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 마크 발레
주연 :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개봉 : 2015년 1월 22일
관람 : 2015년 4월 22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생애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인가?
[와일드]의 시작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산에 오르는 셰릴(리즈 위더스푼)의 모습입니다. 신발을 벗은 그녀의 양말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셰릴은 양말을 벗어 엄지 발톱을 뽑아 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신발이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 순간 폭발하고 마는 셰릴, 그녀는 남은 신발 한짝도 산 밑으로 던져버리며 고함을 지릅니다.
힐링 영화라는 주위의 평가로 [와일드]를 선택한 저는 영화의 첫 장면에 눈쌀을 찌푸려야 했습니다. 저와 함께 영화를 보던 구피도 "힐링 영화라며?"라는 한마디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진득하게 영화를 보다보니 왜 다른 분들이 [와일드]를 힐링 영화라며 추천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영화의 초반에는 세릴이 사서 저 고생을 왜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들기도 버거운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서 수천 킬러미터의 삶과 죽음을 넘나는 PCT 하이킹을 하는 셰릴. 너무나도 힘겨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PCT 하이킹은 셰릴의 생애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와일드]는 육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셰릴의 PCT 하이킹과 그녀의 과거 회상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는데, 셰릴의 과거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녀의 PCT 하이킹을 마음 속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가 중요할 뿐.
셰릴 스트레이드. 그녀는 가난한 삶과 폭력적인 아버지,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힘든 순간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 바비(로라 던)가 바로 셰릴이 의지했던 유일한 사람이자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비가 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 후 셰릴은 급격하게 무너집니다. 마약과 무분별한 섹스로 스스로의 인생을 망가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와일드]를 보기 전에 가장 우려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셰릴의 과거가 영화에서 자세히 다뤄질지도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와일드]는 힐링 영화가 아닌, 조금은 보기 불편한 영화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 마크 발레 감독은 셰릴의 과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과거는 그저 PCT 하이킹 중 아주 잠깐씩 스치고 지나가듯이 표현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바비의 죽음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셰릴의 과거 모습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지금 현재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PCT 하이킹을 하는 셰릴을 맘껏 응원할 수 있으니까요.
극한 공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낯선 사람이었다.
[와일드]는 셰릴의 PCT 하이킹 장면으로 영화의 첫 시작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장식합니다. 중간 중간에 셰릴의 과거 회상씬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셰릴이 왜 PCT 하이킹을 시작했는지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PCT 하이킹 중 셰릴을 괴롭히는 것들이 조금씩 바뀌어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셰릴을 괴롭히는 것은 서투름입니다. 연료를 잘못 준비해서 찬 물에 죽을 먹어야 하고, 신발이 너무 커서 발톱이 빠지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쓸데 없는 짐들을 챙기는 바람에 배낭은 셰릴이 들기에 버겁습니다. 그러나 수십일 동안 PCT 하이킹을 하며 셰릴은 이러한 서투름을 점차 극복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셰릴은 다른 하이킹족들의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투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넓은 사막 한가운데 혼자라는 두려움과 독사와 같은 맹수의 위협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바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인적이 드문 사막을 횡단하는 셰릴.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음흉하게 쳐다보는 낯선 남자들을 경계합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활을 어깨에 맨 사냥꾼과의 만남은 특별한 장치가 없이도 영화를 긴장감 넘치게 만듭니다.
최고의 모습을 찾는 여정,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기.
[와일드]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바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해 맑게 활짝 웃는 바비.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셰릴은 묻습니다.
" 왜 행복한데? 우린 가진 것도 없잖아. 우린 식당 종업원이야. 평생 대출 갚아야 하고 집이라고 있는 건 무너지기 직전이고, 엄마는 혼자야. 손찌검하는 주정뱅이랑 결혼한 덕에. 근데 노래를 불러? 그렇게 몰라?"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져 묻는 셰릴에게 바비는 이런 대답을 해줍니다.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냐. 알면 뭐? 네게 가르칠 게 딱 하나 있다면 네 최고의 모습을 찾으라는 거야. 그 모습을 찾으면 어떻게든 지켜내고... 그 주정뱅이와 결혼한 걸 후회하냐고? 아니, 한 순간도 후회 안 해. 그 덕에 네가 생겼잖아. 네 동생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잖아. 쉽진 않지만 해볼 가치는 있어. 오늘보다 훨씬 끔찍한 날들도 있을 거야. 거기에 질식해 죽는 것도 자유지. 근데.. 글쎄다. 난 살고 싶어."
그러한 바비의 대답은 [와일드]의 주제가 됩니다. 셰릴은 분명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최악의 수렁으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최고의 모습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는 것, 셰릴이 PCT 하이킹을 시작한 이유이지만, 그 끝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셰릴의 최고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지난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와일드]는 리즈 위더스푼과 로라 던을 각각 여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시켰습니다. 아쉽게도 여우주연상은 [스틸 앨리스]의 줄리안 무어가, 여우조연상은 [보이후드]의 패트리샤 아퀘트가 수상하면서 그녀들의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와일드]는 리즈 위더스푼에게도, 그리고 로라 던에게도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은 8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통해 매튜 맥커너히와 자레드 레토에게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안겨줬었습니다. 그리고 1년만에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 이어 [와일드]를 선보이며, 배우들에게 최상의 연기력을 이끌어내는데 탁월한 감독임을 다시한번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PCT 하이킹의 막바지 신들의 다리에 선 셰릴의 마지막 한마디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제 귓가를 맴돕니다. "내 인생도 모두의 인생처럼 신비롭고, 돌이킬 수 없고, 고귀한 존재다. 진정으로 가깝고, 진정 현재에 머물며, 진정으로 내 것인 인생.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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