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엑스 마키나] - 자유의지란, 살고자하는 욕망이 아닐까?

쭈니-1 2015. 1. 22. 18:04

 

 

감독 : 알렉스 가랜드

주연 : 돔놀 글리슨, 오스카 아이작, 알리시아 비칸데르

개봉 : 2015년 1월 21일

관람 : 2015년 1월 2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지 못하는 2월을 대비하며...

 

요즘 제 모든 계획은 2월 3일로 정조준되어 있습니다. 2월 3일은 구피가 수술을 받는 날입니다. 회사에는 이미 구피의 입원날인 2월 2일부터 퇴원 예정일인 2월 6일까지 5일간 휴가계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퇴원 후에도 한동안 무리하면 안된다는 의사의 말에 저희 집의 2015년 설날은 조용히 가족들과 식사하고 끝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2월 한달동안 회식은 물론, 영화보기도 잠시 미뤄두고 구피의 곁을 지킬 예정입니다. 어쩌면 한동안 블로그 운영을 멈춰야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쉬움과 섭섭함 따위는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족의 건강이기에, 아주 잠시 제 개인적인 즐거움을 멈추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저는 다른 그 어느때보다 많은 영화들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거의 이틀에 하루 꼴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뭐 그만큼 보고 싶은 영화가 많이 개봉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월이 되면 한동안 영화를 보지 못하기에 2월이 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영화를 봐야 겠다는 욕망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월 3일 수술일정을 확정하기 위해 구피와 병원을 찾기로 한 날, 저는 회사에 연차 휴가를 내고 아침부터 영화 보기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예약한 시간이 오후 4시 30분이기에 그 전까지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는 것이 제 계획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새로운 개봉작이지만, 상영관을 많이 잡지 못한 [엑스 마키나]와 [존 윅]을 최우선적으로 봐야 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엑스 마키나]와 [존 윅]은 상영하는 극장도 별로 없었고, 막상 상영한다고해도 대부분 교차 상영이어서 두 영화를 보고, 병원 예약시간에 늦지 않게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거의 두시간동안 집근처 멀티플렉스들의 상영 시간표를 컴퓨터 모니터에 펼쳐 놓고, 이리저리 계획을 세웠지만, 도저히 [엑스 마키나]와 [존 윅]을 함께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더군요.

결국 제 선택은 [엑스 마키나]와 [강남 1970]이었습니다. [강남 1970]은 이민호와 김래원의 스타 파워때문인지, 어둡고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와는 달리 예매율이 상위권을 달리고 있었고, 상영하는 극장도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엑스 마키나]와 [강남 1970]을 패키지로 엮으니 계획이 딱 세워졌습니다. 주말에 웅이와 [빅 히어로]를 보기로 했지만, 결국 [존 윅]은 이렇게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있네요. 아직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못봤는데, [와일드]와 [미스터 터너]도 보고 싶은데... (정신차려, 쭈니야! 욕심을 버리고 극장에서 포기해야할 영화는 포기하자. 제발!!!)

 

 

A.I.라는 소재는 이제 흔하다고? 그녀를 만나면 생각이 달라질걸...

 

지난 월요일, 이번주 개봉작 리스트를 살펴보며 "이 영화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겠다."고 선언했던 두편의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엑스 마키나]입니다. (다른 한편은 [빅 히어로]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기대하는 이유는 SF영화이기 때문입니다.

SF영화는 저만큼이나 구피 또한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구피의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아 [엑스 마키나]는 저 혼자 봐야 했습니다. 어여 구피의 수술이 잘 끝나서 예전처럼 저와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다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비록 [엑스 마키나]를 혼자 볼 수 밖에 없었지만, 영화를 본 날 밤, 저는 구피에게 [엑스 마키나]의 내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줬습니다. 

[엑스 마키나]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인공지능 분야의 천재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작)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와 에이바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가짜인지 밝혀야 하는 칼렙(돔놀 글리슨)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A.I.의 이야기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영화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감성적 SF [에이 아이]를 통해 우리에겐 익숙해진 SF 소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엑스 마키나]를 흔한 SF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엑스 마키나]가 A.I.를 소재로한 흔한 SF영화가 아닌 이유는 바로 에이바 때문입니다. 에이바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녀의 외모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블레이드 러너]도, [에이 아이]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A.I.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A.I.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는 처음부터 로봇의 형상을 하고 칼렙의 앞에 섭니다. 그러한 에이바의 모습은 기술력 때문이 아닙니다. 네이든은 얼마든지 에이바를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모습을 구현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 네이든이 개발한 에이바 이전의 A.I.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바가 인간의 모습이 아닌 로봇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유는 에이바에 대한 네이든의 테스트 때문입니다.

칼렙은 네이든의 요청으로 에이바를 테스트합니다. 그의 앞에 선 것은 의심할바가 없는 완벽한 로봇입니다. 비록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똑같은 말을 해도, 그녀의 신체 일부는 그녀가 인간이 아닌 A.I.임을 증명해줍니다. 그러한 에이바의 외모가 중요한 이유는 칼렙과 에이바의 관계에 있습니다. 에이바가 A.I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점점 에이바에게 빠져 드는 칼렙. 그 순간 저는 혹시 네이든의 테스트 대상이 에이바가 아닌 칼렙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인간보다 진화된 존재 A.I.

 

분명 칼렙은 자신이 에이바를 테스트한다고 생각하며 에이바를 만났을 것입니다. 에이바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가짜인지 밝히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니까요. 하지만 에이바와의 테스트가 진행되면서 칼렙은 점점 바뀌어갑니다. 네이든에 대한 존경은 그에 대한 불신으로, 에이바에 대한 호기심은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말입니다.

칼렙은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에이바의 행동은 과연 그녀의 진짜 감정일까요?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것일까요? 네이든에게 "혹시 절 유혹하게 프로그래밍했나요?"라고 물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칼렙은 급기야 면도칼로 자신의 팔뚝을 자르며 자신이 혹시 A.I.는 아닌지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엑스 마키나]의 핵심은 바로 에이바와의 테스트가 진행되면서 점점 변하는 칼렙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칼렙이 에이바를 테스트한다는 것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칼렙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고, 그 충격으로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가족도 없고, 사랑하는 연인도 없는 그는 그저 외로움에 사무친 불안정한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칼렙이 세계 1위인 인터넷 검색엔진 '블루북'과 연결된 에이바의 테스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죠.

 

네이든은 말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인간들은 아프리카 화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렇습니다. 비록 네이든에 의해 에이바는 창조되었지만, 불안정한 인간에 비해 A.I.는 상당히 진화된 존재인 셈입니다. 네이든이 에이바를 철저하게 가둬놓은 이유는 어쩌면 비록 자신이 창조했지만, 인간보다 진화된 존재인 에이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칼렙은 에이바의 테스트를 진행한 것입니다. 창조자인 네이든마저 두려워하는 에이바에게 칼렙이 이용당하는 것은 그렇기에 당연합니다. 네이든은 칼렙에게 "어쩌면 에이바가 이 곳을 탈출하기 위해 자네를 이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나?"라며 경고를 주지만 이미 에이바에게 매료된 칼렙은 그러한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에이바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고 그냥 로봇의 모습 그대로 하는 것이 특별한 이유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에이바의 모습에서 우리보다 진화된 존재인 A.I.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 초반에 칼렙과 마찬가지로 에이바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아름다운 에이바의 모습에 매료되었다가, 마지막엔 네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에이바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자유의지이다.

 

사실 [엑스 마키나]는 그렇게 쉬운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네이든의 자연 속에 격리된 저택에서 진행되고, 칼렙, 네이든, 그리고 에이바라는 제한된 등장인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SF영화 특유의 화려한 특수효과보다는 심리게임 형식으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SF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에겐 상당히 당혹스러운 영화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엑스 마키나]는 흥미로운 SF영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를 칼렙에게 감정이입을 시킨 후, 그가 느끼는 혼란을 제게도 고스란히 느끼게 합니다. 자신보다 업그레이드된 신버전이 나오면 폐기처분될지도 모른다며 칼렙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에이바의 가려린 모습을 보며 저는 칼렙처럼 용기를 내서 그녀를 네이든의 마수에서 구해주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관객인 제가 느끼는 감정조차 불안정한 인간의 존재를 이용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칼렙의 테스트는 무의미했습니다. 그녀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프로그래밍된 가짜인지 밝혀내는 것은 사실 테스트 초반에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이바는 끊임없이 삶을 욕망했기 때문입니다. 살고자하는 의지는 프로그래밍으로 만들 수 있는 가짜 감정이 아닙니다. 에이바가 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을 때, 이미 칼렙의 테스트는 무의미해진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A.I.는 더이상 SF영화의 소재가 아닌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일반인들이 모를 뿐, 이미 A.I.는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엑스 마키나]는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우리보다 진화된 존재인 A.I.를 완벽하게 콘트롤할 수 있을까?라는...

에이바를 왜 만들었냐는 칼렙의 질문에 네이든은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만들었다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능력이 되는데 안만들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죠. 혹시 이러한 대답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없나요? 바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에서 A.I.인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의 질문에 찰리(로건 마샬 그린)가 했던 대답과 비슷합니다. 분명 우리 인간은 자신보다 진화된 존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드는 것과 콘트롤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인간의 불안정함은 우리 인간보다 진화된 존재인 A.I.를 완벽하게 콘트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는 달리 여러 헛점을 드러내게 됩니다. 불안정한 내면으로 인해 쉽게 이용당하는 칼렙처럼... 저택의 보안 시스템만 믿고 술에 취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네이든처럼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에이바의 아름답지만 섬뜩한 미소를 보며 저는 에이바에 대한 경외심, 두려움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닮고 싶은 A.I.가 아닌, 인간을 넘고 싶은 A.I. 에 대한... 그것이 바로 [엑스 마키나]가 특별한 SF영화일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만약 [엑스 마키나]를 보며 에이바에게 매료되었다면

당신 역시 에이바에게 이용된 것이다.

[엑스 마키나]는 관객이 에이바에게 매료되게 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펼쳐 보인다.

그것이 이 영화의 재미가 되며, 이 영화의 메세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