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이미테이션 게임] - 평범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쭈니-1 2015. 3. 3. 14:10

 

 

감독 : 모튼 틸덤

주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구드, 마크 스트롱

개봉 : 2015년 2월 17일

관람 : 2015년 3월 1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이 영화가 흥행할줄 몰랐다.

 

2015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이미테이션 게임]이 국내에 개봉했을 때 저는 조용히 개봉했다가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키이라 나이틀리라는 스타급 배우가 주연을 맡았지만, 이 두 배우의 티켓 파워가 국내에서는 아직 미지수이고, 무엇보다도 실화를 바탕으로하였기에 흥행성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월 한달간 극장에 가지 못했던 저는 자연스럽게 [이미테이션 게임]를 포기했습니다. 제가 다시 극장에 갈 수 있는 3월이 되면 당연히 이 영화의 극장 상영이 종영되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나중에 다운로드로 꼭 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미테이션 게임]은 개봉 첫주 40만 관객을 동원하며 주말 박스오피스 4위로 선전하더니, 개봉 2주차에는 아예 박스오피스 2위로 뛰어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러한 [이미테이션 게임]의 의외의 흥행은 3월의 제 계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3월이 되자마자 저는 영화를 볼 계획을 세웠고, 새로 개봉한 신작과 이미 개봉해서 흥행에 성공중인 구작 사이에서 어떤 영화를 골라야할지 고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백 투 더 비기닝], [포커스] 등 신작을 제치고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에 이어 [이미테이션 게임]까지 연속으로 구작을 선택했습니다.

 

그러한 제 선택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신작을 제치고 가장 먼저 선택한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를 보며 스트레스를 확실히 풀었던 저는 두번째 선택인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며 찡한 감동을 느껴야 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가 왜 청소년관람불가라는 불리한 상영등급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며 개봉 3주차에 1위를 차지했는지, [이미테이션 게임]은 흥행성이 부족한 영화처럼 보였는데 개봉 2주차에 2위 자리에 올랐는지, 영화를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고나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팬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스타트렉 다크니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 존 해리슨을 연기하며 익숙한 배우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배역이 악당이라서 매력이 덜했습니다. [호빗 :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스마우그의 무시무시한 목소리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배우로써의 매력을 느끼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그는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괴짜 천재 앨런 튜링을 정말 완벽하게 연기한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제가 다가가 안아주며 위로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매력적이었습니다. 비록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에디 레드메인에게 돌아갔지만, 제 마음 속의 남우주연상은 [이미테이션 게임]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되었습니다.

 

 

당장의 문제 해결보다는 영구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하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봤던 [이미테이션 게임]은 제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4시간마다 바뀌는 독일군의 해독불가 암호인 에니그마로 인하여 수세에 몰린 연합군은 각 분야의 천재들을 모아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비밀스러운 팀을 결성합니다.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영국군의 암호해독팀에 스스로 지원을 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사회성이 부족한 앨런 튜링은 암호해독팀의 다른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합니다. 당연히 다른 팀원들은 그러한 앨런 튜링의 행동에 불만을 품습니다. 하지만 앨런 튜링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다른 팀원들처럼 그날 그날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에니그마를 영구적으로 해독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겠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만약 제가 당시의 암호해독팀에 있었다면 암호해독팀의 팀장인 휴(매튜 구드)의 생각에 따랐을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시 되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휴의 생각이 암호해독팀 다수의 의견이니기 때문에 당연히 휴를 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앨런 튜링은 다릅니다. 그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겐 에니그마를 해독하라는 프로젝트가 주어졌고, 영구적인 에니그마 해독이라는 최상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앨런 튜링이 남과 다른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 해결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앨런 튜링은 당장의 문제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장기적으로 완벽한 문제 해결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왜냐하면 에니그마 해독은 그냥 심심풀이 게임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앨런 튜링에게 암호해독팀의 팀원인 피터(매튜 비어드)는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간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에니그마를 해독해서 단 한명의 군인이라도 살려내는 것이라고... 당연한 항변입니다. 가족이 연합군에 입대하여 독일군과 싸우고 있는 피터의 입장에서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가 우선시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앨런 튜링은 에니그마 해독 기계를 만들어서 전쟁을 끝내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 말합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에니그마 해독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산물임과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감성에 휘둘리지 않은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물입니다. 전쟁이라는 극박한 상황에서 이렇게 냉철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앨런 튜링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이미테이션 게임]은 총 세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가장 큰 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앨런 튜링이 암호해독팀에서 활동하며 에니그마 해독기계인 크리스토퍼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중간중간 학창시절,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앨런 튜링의 모습과 1951년 동성애 혐의로 구속되는 앨런 튜링을 보여줍니다. 1951년 앨런 튜링이 영화 전체의 화자입니다.

이렇게 세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지만 이들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학창시절 앨런 튜링은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혼자 외로워해야 했던 그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담아냅니다.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크리스토퍼에 대한 슬픈 사랑은 에니그마 해독기계의 이름인 크리스토퍼와 연결되며 에니그마 해독 기계에 대한 앨런 튜링의 집착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비록 영화의 화자는 1951년 앨런 튜링의 모습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앨런 튜링의 모습을 현재로 본다면 학창시절의 앨런 튜링의 모습은 과거, 1951년 앨런 튜링의 모습은 미래가 됩니다. 앨런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에니그마 해독 기계인 크리스토퍼를 만들며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그의 모습은 남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화학적 거세를 당하며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정해진 슬픈 운명인 셈입니다.

 

과거의 앨런 튜링은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를 유일하게 이해한 친구인 크리스토퍼는 영원히 그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미래의 앨런 튜링은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았으며, 원치 않은 화학적 거세와 호르몬 치료로 그를 자살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인 현재의 앨런 튜링은 행복했습니다. 앨런 튜링에겐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했던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이 있었고, 초반엔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엔 그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암호 해독팀의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전 세계 인류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앨런 튜링에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평범하지 않은 그의 특출남이 인정되는 흔치 않은 상황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겨야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앨런 튜링의 평범하지 않음은 MI6 국가요원인 스튜어트(마크 스트롱)로 인하여 용인되었고, 스튜어트의 비호아래 앨런 튜링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평범하지 않은 그는 곧바로 사회에서 척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이중성입니다. 그리고 앨런 튜링은 그러한 우리 사회의 이중성의 희생양인 셈입니다.

 

 

그는 기계인가? 인간인가?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951년, 앨런 튜링을 소련 스파이로 오인한 경찰과의 심문에서 앨런 튜링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며 "나는 기계인가요? 인간인가요?"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실제 앨런 튜링은 현대 컴퓨터의 창시자이며(애플 컴퓨터의 로고가 한입 베어문 사과인 이유는 앨런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격리된 어떤 사람과 쪽지로 대화를 하고, 격리된 그 사람은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인이 알아맞추는 게임이라고 합니다. 앨런 튜링은 이러한 '이미테이션 게임'을 기반으로 남성과 여성대신 컴퓨터와 사람을 대입시킵니다. 그것을 '튜링 테스트'라고 합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프로그래머인 칼렙(돔놀 글리슨)이 인공지능 분야의 천재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작)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가짜인지 밝히는 테스트가 바로 '튜링 테스트'의 변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앨런 튜링이 형사에게 "나는 기계인가요? 아니면 인간인가요?"라고 묻는 장면은 그렇기에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감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이성에 의한 선택을 하는 앨런 튜링의 모습은 인간이 아닌 기계에 가까웠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독일군에게 에니그마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연합군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테니까요.

 

이는 '나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앨런 튜링의 좌절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인지, 기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인공지능처럼, 앨런 튜링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어쩌면 인공지능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형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엑스 마키나]에서 에이바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지만, 기계라는 이유로 폐기될 위기를 맞이하듯이, 앨런 튜링은 분명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이류로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낸다."라는 대사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이는 앨런 튜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가 평범하지 않았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빨리 종결되었듯이, 우리가 평범하지 않다고 외면하고, 피하고, 손가락질하는 그들로 인하여 세상은 평범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좀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끝나고 호르몬 치료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앨런 튜링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가 평범하지 않았기에 세상은 변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평범하게 만들으려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평범하지 않은 앨런 튜링만 보인 것입니다. 에니그마 암호해독팀이 당장의 문제 해결에 급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앨런 튜링의 모습은 굉장히 깊은 여운을 제게 안겨줬습니다. 제가 [이미테이션 게임]을 본 후, 이 영화를 선택한 것에 만족했던 이유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앨런 튜링을 평범하게 만들으려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는 세상이 지금보다 나은 곳이 될 기회를 날려버리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