입니다. 항상 당당했던 그의 아내가 병으로 인하여 대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오정석에게 도움을 받으며 수치심에 "미안해"라며 흐느꼈듯이, 남성적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오정석은 마음 속이지만 추은주를 탐한 죄책감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의 댓가

 

[화장]은 분명 무거운 영화입니다. 늙었기에 추은주를 마음속으로만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오정석을 영화는 묵묵히 따라갈 뿐입니다. 영화는 오정석에게만 관심을 가집니다. 오정석의 아내는 물론 추은주에게까지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합니다. 모든 것은 오정석의 중심으로 표현됩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더욱 정적으로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정석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은 추은주에 대한 욕망만큼은 화사하고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아내와의 마지막 섹스의 순간 떠올린 추은주의 아름다운 나체는 마치 한폭의 그림 같았고, 추은주를 향한 욕망을 대변하는 무용극 장면은 감각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임권택 감독은 오정석이라는 중년 남성의 마음 속 사랑을 1시간 30분 동안 완벽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쩌면 [화장]은 나이 80세를 바라보는 노장 임권택 감독이기에 가능했던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 늙음의 죄스러운 사랑을 이해하기에 그는 오정석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안았고, 그의 마음 속 사랑을 아름답게 꾸며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화장]을 인상깊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느덧 제 나이 40세를 훌짝 뛰어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한 회사의 관리부 책임자로써 사회적 위치에 올랐기에 마음으로밖에 할 수 없었던 오정석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화장]을 보고나서 제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것은 과연 마음으로 짓는 죄를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 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과연 죽음을 앞둔 아내를 두고 젊은 부하직원 추은주를 마음으로 탐한 오정석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만약 오정석을 비난할 수 있다면 무엇이 비난의 근거가 되어야만 할까요?

결국 추은주는 떠나고 오정석은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낼 것입니다. 존경받는 직장상사로써, 인정받는 부하직원으로써, 그리고 자상한 아버지이자, 투병중이었던 아내를 끝까지 간병하던 남편으로 그는 기억되고, 생활해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추은주에 대한 그리움도 평생 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 안고 가야할 마음으로 지은 죄의 댓가인 셈입니다.

저 역시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수 많은 죄를 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장 두려운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마음으로 지은 죄를 다른 사람에게 들켰을 경우입니다. 그로인한 누군가의 비난은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오정석이 마지막 순간 추은주를 피한 것도 마음의 죄를 추은주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저는 추은주를 피해 묵묵히 걸어가던 오정석의 모습에서 마음이 놓임과 동시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의 댓가는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으로 죄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죄를 비난하기 보다는

그가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죄의 댓가가 측은했다.

나 역시 늙어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