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주연 : 줄리안 무어, 알렉 볼드윈, 크리스틴 스튜어트, 케이트 보스워스
개봉 : 2015년 4월 29일
관람 : 2015년 5월 4일
등급 : 12세 관람가
내가 만약 알츠하이머에 걸린다면...
살면서 저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가 늙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까지 놓아서 구피와 웅이의 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기분이 듭니다. 물론 저 역시 오래 살아서 재미있는 영화를 최대한 많이 보고 싶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짐이 되면서까지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이웃에 치매걸린 부모님을 모시며 사시는 아주머니가 계셨었습니다. 당시에는 요양시설이라는 것이 없어서 이웃집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땐 그 아주머니가 굉장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돌봐야하는 아주머니 뿐만 아니라, 치매에 걸린 부모님들도 불쌍합니다. 그 분들도 그렇게 자식들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셨을텐데...
저와 구피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으는 이유는 늙어서 웅이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노후만큼은 웅이와 함께가 아닌 구피와 함께 조용히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중요하지만, 몸도 건강해야 할 것이며, 마음 또한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몸을 가눌 수 없는 파킨슨병이나,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치매에 걸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습니다.
[스틸 앨리스]는 세 아이의 엄마로써, 사랑스러운 아내와 존경받는 교수로써 행복한 삶을 살던 앨리스(줄리안 무어)가 어느날 희귀성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앨리스의 일상을 그저 묵묵히 뒤쫓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초반 당당했던 그녀가 서서히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마도 줄리안 무어가 지난 아카데미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이유도 이렇게 티나지 않은 잔잔한 연기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앨리스는 자신의 병때문에 울부짖지 않습니다. 앨리스의 가족들도 그녀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겪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조금더 앨리스와 앨리스의 가족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법도 한데 [스틸 앨리스]는 결코 그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다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앨리스가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틸 앨리스]는 충분히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내가 만약 앨리스처럼 알츠하이머에 걸린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이 무너지다.
앨리스는 언어학 교수입니다. 영화는 초반,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언어학 교수인지 보여줍니다. 게다가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내이며, 세 아이의 완벽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유일한 고민이라면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배우가 되겠다며 연극무대에 서는 막내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에 대한 걱정 뿐입니다. 이쯤되면 앨리스의 인생은 거의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그녀가 알츠하이머에 걸립니다. 처음엔 사소한 단어가 자꾸 생각이 나지 않더니 나중엔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찾지 못합니다. 앨리스는 남편 존(알랙 볼드윈)에게 말합니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다고... 평생 지적인 존재로 완벽한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알츠하이머에 걸린 자신의 모습은 창피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는 그녀가 걸린 희귀성 알츠하이머가 유전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앨리스는 아버지에게 병을 물려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자녀들도 50%의 확률로 희귀성 알츠하이머가 유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앨리스의 우려대로 장녀인 애나(케이트 보스워스)에게 희귀성 알츠하이머가 유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녀는 자신이 걸린 알츠하이머보다는 그것을 애나에게 유전되었다는 사실에 더 가슴아파합니다.
존은 회사에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하지만 앨리스 때문에 그 기회를 뒤로 미룹니다. 리디아는 앨리스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LA에서 배우로써의 기회를 포기하고 뉴욕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앨리스는 가족들의 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앨리스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족이기에 당연한 희생으로 받아들입니다. 앨리스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욱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영화의 후반부, 알츠하이머가 많이 진행된 앨리스는 오래전 자신이 남긴 동영상을 발견합니다. 그 동영상 속 과거의 그녀는 병으로 인하여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현재의 앨리스에게 말합니다. 서랍속 깊숙이 숨겨놓은 약병을 찾아 한꺼번에 약을 모두 먹고 깊은 잠에 빠지라고... 그녀는 오래전부터 가족의 짐이 될 것이 뻔한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스틸 앨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알츠하이머로 인하여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앨리스가 과거의 자신이 남긴 동영상을 발견하고 동영상이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옳은 행동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의 짐이 되느니 조용히 삶을 마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츠하이머에 걸린 앨리스조차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결국 죽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남겼던 동영상도, 자살하려 했던 행동들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원치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짐이 되어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녀의 남은 인생이야말로 제가 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스틸 앨리스]의 여운은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리처드 글랫저 감독을 추모한다는 마지막 자막이 화면 가득 새겨집니다. 리처드 글랫저는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과 함께 [스틸 앨리스]를 공동연출한 감독입니다. 그는 2011년 초 발음장애로 병원을 찾았다가 루게릭병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사멸되는 질환으로, 병이 진행되면 결국 호흡근 마비로 사망에 이르게 되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투병 중 리사 제노바의 소설 <스틸 앨리스>를 읽게 되고 주인공인 앨리스가 알츠하이머에 걸리며 겪게되는 두려움과 고독에 깊이 공감하여 영화화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그는 손과 팔을 움직일 수 없고 스스로 먹거나 옷을 입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늘 현장에 나와 작업에 참여했다고 하네요. 결국 그는 [스틸 앨리스]가 제87회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것을 본 후, 2015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스틸 앨리스]가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상황이 앨리스와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앨리스의 변화를 굉장히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과장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객의 눈물샘을 노골적으로 자극시키지 않으면서도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로 인하여 어떻게 무너지는지 관객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앨리스의 변화가 너무나도 섬세하게 묘사되었기에 오히려 저는 앨리스의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앨리스가 과거의 자신이 남긴 동영상을 보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앨리스와 현재의 앨리스를 비교하면서 "언제 앨리스가 저렇게 무너졌지?"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의 연출과 줄리안 무어의 연기는 섬세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파킨슨병에 걸리셨고, 그로 인해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못하는 모습은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제게 커다란 산과도 같은 존재였거든요. 그리고 지금 저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도 아버지와 같은 병에 걸릴까봐. 지금 저는 웅이에게 친구같은 아빠이고, 죽는 그 순간까지 웅이의 짐이 아닌 친구같은 아빠로 남고 싶습니다. [스틸 앨리스]를 보고나니 그러한 두려움이 더욱 짙어졌습니다.
하늘은 내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선물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가지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몸, 마음 건강히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한 소원이 이뤄진다면 내 인생 또한 완벽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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