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무뢰한] - 너는 내 약점

쭈니-1 2015. 6. 4. 18:03

 

 

감독 : 오승욱

주연 :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개봉 : 2015년 5월 27일

관람 : 2015년 6월 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재미있는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대부분의 일반 관객들이 그러하듯이 저 역시 재미있는 영화를 쫓아 극장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영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재미있다'라는 표현 자체가 워낙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영화를 두고 어떤 분들은 재미있다고 칭찬하고, 어떤 분들은 재미없다며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결국 재미에 대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영화가 흥행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천만 관객이 재미있다고 추천해도 내 자신이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최소한 내겐 재미없는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거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투덜거려도 내 자신이 재미있다면 그 영화는 내게 재미있는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영화를 고를 때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을까?' 보다는 '과연 이 영화가 내게 재미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결국 '재미있는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게 재미있는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영화를 본 후 극장에서 '돈이 아깝다'며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과연 내게 재미있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요?

 

저는 영화의 장르를 꽤 따지는 편입니다. 공포영화는 무조건 싫고, 판타지, SF영화는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편입니다. 그리고 상상력을 발휘한 색다른 줄거리를 가진 영화를 좋아하고, 선호하는 감독과 배우가 연출하고 출연하는 영화도 공포영화만 아니라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러한 제 기준과는 다른데 은근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무뢰한]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무뢰한]은 액션, 느와르 장르의 영화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요즘처럼 덥고 짜증나는 날씨에는 아무래도 밝고 가벼운 분위기의 영화가 저는 더 좋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줄거리는 살인자 박준길(박성웅)을 잡기 위해 박준길의 애인인 김혜경(전도연)에게 접근한 형사 정재곤(김남길)이 김혜경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흔한 내용입니다. 이런 신파 드라마는 순애보가 판을 치던 70, 80년대가 어울립니다. 결국 [무뢰한]은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전도연이 출연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재미있는 영화의 범주안에 들기엔 어정쩡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른 무더위로 인하여 온 몸이 끈적이는 상황에서 굳이 [무뢰한]을 보겠다고 집 근처에 처음 생긴 메가박스 화곡을 찾았습니다. 처음 간 극장이라 주차장을 찾지 못해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영화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좌석에 앉아 무사히 [무뢰한]을 관람할 수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에 대한 기준이 무의미하다.

 

자! 그렇다면 [무뢰한]을 보고 난 후 다시 한번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과연 [무뢰한]은 재미있는 영화인가?' 어차피 영화에 대한 재미유무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영화의 정보를 토대로 유추할 뿐입니다. 진정한 영화의 재미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판가름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서도 [무뢰한]에 대해서만은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뢰한]이 재미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대답을 제가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 기준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이지만, 영화를 본 후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내용은 너무 뻔합니다. 스토리 전개에서도 자극적인 요소가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지루하기까지합니다. 특히 정재곤의 캐릭터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탓에 그가 왜 3류 인생에 불과한 김혜경을 사랑하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무뢰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인자의 여자를 사랑하게된 형사의 내면인데,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영화는 고리타분한 신파가 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무뢰한]은 재미없는 영화가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정재곤을 바라보는 김혜경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운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확장되고 있습니다.

 

[무뢰한]을 본지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커져만가는 [무뢰한]에 대한 제 여운의 정체를 조금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결국 내린 결론은 바로 김혜경에 대한 측은지심입니다. 사실 [무뢰한]에서 김혜경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살인자 박준길의 애인이라는 것 뿐입니다. 박준길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지만, 그럼에도 박준길에게 남은 모든 것을 거는 여자. 그런 바보같은 여자가 바로 김혜경입니다.

오승욱 감독은 의도적으로 정재곤의 캐릭터 설명을 최소화시킵니다. 그는 경찰이지만 그다지 정의롭지 않고, 그렇다고해도 악질 경찰 또한 아닙니다. 그냥 적당히 부패한 어찌보면 굉장히 평범한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캐릭터 설명이 생략되고 평범하기까지한 정재곤은 영화를 보는 제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안겨줍니다. 다시말해 오승욱 감독은 관객에게 정재곤의 시선으로 김혜경을 바라보도록 주문하는 것입니다.

김혜경의 집에 도청 장치를 하고, 그녀가 다니는 단란주점에 영업부장으로 위장취업까지하며 김혜경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정재곤. 처음에 그녀는 박준길을 잡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혜경은 정재곤의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너는 내 약점이다.

 

처음 김혜경은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바보같은 여자였습니다.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된 박준길은 돈이 필요해서 김혜경을 이용합니다. 그러한 사실은 김혜경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박준길과의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화류계 생활 10년동안 남자에 대해서는 단맛 쓴맛 모두 맛본 그녀는 왜 박준길에 대해서만큼은 바보같이 매달리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박준길이 김혜경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스의 약점은 발뒤꿈치였습니다. 반인반신인 그는 발뒤꿈치를 제외하고는 불사의 몸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약점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약점은 제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약점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보기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불사신 아킬레스가 그깟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았다고 죽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재곤은 단란주점 영업부장으로 위장취업을 한 후 처음 마주친 김혜경에게 처음부터 반말로 무례한 언행을 합니다. 속된 말로 그녀를 깔본 것입니다. 그도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박준길에 대한 김혜경의 행동을 생각한다면 그녀는 그렇게 무시당해도 되는 바보같은 여자입니다. 하지만 김혜경은 정재곤에게만 바보같은 여자일 뿐, 다른 이들에겐 당찹니다. 그녀가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장면에서의 카리스마는 그녀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재곤에게도 김혜경은 약점이 되고 맙니다. 김혜경은 단란주점에서 몸을 파는 여자입니다. 게다가 살인자 박준길을 숨겨주기 위해 바보같은 짓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정재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말도 안되는 선택입니다. 하지만 박준길에게 김혜경이 그러했듯이, 김혜경에게 정재곤은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바보같은 선택을 합니다.

김혜경이 좋아하는 귀걸이를 선물하고, 그녀에게 "박준길과 도망가지 말고 그냥 나하고 살자."라고 말합니다. 정재곤의 머릿 속에는 김혜경과의 사랑이 자신에게 도움될 일이 없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계속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립니다. 김혜경에게 "내 말을 믿냐?"라며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 외면하려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재곤에게 김혜경은 말합니다. "아니야. 진짜 같아."

아마도 김혜경의 그 한마디가 정재곤의 마음의 더욱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녀의 박준길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그저 박준길의 도피자금을 뜯어내기 위해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편할텐데... 잠시나마  김혜경은 정재곤에게 흔들린 것입니다. 결국 정재곤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지만, 그로인하여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됩니다.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거짓된 사랑의 절망감 아니었을까?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이미 [너는 내 운명]에서부터 시작하여 [밀양]으로 절정에 오른 후 [멋진 하루], [하녀], [집으로 가는 길] 등을 통해 진정한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는 [무뢰한]에서도 그녀만의 매력으로 저로 하여금 정재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김혜경에게 측은한 마음을 느끼도록 유도합니다.

처음엔 정재곤이 김혜경을 이해하지 못했듯, 저 역시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도연의 연기력 덕분에 영화가 진행될수록 박준길에 대한 사랑을 철석같이 믿고 싶었던 김혜경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박준길로 인하여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한 박준길의 사랑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좌절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은 더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없을 만큼 최악입니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박준길의 사랑에 걸은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그녀는 정재곤에게 흔들립니다. 어쩌면 정재곤이 "나와 함께 살자"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면 그녀는 박준길이 아닌 정재곤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정재곤을 향한 마지막 순간의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정재곤은 김혜경에게 박준길을 빼앗아갔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갔으며,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 또한 거짓임을 드러냄으로써 김혜경이 가장 두려워했던 절망감을 안겨줬으니까요.

 

측은한 마음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 역시 [무뢰한]을 보며 희망없는 현실에서 거짓된 사랑을 진실한 사랑이라 믿으며 부질없이 매달렸던 김혜경이 불쌍했지만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재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박준길에게 죽음을 당한 시신 위에 이불을 덮어줬던 피해자의 애인을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던 정재곤. 하지만 김혜경을 겪은 이후에는 애인에게 폭행을 당해 치아가 몽땅 빠져버린 여성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뉴스에서 범죄자를 숨겨주는 범죄자 애인의 이야기가 나오면 저는 "쯧쯧 저런 놈을 왜 사랑하나 몰라?"라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뢰한]은 바로 그러한 여자들을 위한 영화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녀들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녀들이 그런 사랑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라도 해달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쩌면 정재곤은 속이 시원했을지도 모릅니다. "난 당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내 일을 했을 뿐이야."라는 변명을 통해 그는 사랑을 잃고 희망마저 사라진 김혜경의 불쌍한 처지가 자신 탓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외칩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아라." 그것이 김혜경을 사랑할 수는 없었던 정재곤의 진심인 셈입니다.

 

거짓이라도 사랑을 믿고 싶었던 김혜경.

[무뢰한]을 보고난 후, 여운의 정체는 그런 김혜경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