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채피] - 까만 양이 되어버린 사람들

쭈니-1 2015. 3. 14. 10:44

 

 

감독 : 닐 블롬캠프

주연 : 샬토 코플리, 데브 파텔, 휴 잭맨, 시고니 위버 

개봉 : 2015년 3월 12일

관람 : 2015년 3월 12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인공지능 로봇 영화는 어디까지 왔나?

 

또 인공지능 로봇 이야기입니다. 인공지능 로봇은 SF 영화의 오랜 소재입니다. 제 기억 속의 인공지능 로봇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는 인공지능 로봇과 인공지능 로봇 전문 경찰인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대결을 다룬 이 영화는 암울한 분위기와 충격적인 반전으로 지금까지 SF 영화팬들 사이에선 걸작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조만간 속편이 만들어진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었지만, 해리슨 포드의 갑작스러운 헬기사고로 다시금 제작이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인공지능 로봇을 소재로한 SF 영화의 걸작이라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84년작 [터미네이터]는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대결 구도를 완성한 오락 영화입니다. [터미네이터] 역시 끊임없이 속편이 제작되었고, 조만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로 국내 관객에게 그 위용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물론 인공지능 로봇 영화가 인간과 로봇의 대결 구도로만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1999년작 [바이센티니얼 맨]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1년작 [에이 아이]는 인간이 되고 싶은 인공지능 로봇의 슬픔을 그리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인공지능 로봇은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2015년은 인공지능 로봇 소재의 SF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 1월 21일 매혹적인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를 담은 [엑스 마키나]가 개봉했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 분야의 천재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이 개발한 매혹적인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인격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것인지 밝히는 테스트에 참여한 칼렙(돔놀 글리슨)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성황리에 상영되고 있는 모튼 틸덤 감독의 [이미테이션 게임]은 인공지능 분야의 선구자인 앨런 튜링(베니딕트 컴버배치)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며, 조만간 개봉할 2015년 최고의 화제작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 울트론이 '어벤져스'를 위협하는 최강의 적으로 출연한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인공지능 로봇의 위협을 다룬 SF 영화의 바이블인 [터미네이터]의 다섯번째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도 오는 7월 개봉 예정입니다.

자! 이쯤되면 최근 개봉한 [채피]는 이들 영화와 어떤 차별점을 두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디스트릭트 9], [엘리시움]으로 SF 영화의 혁신을 일으켰던 닐 블롬캠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채피]는 2016년을 배경으로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채피'(샬토 코플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로봇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 개발된다. 하지만 인공지능 로봇은?

 

[채피]의 영화적 배경은 이러합니다. 매일 300건의 범죄가 폭주하는 요하네스버그. 범죄를 막기 위해 투입된 경찰이 연달아 죽음을 당하자 요하네스버그 경찰청은 세계 최초의 로봇 경찰 스카우트 군단에게 도시의 치안을 맡깁니다. 사실 이러한 로봇 경찰이라는 소재는 새롭지 않습니다. 이미 폴 버호벤 감독의 1987년작 [로보캅]에서 했던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스카우트 군단의 개발자인 디온(데브 파텔)은 로봇 경찰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인간처럼 말하고 느낄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하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발생합니다. 로봇 경찰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범죄로 의한 시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경찰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명분이 분명했던 것이죠. 그러나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필요성이 아닌 디온의 호기심에 의해 탄생합니다.

사실 여러 영화에서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들수 있기 때문에 만든 것이다."라고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12년작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공지능 로봇인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이 찰리(로건 마샬 그린)에게 "당신들은 왜 저를 창조했습니까?"라는 질문에 찰리는 그렇게 대답했고, [엑스마키나]에서도 에이바를 왜 만들었냐는 칼렙의 질문에 네이든 또한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필요에 의한 창조가 아닌, 호기심에 의한 창조. 이것은 인공지능 로봇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지구라는 공간을 수 많은 생명체와 함께 살면서 지구를 혼자 독차지하려합니다. 곤충의 경우도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해충이라며 박멸시키려하죠. 결국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는 생명체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그러합니다. 로봇 경찰처럼 인간의 필요에 의한 존재는 인간들에게 환영을 받습니다. 하지만 '채피'처럼 굳이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고,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어쩌면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다면 그 존재는 결코 환영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공지능 로봇 '채피'에게 무조건적인 악감정을 드러내며 "너의 존재는 신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말하는 빈센트(휴 잭맨)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최근에 봤던 스페인의 SF 영화 [오토마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개발된 로봇 '필그림'. 처음 사람들은 '필그림'에게 마지막 희망을 품으며 환호합니다. 하지만 '필그림'이 지구의 사막화를 막는데 실패하자 멸시합니다. 어쩌면 '필그림'의 임무 실패는 인공지능을 가진 '필그림'이 인간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개발자가 '로봇은 스스로 또는 다른 기계를 개조할 수 없다'라는 보안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사막화보다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던 것이죠. 참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채피'가 다른 인공지능 로봇과 다른 점

 

자! 여기까지 [채피]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과 별다른 차별점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채피]의 감독의 닐 블롬캠프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디온은 회사의 CEO인 미셸(시고니 위버)에게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했다며 폐기 예정인 스카우트 22호에게 실험을 하겠다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스카우트 군단에 만족할 뿐, 인공지능 로봇에 별다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미셸은 디온의 보고를 거부합니다. 어쩌면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디온은 회사의 보안 규정을 어기고 스카우트 22호를 자신의 집에서 실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가던 중 갱단인 닌자 일당에서 납치되며 모든 것이 꼬여 버립니다.

[채피]의 의외성은 바로 이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닌자 일당에게 납치된 디온은 그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인공지능 로봇 '채피'를 만듭니다. 비록 인공지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폐기 예정인 몸체를 가진 '채피'는 베터리 방전으로 긴 시간을 살 수 없는 상황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닌자 일당은 '채피'를 로봇갱으로 만들겠다며 온갖 범죄를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말과 행동을 배웁니다. 그렇기에 아이의 환경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운동 선수를 부모로 둔 아이가 커서 부모를 따라 운동 선수가 되고, 연예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은 일찌감치 연예인 기질을 보인다던가 하는 것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의 예입니다.

그런데 '채피'는 처음부터 갱단의 손에 들어가 성장을 하게 됩니다. 디온이 아무리 '채피'에게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는 하지만 '채피'가 함께 하는 가족은 디온이 아닌 닌자 일당일 뿐입니다. '채피'가 닌자 일당과 함께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렇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채피'에게 닌자 일당은 아빠이자, 엄마이니까요.

결국 '채피'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채피'를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만든 것은 인간인 닌자 일당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하네스버그에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온 것은 빈센트의 이기심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것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망각합니다. 로봇갱이 되어 버린 '채피'를 통해 닐 블롬캠프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까만 양이 되어 버린 사람들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채피]는 영화 후반, 이기심으로 폭주해버린 빈센트가 자신이 개발한 거대 로봇 무스를 출동시켜며 클라이막스를 맞이합니다. 사실 SF 영화라고는 하지만 인공지능 로봇 '채피' 외에는 그다지 SF다운 시각적 재미를 보여주지 못하던 [채피]는 무스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시각적 재미를 쏟아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무스의 외형은 [로보캅]에서 '로보캅'과 대결을 하는 악당 로봇 ED-209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로봇을 조종하는 빈센트의 모습은 로봇 권투를 소재로한 [리 얼스틸]을 떠오르게 하고요. [로보캅]의 ED-209와 [리얼 스틸]의 로봇 파이터 '아톰'은 인간이 조종하는 로봇의 대표적인 경우임을 감안한다면 [채피]의 후반부는 인간 조종 로봇과 인공지능 로봇의 한판 대결이 됩니다. 어쩌면 휴 잭맨을 악역인 빈센트로 캐스팅한 이유 또한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둔 포섭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닐 블롬캠프 감독은 [채피]를 또다시 다른  인공지능 로봇 영화와 차별점을 둡니다. 그것은 빈센트에 의해 죽음을 당한 디온의 영혼을 다른 테스트용 스카우트 로봇에 이식을 하며 디온을 살려내는 선택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로인하여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가 확장이 되어 버립니다. 단순히 인간과 닮은 로봇의 이야기가 아닌, 로봇과 인간의 벽을 허무는 한단계 진보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디온이 '채피'에게 동화책을 한권 선물합니다. 그 동화책은 까만 양의 이야기입니다. 하얀 양들 사이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야 했던 까만 양. 하지만 까만 양이 하얗지 않다고해서 양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다를 뿐, 까만 양 또한 분명 양입니다.

디온의 의식을 로봇의 몸에 넣은 '채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까만 양이 된 것을 축하해." 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채피]의 주제가 됩니다. 갱단의 일원이자 '채피'에게 엄마이기도 했던 요란디는 '채피'에서 까만 양의 동화를 읽어주며 "육체는 껍데기일 뿐, 엄마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사랑한단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조건이 껍데기일 뿐인 육체가 아닌 그 안에 담긴 영혼이라면 로봇의 육체를 얻은 디온도, 인간과 똑같은 영혼을 가진 '채피'도 다른 인간들과는 조금 다른 인간이지 않을까요? 까만 양 또한 양인 것처럼 말입니다. 

[채피]는 오프닝에서 18개월 후, 여러 인사들의 인터뷰를 짧막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로봇의 육체를 얻은 그들의 출연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결국 [채피]는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를 인간의 진화에 한 단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채피]가 인공기능 로봇 '채피'와 그러한 '채피'를 인간을 향한 위협으로 여기는 빈센트의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서 인공지능 로봇 '채피'에 대한 이전의 인공지능 로봇 영화보다 확장된 실존적 질문에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역시 닐 블롬캠프 감독의 영화는 만만히 보면 안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고해서 결코 멸시하거나

따돌림을 해서는 안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렇다면 남들과 다른 로봇 육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은 과연 그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