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은밀한 유혹] - 판이 커질수록 위험해지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도박

쭈니-1 2015. 6. 9. 17:47

 

 

감독 : 윤재구

주연 : 임수정, 유연석, 이경영

개봉 : 2015년 6월 4일

관람 : 2015년 6월 8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인생은 도박이다.

 

흔히들 '인생은 도박이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박과 인생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그러한 선택으로 인하여 성공과 실패가 나눠지기도 합니다. 좋은 패를 가졌다고해서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며, 나쁜 패를 가졌다고해서 무조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패를 가졌든, 나쁜 패를 가졌든, 결국 경쟁자를 넘어서야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상당히 소심한 편이라서 도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 친구나 회사동료들과 놀러가서 고스톱이나 세븐포커를 즐기기도 하지만 제가 잃어도 되는 돈의 한도를 정해놓고 그 돈을 잃으면 그 순간 하던 도박판에서 손을 뗍니다. 그렇기에 많은 돈을 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많은 돈을 잃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제 도박 성향도 평범한 제 인생과 닮은 것 같네요.

예전에 아주 잠시 세븐포커에 푹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알바하던 후배들에게 세븐포커를 배우고 함께 했었는데, 첫날 남들은 평생 잡을 수도 없다는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잡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패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모르고 소심하게 배팅하다가 아주 약간의 돈을 땄었습니다. 나중에 그 패는 도박영화에서나 나오는 신의 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다시한번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잡고 싶다는 욕심때문에 한달치 알바비를 몽땅 날렸었습니다. 그 후 깨달았습니다. 분에 넘치는 욕심의 결말이 얼마나 처참한지...

 

[은밀한 유혹]은 도박과도 같은 영화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지연(임수정)이 천문학적인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인물이 마카오 카지노 그룹의 회장 김석구(이경영)이기도 하지만, 제가 [은밀한 유혹]을 도박과도 같은 영화라고 칭한 것은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은밀한 유혹]은 김석구 회장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지연과 성열(유연석)의 위험한 도박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윤재구 감독은 가장 먼저 지연이 이 위험한 도박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합니다. 여행 가이드를 하다가 친구와 함께 여행사를 차린 지연. 하지만 믿었던 친구가 돈을 들고 잠적해버리는 바람에 무일푼이 되어 마카오에서 맥주를 나르는 알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잠적한 친구가 지연의 이름으로 사채를 끌어다쓰는 바람에 지연은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불안한 하루를 보냅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연은 간절하게 돈이 필요했고, 바로 그때 성열이 솔깃한 제안을 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열은 왜 위험한 도박에 뛰어든 것일까요? 김석구 회장의 숨겨진 아들인 성열은 냉정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병원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자 김석구 회장의 밑에 들어옵니다. 10년동안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김석구 회장은 유언장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씁니다. 결국 성열은 지연을 이용해서 자신의 몫을 되찾으려합니다. 이렇게 김석구 회장의 유산이라는 같은 목표로 손을 잡은 지연과 성열. 그들은 과연 이 위험한 도박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요? (이후 제 글엔 이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로 상대가 달랐다.

 

김석구 회장과 결혼하여 거액의 유산을 손아귀에 넣어야 하는 지연과 그러한 지연의 든든한 조력자인 성열. 이 두사람은 김석구 회장을 상대로한 위험한 도박에서 같은 편임을 자처합니다. 아내의 죽음이후 세상의 모든 여자는 자신의 돈만 노리고 달려드는 파리떼라고 생각하는 괴팍한 성격의 김석구 회장. 분명 그는 지연에게도, 성열에게도 벅찬 상대입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성열과 임기웅변이 뛰어난 지연은 김석구 회장을 상대로 차근차근 도박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김석구 회장을 상대로한 도박은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됩니다. 영화의 중반에 김석구 회장이 지연에게 청혼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도박은 지연과 성열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이 도박의 목표를 잊은 것입니다. 지연과 성열의 목표는 애초부터 김석구 회장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김석구 회장이 아닌, 김석구 회장의 유산을 노리고 도박을 시작한 것이기에 유산이 지연과 성열에게 쥐어져야 도박이 끝나는 셈입니다.

결국 이 위험한 도박이 끝나려면 김석구 회장이 죽어야 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합니다. 김석구 회장이 수정한 유언장을 공증받기 전에 그가 돌연사해버린 것입니다. 김석구 회장과 지연은 비록 결혼을 했지만 바뀐 유언장을 공증받지 못하면 거액의 유산은 사회에 기부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다 이긴 화투판이 나가리가 될 위기에 처한 것과도 같습니다.

 

[은밀한 유혹]은 김석구 회장이 돌연사하는 그 순간부터 새롭게 시작합니다. 바뀐 유언장을 성열이 공증받기 전까지 김석구 회장의 죽음을 감춰야 하는 지연. 모든 것은 시간 싸움일 뿐입니다. 몇 시간만 더 버티면 이 지긋지긋한 도박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지연은 주사기로 죽은 김석구 회장의 위에 전복죽을 넣는 등 잔인한 짓도 서슴치 않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말입니다.

앞에서 제 경우를 예로 들었듯이 모든 도박에서 욕심은 결국 치명적인 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은밀한 유혹]은 영화의 초반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용감하게 희망을 잃지 않던 지연의 모습을 보여줬고, 중반에는 괴팍한 김석구 회장 앞에서도 당당했던 지연의 매력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켰습니다. 하지만 후반부 욕심에 눈이 먼 지연의 모습은 용감하고,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저 돈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악귀와도 같은 모습일 뿐입니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경찰앞에서는 모든 것은 성열이 시켜서 한 것일 뿐이라고 자기합리화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성열은 이 모든 사실을 부인합니다. 지연이 김석구 회장을 상대로 도박을 하는 동안 성열은 지연을 상대로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지연과 성열의 도박 상대는 서로 달랐습니다. 여행사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던 지연. 그녀는 또다시 그렇게 성열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성열의 입장에서 도박의 재구성

 

지연과 성열 VS  김석구 회장의 대결로만 보였던 [은밀한 유혹]의 도박은 사실 (지연 VS 김석구 회장) VS 성열의 대결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셋의 도박에서 가장 유리한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남의 패를 훤히 꿰뚫고 있지만 자신의 패는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성열입니다. 이는 캐릭터 설명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윤재구 감독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친절하게 지연의 캐릭터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0년동안 김석구 회장의 최측근에서 보필한 성열과 요트의 승무원들을 통해 김석구 회장의 캐릭터도 설명되어집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열의 캐릭터가 설명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물론 성열이 자신의 입으로 지연에게 과거를 고백하지만 그것을 100% 믿을 수는 없습니다. 제3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입으로 털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은밀한 유혹]은 철저하게 성열의 캐릭터를 숨깁니다. 결국 성열은 지연의 뒤에 숨어서 상대는 모르는 자신만의 도박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성열의 도박을 눈치챈 부분은 성열이 지연에게 키스를 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장면을 지연과 성열의 러브라인으로 판단했겠지만, 가만히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성열의 배팅이었습니다.

 

성열의 도박은 지연이 김석구 회장과의 도박에서 승리를 해야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지연의 뒤에서 그녀가 김석구 회장과의 도박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승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처음 지연을 위해 준비한 미끼는 거액의 돈, 즉 김석구 회장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지연이 괴팍한 김석구 회장의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자 성열은 두번째 미끼를 준비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지연이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이라는 사실은 이미 조사를 통해 파악한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성열은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해서 치밀하게 지연을 위한 두번째 미끼를 던져 놓은 것이죠. 사랑이라는 이름의 두번째 미끼는 지연을 버티는 힘이 됨과 동시에 지연이 성열을 무조건적으로 믿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열은 수년동안 이 도박을 계획했고, 지연의 등장으로 비로서 계획이 실현됩니다. 돈이 필요한 지연의 상황과 남을 잘 믿는 성격, 그리고 그녀의 외로움은 성열이 이길 수 있는 최적의 상대로 지연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성열은 도박에서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방심합니다. 아직 지연의 히든 카드가 남아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승리에 도취하여 자신의 패를 일찍 까버린 것입니다. 분명 성열은 치밀했지만 성급한 판단이 결국 그의 승리를 뒤집어 버립니다. 도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지막 도박판이 엎어지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법입니다.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가지고도 이길 수 없는 판이 있을 수 있으니...

 

 

분에 넘치는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지연은 이 위험한 도박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고 발을 뺄 수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녀가 원한 것은 사채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것만 해결한다면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며, 새출발을 모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김석구 회장의 간병인 면접에 응한 이유도, 그리고 성열의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도 모두 사채빚을 갚기 위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지연의 목적은 쉽게 이뤄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김석구 회장은 고가의 보석으로 담배를 얻기 위해 그녀를 유혹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장기에서 이기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는 김석구 회장과의 내기에서 지연은 멋진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만약 그녀가 김석구 회장에게 "내 사채빚을 갚아주세요."라고 요구했다면 김석구 회장의 경멸에 찬 표정을 보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채빚을 갚고 새출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욕심이 났습니다. 어쩌면 거액의 유산이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애초의 목표였던 사채빚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박이 무서운 점입니다. 조금 딴다고 해도 더 딸 수 있을 것 같은 욕심에 판을 키우고, 결국 모든 것을 잃고나서야 그때 멈췄다면... 이라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아마 지연도 김석구 회장의 살해 혐의로 경찰에 붙잡인 이후 수도 없이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라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은밀한 유혹]은 그다지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약 윤재구 감독이라면 영화 초반 지연의 상황을 좀 더 끝까지 밀어부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연이 김석구 회장의 유산이 아니면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절실함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다보니 결국 성열과의 사랑에 너무 기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에 대해 너무 친절했던 것도 윤재구 감독답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썼고, [시크릿]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습니다. 이 두 영화 모두 마지막 반전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했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은밀한 유혹]에서는 반전에 대한 설명이 너무 친절했습니다. 지연이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부분은 영화의 후반부 지연이 성열에게 배신을 당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고(그래서 성열이 배신하는 장면이 그다지 놀랍지 않았습니다.) 중반부부터 끊임없이 요트 안에 김석구 회장이 숨겨놓은 감시 카메라가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특히 감시 카메라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영화의 중반 너무 솔직하게 밝혀 버려서 오히려 저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반전이 너무 일찍, 그리고 쉽게 밝혀진 탓에 [은밀한 유혹]의 마지막 부분은 지연과 성열의 갑작스러운 육탄전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은밀한 유혹]이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김석구 회장의 유산이라는 거대한 판돈을 사이에 둔 지연과 성열의 도박이 흥미진진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도박판에 뛰어든 지연. 그녀가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대처가 감히 큰 도박판에 뛰어들 수 없는 소심한 제겐 대리만족을 준 셈입니다.

 

인생이 도박이라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배팅할 수 있는가?

배팅이 크면 클수록 그로인한 성공과 실패도 클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인생은 도박과는 달리 판돈을 전부 잃어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지연이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