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 엘라 콜트레인, 에단 호크, 패트리샤 아퀘트, 로렐라이 링클레이터
개봉 : 2014년 10월 23일
관람 : 2015년 3월 25일
등급 : 15세 관람가
웅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가끔 저는 아기시절의 웅이 사진을 보며 구피와 함께 "이렇게 귀엽던 아기는 도대체 어디로 간걸까?"라며 미소짓습니다.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소년티가 팍팍 나는 웅이에게서 더이상 아기시절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기시절의 웅이 모습을 비디오로 담았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웅이가 막 태어났었을 당시 저는 잦은 이직으로 수입이 불안정했습니다. 그렇기에 고가의 캠코더를 구입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웅이가 훌쩍 큰 모습을 보니 그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캠코더를 구입해서 웅이의 아기 시절 모습을 찍어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아쉬움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이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느끼지도 못할만큼 눈깜박할 사이에 성장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해버립니다. 그 순간 우리 어른들은 부모로써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뿌듯함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죠.
13년동안 웅이와 함께 했던 저는 13년이 또다시 흐르면 웅이를 독립시켜야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13년이라는 시간이 굉장히 빨리 흘렀듯이, 앞으로의 13년도 어느순간 지나가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웅이가 독립하고 구피와 단둘이 남겨진 이후를 이제부터라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리처드 링클레이터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그가 무려 12년 동안 같은 배우, 제작진들과 함께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보이후드]를 기획했을 때, 그 역시 저와 같은 부모의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보이후드]는 여섯살 소년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열여덟 소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메이슨과 함께 메이슨의 누나인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의 성장도 함께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만다를 연기한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딸입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메이슨의 성장을 쫓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로렐라이 링클레이터의 성장도 영화 속에 담아냅니다. 영화감독이라는 그의 직업에 걸맞는 딸을 위한 성장 비디오가 (부럽게도) [보이후드]의 진짜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보이후드]를 극장에서 안본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12년 동안 담아낸 한 소년의 성장이라는 기획은 흥미롭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스타일상 소년의 극적인 성장보다는 자연스러운 성장에 포커스를 맞췄을 것이며, 이는 곧바로 영화적 재미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가 만약 웅이의 성장 스토리를 비디오로 촬영을 했다면 그 비디오는 저와 구피에겐 그 어떤 영화보다 재미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지루한 홈비디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보이후드]가 개봉했을때 저는 그러한 영화적 재미의 부재를 우려한 것입니다.
솔직히 우려했던대로 재미는 없었다.
결국 [보이후드]를 극장에서 놓친 저는 지난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에 걸쳐 다운로드로 [보이후드]를 감상했습니다. [보이후드]는 제 우려대로 2시간 4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적 재미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메이슨의 평범한 성장을 담담하게 뒤쫓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보이후드]가 지루하기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엔 저를 공감시키는 요소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상업영화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영화잭 재미를 포기하고 관객과 공감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특기입니다. 그는 이미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통해 9년 간격으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사랑 변천사를 담아냈었습니다. 1995년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20대의 풋풋한 사랑을, 2004년 [비포 선셋]에서는 30대의 현실적인 사랑을, 2013년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이성적 사랑보다 부모로써의 의무에 충실한 40대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보여줬었습니다. 제시, 셀린과 함께 비슷하게 나이를 먹은 저로써는 이 두 사람의 사랑 변천사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이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섯살 메이슨. 그는 싱글맘인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의 밑에서 누나인 사만다와 함께 살아갑니다. 아버지(에단 호크)는 주말마다 메이슨, 사만다와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여기까지보면 아주 평범한 미국의 이혼 가족의 일상입니다. 그렇다면 메이슨이 성장하면서 어떤 극적 사건이 발생할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메이슨의 성장이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유
메이슨은 두 명의 의붓아버지를 만납니다. 그들 모두 처음엔 자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술주정을 부리고, 찌질하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 두 의붓아버지가 도를 넘는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두 명의 의붓아버지는 그저 메이슨의 성장 배경일뿐, 메이슨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것입니다.
메이슨은 크면서 성인잡지를 몰래 읽고, 친구의 형과 함께 술을 마시고, 첫사랑의 아픔도 겪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이후드]는 특별한 영화적 장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코 2시간 4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한 영화적 장치 없이도 2시간 45분동안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메이슨의 자연스러운 성장에 의한 놀라움 때문입니다. 영화의 초반에 하늘을 쳐다보며 올리비아에게 "말벌이 나오는 델 알아냈어요. 물을 공중에 대고 잘 겨냥해서 쏘면 그게 말벌로 변해요."라고 말하던 엉뚱한 상상력의 여섯살 소년 메이슨은 특별한 사건을 겪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사진작가를 꿈꾸는 청년이 됩니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잘 아실겁니다. 그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자녀의 성장 그 자체가 놀라운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이의 성장만큼 놀라운 어른의 늙음
[보이후드]는 지난 제87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수상은 여우조연상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보이후드]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움켜쥔 패트리샤 아퀘트. 그녀는 메이슨의 어머니로 두 자녀를 홀로 키워낸 싱글맘의 나약하면서도 억척스러운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 냈습니다.
사실 제게 패트리샤 아퀘트는 1993년 영화인 [트루 로맨스]의 매력적인 배우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보이후드]에서 패트리샤 아퀘트를 처음 봤을 때, "많이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매력적인 여성이 아닌 삶에 지친 싱글맘의 모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메이슨이 성장하듯이 영화 속의 올리비아도 변해갔습니다. 삶에 지친 싱글맘에서 좀더 나은 삶을 위해 대학에 다니는 억척맘,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두번째 남편의 술주정에 상처받는 나약한 모습에서 대학 강사가 된 당당한 모습까지...
메이슨이 성장해서 대학 기숙사로 옮기던 날 그녀는 흐느껴울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 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에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아직 웅이를 떠나보내지 않았지만, 언젠가 웅이가 제 곁을 떠나 독립을 한다면 저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저는 메이슨의 자연스러운 성장만큼, 올리비아의 자연스러운 늙음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이후드]는 자녀를 둔 부모 관객 입장에서는 공감이라는 특별함을 지닌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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