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스물] - 젊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코미디

쭈니-1 2015. 4. 1. 14:26

 

 

감독 : 이병헌

주연 : 김우빈, 이준호, 강하늘, 정소민, 이유비, 민효린, 정주연

개봉 : 2015년 3월 25일

관람 : 2015년 3월 29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나의 스무살 이야기를 해주마.

 

지난 일요일 밤, 드디어 [스물]을 보고 왔습니다. 목요일에는 구피의 치맥 유혹때문에 예매를 취소했고, 금요일에는 예상하지 못한 여중생들의 단체관람이 무서워 [인서전트]로 바뀌봐야 했기에, 두번의 실패 끝에 결국 [스물]을 본 것입니다. [스물]을 보는 내내 저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병헌 감독이 젊음의 방황을 코미디로 승화시켰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스물]을 보고나니 자연스럽게 나의 스무살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2월, 저는 고등학교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을 해야 했지만, 마른 체형 때문에 번번히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제게 고등학교 졸업식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취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어 졸업식에 참가하지만, 저는 백수 상태로 초라하게 졸업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졸업후 '향문사'라는 작은 출판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성적이 비슷한 친구가 은행에 취업한 것과 비교한다면 초라한 첫 직장이었지만, 그래도 제겐 첫 직장이었기에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향문사'에서 제가 느낀 것은 대한민국에서 고졸로 산다는 것의 비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1992년 말에 회사에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강남역 롯데리아에서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시 학원을 다녔고, 1994년 전문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이렇게 제 스무살을 쭈욱 쓰고보니 참 별것 없는 것 같습니다. 작은 회사에 다니다가 1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사표를 썼고,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시학원을 다녔던 정도.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보잘것 없는 첫 직장이었지만 처음으로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의 묘한 기분.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귀었던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 상업계 고등학교 출신이라 수학, 영어 기초가 안되어 성적은 바닥권이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쳤던 입시학원에서의 나날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 저는 희망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롯데리아에서 하루에 4시간에서 8시간까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아르바이트 시급을 받으면 친구들과 노느라 며칠만에 전부 써버렸을 정도로 계획성도 없었고,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보면 성적이 바닥권이었기에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땐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는 아직 젊은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낙천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바닥권의 성적이었지만 상업계 고등학교 출신이라 가산점을 받아 집에서 가까운 인덕 전문대학 공업경영학과에 입학했고, 모아놓은 돈은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 대학 입학금을 내주셔서 대학생활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어떻게든 된 셈입니다.

 

 

희망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스물]은 제가 스무살때 느꼈던 이상한 자신감을 고스란히 지닌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치호(김우빈), 동우(이준호), 경재(강하늘)는 전도유망한 젊은 청춘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인 소민(정소민)을 동시에 짝사랑했다는 이유로 단짝 친구가 된 그들은 그냥 젊음에 의한 자신감이 넘치는 우리 주변의 스무살 아이들에 불과합니다.

치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뭘 해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채 그저 부유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일상입니다. 동우는 만화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의 사업 부도 때문에 가난에 허덕이며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생활을 해야 하고, 경재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일 뿐입니다. 이들은 모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꿈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희망이 없거나...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은 괴로워하거나 세상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즐길 뿐입니다. 치호는 클럽에서 여자를 꼬시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동우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미술 학원에 다니며, 경재 역시 대학 선배인 진주(민효린)를 짝사랑하며 나름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냅니다. 이렇게 하루를 즐기며 살아가던 그들에게도 각자의 아픔이 찾아오지만 그 누구도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습니다. 아픔이 찾아오면 찾아오는대로 또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스물]의 미덕은 바로 그것입니다. 가끔 청춘을 소재로한 영화들 중에는 청춘의 방황을 표현하기 위해 마약, 섹스, 임신 등 자극적인 소재를 주르륵 나열시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극적인 것들에 공감할 수 있는 관객은 몇이나 될까요? 저 역시도 스무살을 보냈지만, 그러한 자극적인 소재의 영화에 공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리고 제 친구들은 그러한 스무살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물]의 이야기엔 공감합니다. 저 역시 치호처럼 무엇을 하고 싶은지, 뭘 해야하는지 알지 못해서 빈둥거리는 백수생활을 오랫동안 했었고, 동우처럼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롯데리아를 비롯하여, 편의점, 팬시점, 비디오방 야간알바까지 여러 아르바이트를 섭렵했습니다. 경재처럼 대학에 입학해서는 그저 막연히 대기업에 취업해서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영화에 공감이 되니 영화 속의 에피소드가 마치 내 일처럼 느껴집니다. 자위행위를 하다가 여동생 소희(이유비)에게 들키는 경재의 낯뜨거운 에피소드부터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는 젊은 시절 누구나 겪는 삼각관계, 그리고 친구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섹스 이야기로 히히덕거리는 모습까지... 한심해보이지만, 그것이 지금은 그리운 나의 스무살 이야기이기에 [스물]을 보며 저는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청춘의 종합 선물세트

 

[스물]은 어찌보면 청춘의 종합 선물세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각각 개성이 강한 치호, 동우, 경재를 통해 각기 다른 청춘의 로망을 보여줍니다. 먼저 치호의 경우를 보면... 매력적이지만 대책은 없는 치호를 통해 청춘만이 할 수 있는 좌충우돌 모험담을 보여줍니다. 그는 소민과 사귀고 있지만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과 하룻밤의 섹스를 즐기고, 단역 배우인 은혜(정주연)와 함께 연예계의 스폰서 문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치호의 스무살의 나날은 청춘의 방황을 다룬 이전의 영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키워드들입니다. 하지만 [스물]은 치호 이야기에서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대책없는 치호의 캐릭터 성격을 잘 이용하며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맛깔스러운 청춘의 방황을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독에게 '고추 행성의 침공' 시나리오를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자칫 단역 배우인 은혜의 아픔으로 치우칠 수 있는 치호의 이야기가 코믹하게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우의 이야기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한 동우의 모습에서 슬픔 따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동우 스스로 '울기에는 참 애매한 문제'라고 밝혔듯이 동우는 지금 당장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포기가 아닙니다. 그는 젊기에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직장인 머리를 하고 나타난 동우의 모습에서 부담없이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경재는 청춘 영화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캠퍼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는 새내기 환영식에서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고,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는 미모의 선배 진주를 짝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치호의 전여친이자, 첫사랑이었던 소민과 커플을 이룹니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캠퍼스 이야기의 전형적인 전개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 역시 짝사랑이라면 남들 못지 않게 해봤고, 친구에게 좋아하던 여자 친구를 빼앗기기도 했으며,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길뻔 하기도 했으니까요. 젊기에 짝사랑도, 삼각관계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젊은 시절 제 여자 친구를 빼앗아갔던 친구와 가끔 연락을 하고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그날의 일을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치호, 동우, 경재의 이야기는 분위기만 살짝 바꾸면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물]은 굳이 그러지 않습니다.  [오늘의 연애]의 각본을 쓰며 코믹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능력을 보여줬던 이병헌 감독은 분위기가 조금 심각해지려고 하면 재기넘치는 각종 패러디로 다시금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습니다. <모래시계>에서 태수(최민수)가 사형되기 전의 명장면, 김우빈과 이나영이 출연했던 커피 믹스 CF,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두근두근' 등 패러디를 통해 심각해질 틈을 주지 않고 관객을 끊임없이 웃게 만듭니다.

 

 

젊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코미디

 

[스물]은 후반부 그들의 아지트인 중국음식점을 찾아온 조폭과의 싸움을 통해 코미디의 화룡정점을 찍습니다. 이 역시 어찌보면 굉장히 심각한 장면입니다. 아버지때부터 물려받은 중국음식점을 재개발로 빼앗길 위기에 처한 소민의 오빠. 조폭들과 맞서 싸우는 치호, 동우, 경재. 슬로우모션으로 진행된 이 싸움은 너무 웃다가 지쳐버릴 정도로 최강의 코믹함을 자랑합니다.

[스물]은 항상 그런 식입니다. 모든 상황들을 코미디로 변환시킵니다. 그런데 그러한 코믹함에 결코 억지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비록 중국음식점을 빼앗겨도 다른 곳에서 분식점을 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가는 소민의 오빠처럼, 우리 역시 무언가를 잃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기회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는 젊으면 젊을 수록 더욱 많겠죠. 치호, 동우, 경재의 젊음이 자체발광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젊음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호와 동우, 경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군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남자의 인생은 군대를 가기 전과 군대를 갔다온 후로 나뉜다고 합니다. 군대를 가기 전, 아무 생각없이 하루를 즐겼던 이들이라도 군대를 다녀오면 이젠 내일을 계획하고, 준비를 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스물]은 코미디 영화입니다. 젊은 청춘의 방황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의 방황을 멋지게 포장하지도 않고, 비장한 분위기로 몰고 가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들의 방황을 최대한 가볍게, 그리고 코믹하게 그려나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영화가 좋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날의 추억들,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고, 막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땐 젊기에 그날의 방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자체발광 코미디'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저는 이 카피가 [스물]을 나타내는 가장 알맞은 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스물'이 아닌 '서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치호, 동우, 경재의 이야기는 찌질함의 극치를 달리며 관객에게 웃음대신 짜증을 안겨줬을 것입니다. '스물'이었기에 그들의 찌질함도 호쾌한 코미디가 되는 것입니다.

김우빈, 이준호, 강하늘, 정소민, 이유비, 민효린, 정주연 등 젊은 배우들의 매력도 좋았습니다. 특히 [기술자들]에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 혼자 영화 전체를 책임지려 했던 김우빈은 [스물]에서 또래 배우들과 함께 어깨에 힘을 빼고 자신의 연기력을 맘껏 발휘합니다. [스물]은 이렇게 젊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코미디 영화였고, [스물]을 보는 동안은 저도 대책없는 스무살이 되어 신나게 영화 속에 흠뻑 빠졌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스물]은 행복한 영화였습니다.

 

내가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 과연 지금의 내 모습은 바뀔까?

아니,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또다시 맘껏 오늘 하루를 즐길것 같다.

오늘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젊음의 특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