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안상훈
주연 : 신하균, 장혁, 강한나, 강하늘, 손병호, 이재용
개봉 : 2015년 3월 5일
관람 : 2015년 3월 9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야망의 시대
가끔 조선 시대 왕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권력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왕의 자리를 위해 결코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들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니까요. 수양대군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던 조카 단종을 죽임으로써 조선 7대 왕(세조)의 자리에 올랐고, 조선 21대 왕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습니다.
어쩌면 가족에게조차 매정한 조선의 피의 역사는 조선의 개국초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그는 1392년 조선의 1대 왕인 태조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지만 제위 7년만인 1398년 그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이방원은 세자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살해했고, 그 결과 조선의 3대왕 태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순수의 시대]는 1398년 태조 7년을 배경으로한 사극 영화입니다. 태조(손병호)는 이방원(장혁)의 야망을 알고 그를 멀리하고, 정도전(이재용)은 사병 혁파를 통해 이방원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이 결국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은 죽음을 당하고 태조 또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듯이 물러납니다. 이렇듯 [순수의 시대]는 왕이라는 권력을 위해 형제도, 자식도, 부모도 배신해야 했던 야망의 시절을 담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죠?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본다면 영화의 제목은 '야망의 시대'가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안상훈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미셸 파이퍼, 위노라 라이더 주연의 1993년 영화와 같은 제목인 '순수의 시대'로 영화의 제목을 정합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순수의 시대]는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김민재(신하균)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설정합니다. 그런데 김민재의 캐릭터 자체가 당시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게 순수를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오랑캐에게 어머니를 잃었고, 정도전에게 거둬들여집니다. 정도전의 사위이자, 정도전의 권력을 위한 개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며 권력의 한가운데에 서지만 막상 그는 비열한 권력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순수의 시대]는 바로 왕의 자리를 두고 형제간의 우애도, 부자간의 정도 버려야 했던 비정한 야망의 시대를 배경으로 김민재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내세워 그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입니다. 과연 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안상훈 감독은 어떻게 그려냈을까요? 그러면 본격적으로 김민재의 '순수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본능을 쫓고 있었다.
[순수의 시대]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모두 넷입니다. 주인공인 김민재를 비롯하여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 이방원과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기녀 가희(강한나), 그리고 김민재의 아들이자 태조의 사위인 김진(강하늘)입니다. 그런데 이들 캐릭터는 김민재를 제외하고 각기 다른 동물적 본능에 집착합니다. 이방원은 권력에, 가희는 복수에, 김진은 쾌락, 섹스에...
가끔 TV에서 '동물의 세계'를 보다보면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일수록 권력에 의한 상하관계가 엄격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한다면 인간 역시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들에게는 권력에 대한 본능이 매우 강합니다. 이방원은 그러한 권력의 본능에 집착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나이어린 이복동생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자 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음모를 세웁니다.
이방원의 음모는 성공하면 아버지를 배신하고, 이복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역모죄로 처형을 당합니다. 그야말로 권력을 위해 목숨을 내건 셈입니다. 이방원의 형이자 태조의 넷째아들인 이방간이 1400년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의 실패로 처형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방원 역시 '제1차 왕자의 난'이 실패했을 경우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방원이 목숨을 걸고 권력을 탐했던 인물이라면 김민재의 아들인 김진은 쾌락을 탐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태조의 사위입니다. 다시말해 공주의 남편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왕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권력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권력에 대한 욕망이 거세된 그는 다른 본능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바로 쾌락이고, 섹스입니다.
섹스는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의 본능인 자손번식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만은 섹스를 자손번식이 아닌 쾌락으로 이용할줄 압니다. 김진은 왕의 사위라는 이유로 공공연한 기방 출입이 불가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비밀리에 천민 출신의 여성을 강간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쾌락에 대한 욕구를 채웁니다. 어쩌면 그것은 김진에게 안전한 쾌락 추구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천민은 가축보다도 못한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본능에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첩인 가희에 대한 욕망입니다. 가희가 아무리 천민 출신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여자인만큼 가희를 탐한다는 것은 김진에겐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전하게 쾌락을 추구했던 김진은 결국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맙니다.
목숨을 건 본능
결국 이방원과 김진은 서로 닮은 캐릭터입니다. 권력이라는 본능을 위해 목숨을 건 이방원과 쾌락이라는 본능을 위해 목숨을 건 김진. 이 둘의 차이는 이방원은 이겼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었고, 김진은 졌기 때문에 결국 목숨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방원을 승자로, 김진을 패자로 만든 결정적 원인의 한가운데에는 가희가 있습니다.
가희 역시 본능에 충실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이방원, 김진과는 달리 조금은 고차원적입니다. 그녀의 본능은 바로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자신의 본능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에서 이방원, 김진과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승자가 되면 살 수 있었던 이방원, 김진의 본능과는 달리 가희의 본능은 복수에 성공하건, 복수에 실패하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순수의 시대]에서 가장 치열하고 극적인 캐릭터입니다.
안상훈 감독은 바로 이러한 이들 앞에 김민재를 던져 놓은 것입니다. 그는 권력을 탐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가 권력을 탐했다면 태조의 신뢰와 정도전의 힘에 의해 권력을 맘껏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쾌락을 탐하지도 않습니다. 처음 가희와는 만남에서 그는 가희를 범하지 않고 그저 잠만 잡니다. 김민재... 그가 원했던 것은 단지 순수한 사랑일 뿐입니다.
[순수의 시대]는 승부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피비림내가 진동하고, 영화 속 캐릭터들은 각자의 본능을 위해 악독한 짓을 해대지만, 김민재만큼은 그 안에서 순수한 사랑을 꿈꾸며, 가희에게 오글거리는 대사와 행동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한 김민재의 행동은 영화 속의 다른 캐릭터들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마치 다른 이들은 지옥 불구덩이에서 뒹구는데 김민재, 혼자 낙원에서 희희낙낙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순수의 시대]를 재미있게 보셨다면 본능의 시대와 너무나도 대비되는 김민재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순수의 시대]를 재미없게 보셨다면 영화 속 배경, 다른 캐릭터들과 따로 노는 김민재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대신 오글거림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상훈 감독의 승부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가장 비열했던 시대에 역설적인 순수한 사랑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 순수한 사랑이 더욱 돋보이게 만들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한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 놓은 것이죠. 그러한 안상훈 감독의 승부수는 성공했을까요? 개봉 첫주 흥행성적만으로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아직은 가깝게 가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순수한 사랑이 좋았다.
그렇다면 저는 [순수한 사랑]을 어떻게 봣을까요? 어쩌면 일주일만의 영화 관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저는 김민재의 사랑이 꽤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가희에게 어린시절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머니는 지키지 못했지만 가희만큼은 지키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신하균의 공이 큽니다. 신하균은 참 독특한 매력을 지닌 배우입니다. 순수함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배우으니까요. 그의 그러한 매력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유일한 가족인 누나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유괴하는 류. 그는 영미의 '착한 유괴'라는 꾀임에 넘어가는 순진함을 보여줍니다. 유괴범에게 순진함이라니... 신하균이었기에 가능했던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지구를 지켜라]에서 강사장(백윤식)이 외계인이라 믿는 조금은 모자라 보이는 병구, [화성으로 간 사나이]에서는 한국판 어린 왕자가 되기도 했던 그였습니다. 최근작인 [빅매치]에서는 악역으로 변신했지만, 정신적으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해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천재 해커 에이스가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순수의 시대]에서 그는 멋진 근육을 뽐내고, 신인 배우 강한나와 강도 높은 섹스씬을 선보였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어린 시절 죽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내면을 보여줍니다. 신하균의 그러한 순수한 매력은 [순수의 시대]에서 너무 과하다 싶은 김민재의 순수한 사랑마저 감동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개봉 첫주부터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에 밀리며 흥행에서 고전을 하고 있는 [순수의 시대]는 관객의 평점에서도 그다지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하균의 순수한 매력에 흠뻑 빠져서 본능의 시대와는 맞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그를 응원했고,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김민재와 가희의 사랑이 해피엔딩이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천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김민재의 첩이 되지 않고서는 복수조차 꿈꿀 수 없었던 가희의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욕망도 애잔했고, 마지막까지 가희와의 순수한 사랑을 꿈꾸었던 김민재의 모습도 슬펐습니다. 어떤 분은 이 영화에서 강한나가 펼치는 강도높은 섹스씬을 기억할 것이고, 어떤 분은 너무 과하다 싶은 김민재의 오글거리는 사랑을 기억할 것이지만, 저는 본능의 시대에서 순수를 갈망한 한 남자의 비극을 기억할 것입니다.
역사는 누가 어떻게 평가하냐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이방원에 대한 평가가 피의 군주와 조선의 기틀을 완성한 왕으로 평가가 엇갈리듯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화를 누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여운이 남는 사랑 영화로, 혹은 오글거리는 신파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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