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유하
주연 : 이민호, 김래원, 정진영, 설현, 김지수
개봉 : 2015년 1월 21일
관람 : 2015년 1월 2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
지난 수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오전부터 [엑스 마키나]를 봤습니다. 사실 그날의 주요 일정은 구피와 함께 병원에 가는 것이지만, 제 머릿속은 병원에 가기 전에 볼 영화들에 대한 계획으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엑스 마키나]가 최우선적으로 선택되어야할 영화였고, 두번째 영화는 상영관을 제대로 잡지 못한 [존 윅]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강남 1970]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강남 1970] 역시 제겐 기대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남 1970]을 후순위로 미뤄둔 것은 이 영화가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이고, [국제시장]을 이을 흥행작이기에 상영관을 많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영관을 많이 확보하지 못한 [엑스 마키나]와 [존 윅]은 휴가를 냈기에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그날이 아니면 못 볼 가능성이 높지만 [강남 1970]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영화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존 윅]을 보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강남 1970]을 선택해야 했기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약간의 실망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강남 1970]에 빠져 들었습니다. [강남 1970]은 1970년대 남서울개발계획으로 인해 욕망의 땅이 되어 버린 강남을 배경으로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의 욕망, 유혹 그리고 배신의 드라마가 2시간 15분 동안 매력적으로 펼쳐지는 영화입니다.
[강남 1970]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요즘 언론이 자주 갖다 붙이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바로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중 마지막 영화라는 것이죠.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이란 2004년에 개봉했던 [말죽거리 잔혹사], 2006년에 개봉했던 [비열한 거리]를 일컫는 것입니다. [강남 1970]은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를 잇는 영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가지 잊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하 감독의 데뷔작인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입니다. 1993년 개봉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는 당시 청춘 스타였던 홍학표를 비롯하여 최민수, 엄정화 등이 캐스팅했고, 압구정동을 무대로 영화 감독을 꿈꾸는 가난한 시인 영훈(홍학표)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욕망과 유혹, 그리고 배신의 드라마입니다.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의 테마가 욕망과 유혹, 그리고 배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는 '거리 3부작'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이렇게 '거리 3부작'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후 점점 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화의 테마는 바로 폭력입니다. '거리 3부작'의 첫번째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말죽거리 잔혹사]는 1978년을 배경으로 학교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내세우고, [비열한 거리]는 폭력을 업으로 하고 사는 조폭의 비열한 생존기입니다. 그리고 [강남 1970]의 폭력은 좀 더 확장됩니다.
남서울개발계획에 의한 욕망들
[말죽거리 잔혹사]는 군사독재 시절, 폭력이 난무했던 학교를 배경으로 이소룡을 좋아하는 순수했던 소년 현수(권상우)의 변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폭력을 양산하는 방식을 탐구한 영화입니다. [비열한 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조폭 병두(조인성)와 병두를 이용해서 영화 감독으로 성공하려는 민호(남궁민)의 엇갈린 욕망를 통해 그들의 비열한 생존기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보여줍니다.
'거리 3부작'의 마지막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강남 1970]은 강남 개발의 이권을 둘러싸고 군사독재정권과 정치인, 그리고 정치 깡패와 그들에게 휘말린 순수했던 두 청년 종대와 용기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을 뛰어 넘었고, [비열한 거리]처럼 폭력에 희생당하는 병두와 민호라는 제한된 캐릭터 설정 또한 없습니다. [강남 1970] 자체가 폭력의 역사이고, 영화 속의 모든 캐릭터들은 폭력에 의해 살아가고, 폭력에 의해 희생당합니다.
[강남 1970]이 더욱 대단한 것은 이것은 불과 몇십년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영화적 설정과 캐릭터는 허구입니다. (영화 시작전 자막을 통해 유하 감독은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지만 남서울개발계획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현실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잠시 남서울개발계획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서울개발계획은 강남지역 개발을 위해 1970년 11월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이 발표한 계획입니다. 남서울개발계획의 의도는 인구과밀화가 되어가는 서울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서울개발계획으로 인하여 강남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고 결국 이는 [강남 1970]의 모든 캐릭터들의 욕망이 됩니다.
[강남 1970]의 욕망은 돈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가 이전의 '거리 3부작'에 비해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남서울개발계획을 통해 각각이 캐릭터가 품고 있는 욕망이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넉마주이로 비루한 인생을 살던 종대는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길수(정진영)와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을 욕망하고, 종대와 친형제같은 사이인 용기는 폼나게 사는 것을 욕망합니다. 이렇게 두 주인공마저도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다른 욕망들이 끼어듭니다. 땅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돈에 대한 욕망까지...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면서 죽입니다. 그들의 얽힌 관계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모두 파국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욕망의 불구덩이에 앞다퉈 뛰어든 나방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이죠.
욕망을 이루기 위해 폭력이 필수였던 그 시절
[강남 1970]은 '거리 3부작' 영화답게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모두 폭력을 씁니다. 종대는 길수와 선혜(설현)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정치인인 서태곤(유승목)의 밑으로 들어가 조폭의 길을 걷고, 용기 또한 정치 깡패 양기택(정호빈)의 밑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폼나게 살기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엿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설정이 결코 억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1970년대 그 시절 자체가 폭력이 필수적이었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총으로 정권을 움켜준 군사독재정권이 대한민국을 장악하던 그 시절, 정치인과 조폭의 유착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뤄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힘없는 서민들만 희생을 당하는 것이죠. 영화에서 폭력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보였던 선혜마저도 남편의 폭력에 멍들고 쓰러지는 상황. 이것이 바로 1970년대 대한민국의 풍경이었습니다.
논두렁이었던 강남의 땅이 갑자기 황금 노다지가 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박한 땅의 주인들은 어느사이 자신의 땅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한 가운데 권력을 움켜쥔 정치인과 폭력을 앞세운 조폭 그리고 복부인 민마담(김지수)만이 서민의 혜택을 가로챕니다. 하지만 서민들은 그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습니다. 폭력으로 만들어진 정권에게 폭력은 당연했던 것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얽히고 설킨 복잡관 관계와 그에 따른 욕망, 유혹, 배신등을 유하 감독은 2시간 15분 동안 촘촘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유하 감독은 [강남 1970]에서 다른 '거리 3부작'과는 달리 유난히 폭력씬과 섹스씬을 과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1970년대 그 시절의 욕망과 유혹, 그리고 배신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표현해냅니다.
그렇게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고아에 넝마주이라는 같은 출신을 가진 형제와도 같은 존재였던 종대와 용기. 하지만 서로 다른 것을 욕망했기에 그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서로에게 복수를 합니다. 하지만 비열한 권력의 세계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가진 자들에 의해 배신 당하고, 버려지는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지만 [강남 1970]에 대한 여운은 깊게 남았습니다. 대부분의 조폭 영화들은 조폭의 액션에 웃음과 쾌감을 실어서 관객을 만족시키고는 합니다. 하지만 [비열한 거리]에서도 그랬듯이 [강남 1970]의 액션은 쾌감 대신 가슴 저리는 아픔만 안겨줍니다. 그것은 유하 감독이 '거리 3부작'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폭력에 의한 인간성 상실과 비극의 단면을 보여주기 떄문입니다.
유하감독은 미남을 좋아해!
[강남 1970]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민호였을까?' 사실 김래원의 캐스팅은 어느정도 어울렸습니다. 이미 김래원은 [미스터 소크라테스]와 [해바라기]를 통해 선한 얼굴에서 품어져 나오는 폭력의 강렬함을 담아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민호는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지금껏 돈많은 재벌 2세, 혹은 꽃미남 역을 연기했었습니다. 그런 그를 유하 감독은 넝마주이와 조폭의 옷을 입힌 것입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유하 감독은 항상 그런 식이었습니다. 특히 '거리 3부작'에서는 잘생긴 배우들의 순수한 얼굴을 통해 폭력의 강렬함을 대비시키는 연출을 줄곧 해왔습니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 이정진,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남궁민이 그러했습니다. 권상우의 경우는 [말죽거리 잔혹사] 덕분에 연기로 연기 못하는 배우라는 선입견을 일시에 날려버렸고, 조인성 역시 [비열한 거리]에 이은 [쌍화점]을 통해 배우 인생의 2막을 화려하게 열었었습니다.
[강남 1970]의 이민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민호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김래원이야 워낙 이러한 강렬한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 걱정이 안되었지만 이민호의 경우는 꽃미남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민호는 그러한 제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정말 멋진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이민호는 형제와도 같았던 용기에 대한 우정과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아랫목을 내준 길수에 대한 가족의 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섬세한 연기에서부터, 비열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태곤의 밑으로 들어가는 강단과 잔인한 폭력성까지... 이민호의 선한 눈매가 어느 순간 독하게 변할때 저는 유하 감독이 이민호를 선택한 이유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권상우, 조인성에 이어 유하 감독이 또다시 잘생긴 배우의 연기 변신을 도운 셈입니다.
[강남 1970]을 보고나니 화려한 빌딩숲으로 이뤄진 강남의 풍경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비록 남서울개발계획은 제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에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이 좁은 땅에서 욕망으로 파멸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강남의 빌딩숲과 겹쳐보인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강남은 욕망이 살아 꿈틀대는 땅입니다. 강남의 땅은 여전히 부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강남의 재개발 소식은 사람들의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그것은 남의 일일 뿐입니다. 종대와 용기처럼 욕망의 현장에 뛰어들 강단이 없는 저로써는 매달 꼬박 꼬박 나오는 월급으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작은 욕망만 품고 있을 뿐입니다. [강남 1970]의 화려한 욕망뒤에 오는 비극을 바라보며 저는 오늘도 제 작은 욕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욕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당한 욕망을 꿈꿔야 할 것이다.
[강남 1970]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비정한 욕망을 폭력을 통해 이루려는 자들이
결국 폭력에 의해 비극을 맞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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