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라나 워쇼스키, 앤디 워쇼스키
주연 : 밀라 쿠니스, 채닝 테이텀, 에디 레드메인, 숀 빈
개봉 : 2015년 2월 5일
관람 : 2015년 2월 8일
등급 : 12세 관람가
11일만의 극장 나들이
지난 금요일 오전, 구피가 병원에서 퇴원을 했습니다. 이로써 월요일 오후 병원 입원날부터 시작된 제 병원 생활도 5일만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5일동안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나름 적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집에 돌아오니 내 집이 최고임을 다시한번 느낄 수가 있었답니다.
집에 돌아와 한숨 돌리고 있는데 구피가 제게 "난 괜찮으니 영화보고 와!"라고 말합니다. 비록 제가 2월 한달간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구피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마음 속에는 보고 싶은 영화들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그래!"라며 극장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습니다. 비록 퇴원은 했지만 구피의 몸상태가 좋지는 않았기에 아직은 제가 곁에 있어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일요일에 웅이와 극장에 가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웅이 또한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지난 5일 동안 외롭게 보내야 했기에 구피도, 저도 웅이에게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웅이가 좋아하는 SF영화 [주피터 어센딩]이 개봉해줘서 [빅 아이즈]를 본지 11일 만에 극장으로 향할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주피터 어센딩]만 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극장 나들이라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더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주피터 어센딩]은 제 개인적으로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주피터 어센딩]을 너무 많이 기대했었나 봅니다.
제가 [주피터 어센딩]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감독이 워쇼스키 남매이기 때문입니다. 워쇼스키 남매는 1999년 [매트릭스]라는 혁신적인 SF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입니다. 저는 아직도 [매트릭스]를 본 후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우리 인류는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전락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 현실이라는 설정은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물론 2003년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와 [매트릭스 3 : 레볼루션]을 통해 [매트릭스]의 세계관이 너무 복잡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는 제게 SF걸작 중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입니다. [매트릭스 3부작]이후 워쇼스키 남매는 [스피드 레이서]의 정지훈,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배두나를 캐스팅하며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친숙한 감독이 되었습니다. 비록 [스피드 레이서]와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좋은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주피터 어센딩]을 기대하기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매트릭스] + [클라우드 아틀라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피터 어센딩]은 워쇼스키 남매 감독에 대한 제 기대감에는 조금 못미쳤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매트릭스]로 매력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던 워쇼스키 남매가 [주피터 어센딩]에서는 새로운 세계관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피터 어센딩]을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매트릭스]와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짬뽕된 듯한 영화라는 것입니다.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을 잠시 들여다 보면... 지구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아브라삭스 가문의 소유이고, 지구인은 그들의 농작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마치 우리 인류가 논과 밭에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재배하다가 때가되면 수확을 하듯이, 아브라삭스 가문은 지구에 인류라는 씨앗을 뿌리고,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여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인류의 문명을 멸종시키며 수확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영락없이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연상시킵니다. 기계의 에너지원을 공급하기 위해 인류가 사육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매트릭스]와 영원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물약을 만들기 위해 인류가 사육되고 있다는 [주피터 어센딩]. 이 영화의 포스터에 '매트릭스의 세계가 우주로 확장된다'라는 문구는 [주피터 어센딩]을 설명하는 가장 알맞은 수식어였던 셈입니다.
워쇼스키 남매 또한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이 더이상 특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기에 환생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주피터 어센딩] 안에 삽입하였습니다. 지구에서 보잘것 없는 청소부에 불과한 주피터(밀라 쿠니스)가 아브라삭스 가문의 상속자인 세남매의 어머니이자 여왕의 환생이라는 것입니다.
지구의 원래 주인이었던 여왕이 환생하자 지구의 수확을 앞둔 아브라삭스 가문의 첫째인 발렘(에디 레드메인)은 주피터를 죽이기 위해, 지구의 소유권을 원하는 셋째인 타이터스(더글러스 부스)는 주피터를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입니다. 이렇듯 [주피터 어센딩]에서 환생은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환생이라는 키워드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워쇼스키 남매의 전작인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500년의 시공간을 걸쳐 거대한 환생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1849년에서부터 시작하여 2346년 문명이 파괴된 미래의 지구로 귀결되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비록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어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저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봤던 영화입니다. 결국 [주피터 어센딩]은 우주로 확장된 [매트릭스]의 세계관에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환생을 적당히 뒤섞은 세계관을 가진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짜 문제는 세계관에 대한 설명조의 구성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워쇼스키 남매라고해도 매번 매력적인 세계관을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가끔은 기존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만약 [주피터 어센딩]이 [매트릭스]와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세계관을 매력적으로 짬뽕했다면 저는 그것 나름대로 만족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주피터 어센딩]은 시종일관 설명조로 영화 속의 세계관을 관객에게 설명하려합니다. 주인공인 주피터가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채 아브라삭스 가문의 비열한 상속 전쟁에 말려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과도한 설명조의 스토리 전개는 오히려 영화를 유치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초반 케인(채닝 테이텀)이 주피터에게 그녀가 처한 상황을 설명할 때만해도 그런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삭스 가문의 둘째인 칼리크(튜펜스 미들턴)가, 셋째인 타이터스까지 주피터에게 틈만나면 영화 속의 세계관을 설명합니다. 그렇기에 케인의 동료인 스팅어(숀 빈)가 주피터에게 지구의 역사를 설명하려다가 기계가 망가져 하지 못하는 장면이 오히려 다행스러웠습니다. 스팅어마저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을 설명했다면 이 영화는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에 대한 교육 영화가 될 뻔했습니다.
어쩌면 워쇼스키 남매는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와 [매트릭스 3 : 에볼루션], 그리고 최근작인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복잡한 세계관이 최근 그들의 영화가 처한 흥행 부진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주피터 어센딩]에서는 영화 속의 세계관을 친절하게 설명하려 노력했을지도...
하지만 [매트릭스]와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세계관과 비슷한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은 애초부터 어려울 것이 전혀 없었기에 이 영화의 설명조의 전개가 저는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백마디 말보다는 아브라삭스 가문이 다른 행성을 수확하는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각적인 충격요법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아브라삭스 가문에게 지구는 수 많은 농장 중에서 하나에 불과한 별것 아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타이터스도, 발렘도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둡니다. 타이터스는 주피터를 납치함으로써 스스로 범죄를 올가미를 뒤집어 썼고, 발렘은 지구를 수확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다는 듯이 막무가내로 주피터에게 덤벼둡니다. 워쇼스키 남매는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시간에 차라리 아브라삭스 가문에게 지구가 왜 중요한지부터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로는 만족한다.
워낙에 [매트릭스]를 통해 매력적인 SF의 세계관을 창조해낸 워쇼스키 남매의 영화라서 [주피터 어센딩]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그로인해 아쉬움도 짙게 남았지만, 그저 가벼운 오락 영화로 [주피터 어센딩]을 관람한다면 그럭저럭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단 [주피터 어센딩]은 주피터와 케인의 러브 라인을 삽입함으로써 영화의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타이터스와의 계약으로 주피터를 찾아나선 케인이 나중엔 주피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조금 억지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면 가능하죠. 사랑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종 외계 생명체의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발렘의 수행원의 모습이 악어에 날개가 달린 듯한 모습이었는데, 저와 함께 [주피터 어센딩]을 보던 웅이가 많이 좋아했답니다. 그 외에도 대규모 액션씬도 좋았고, 긴 분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성있는 모습으로 출연한 배두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주피터 어센딩]만의 크나큰 재미입니다.
최근 보았던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스티븐 호킹을 연기하며 올해 아카데미의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떠오른 에디 레드메인의 악역도 흥미로웠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어머니의 환생인 주피터를 증오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 발렘. [주피터 어센딩]이 발렘의 캐릭터를 좀더 발전시켰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사실 [주피터 어센딩]은 환생이라는 소재로 인하여 시리즈화가 얼마든지 가능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여왕의 소유가 지구 뿐만은 아닐 것이 분명하기에 [주피터 어센딩]의 세계관으로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피터 어센딩]은 순수 제작비 1억7천6백만 달러에도 불구하고 북미 개봉 첫주 1천8백만 달러로 3위에 그쳤습니다. 그것은 2편이 만들어지긴 애당초 글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워쇼스키 남매의 흥행 성적을 보니 [매트릭스 2 : 리로디드]로 정점을 찍은 이후 매 영화마다 흥행 성적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블록버스터 영화인 [스피드 레이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흥행 실패가 뼈아픕니다. [주피터 어센딩]마저 이대로 흥행에 실패한다면 한동안 워쇼스키 남매의 블록버스터 SF영화는 만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워쇼스키 남매가 좀 더 심기일전해서 [매트릭스]를 뛰어넘는 영화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봅니다.
나는 차라리 복잡했던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더 나았다.
너무 친절하게 구구절절히 세계관을 설명하는 이 영화를 보며...
몇번의 흥행 실패후 소심해진 워쇼스키 남매를 보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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