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률
주연 : 박해일, 신민아, 윤진서, 김태훈, 신소율
개봉 : 2014년 6월 12일
관람 : 2015년 2월 3일
등급 : 15세 관람가
병원에서의 두번째 영화
사실 병원에서의 첫번째 영화인 [러시안 소설]을 보고 저는 혼란에 빠졌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영화가 아니었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 속에 담긴 메시지가 이해가 될듯, 말듯 저를 헷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다음날 선택한 영화인 [경주]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의 정보를 착실하게 검색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경주]를 본 2월 3일은 구피의 수술날이었고, 아침 8시 30분에 수술실에 들어가 12시가 되어서야 병실로 돌아온 구피를 기다리느라 처가 식구들과 함께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기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안 소설]과는 다른 조금은 가벼운 영화를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게 포털 사이트에서 소개한 [경주]의 제작 노트는 마음이 끌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 [비포 선라이즈]를 잇는 낯선 도시에서의 로맨스. 7년전 춘화를 찾아온 경주에서 펼쳐지는 가슴 두근거리는 만남!' 여기에다가 장률 감독의 첫번째 로맨틱 코미디라는 Naver의 스페셜 리포트까지 접하고나니 [경주]야말로 내가 찾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경주]에서 홍상수 감독의 향기가 느껴지더라.
[경주]는 제게 있어서 처음 만나는 장률 감독의 영화입니다. 재중 동포인 그는 [망종], [경계], [중경], [이리], [두만강] 등 굵직한 영화들을 만들어온 거장 감독입니다. 하지만 제 영화적 취향이 상업 영화에 치중되어 있는 탓에 장률 감독의 영화를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경주]도 박해일, 신민아라는 스타 캐스팅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관심을 가졌을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장률 감독의 영화는 어떻더라.'라는 선입견이 전혀 없이 [경주]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지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을 느끼게 할만큼 [경주]에게서 홍상수 감독의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초기 영화들을 몇번 본적이 있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그리고 유일하게 극장에서 본 [극장전]까지... 하지만 [극장전]이후 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제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이상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로맨스 영화이면서도 전혀 로맨틱하지가 않습니다. 영화는 느리고, 남자 주인공은 찌질합니다. 그러한 홍상수 감독의 향기를 [경주]에서 느낀 것입니다.
춘화를 찾아나선 최현... 그의 진짜 목적은?
[경주]는 친한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장례식장을 찾은 중국 북경대의 교수 최현(박해일)이 갑자기 7년전 경주에서 보았던 춘화가 보고 싶다며 충동적으로 경주에 가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경주행이 수상합니다. 과연 정말 춘화가 보고 싶어서 그 먼 경주로 발길을 옮긴 것일까요?
최현의 여정을 뒤쫓다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과거 애인이었던 여정(윤진서)에게 연락해서 경주에서 보자고 한 것부터가 그러합니다. 중국에 가정이 있는 최현이 갑작스럽게 예정에도 없던 경주로 향하고, 또 옛 애인에게 연락을 해서 경주에서 만나기로 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여행의 의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정은 최현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하다가 2시간 만에 서울로 돌아가버립니다. 그 이후 최현은 춘화가 있던 경주 찻집 아리솔의 여주인 공윤희(신민아)의 곁을 맴돌고, 그녀의 친구들 모임에 참가하는 등 예측 불허의 행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기대했던대로 윤희의 집에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정을 억누릅니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중국인 아내와의 불화를 드러냈던 최현. 어쩌면 경주에서의 그의 여정은 불행한 가정생활에 대한 일탈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경주 여행의 목적이 춘화인 것도 그렇고, 중국인 아내와 화해의 통화를 하는 영화 후반부 장면 또한 그러한 최현의 여행 의도를 짐작케합니다. 하지만 경주에서 그가 겪는 에피소드들은 그러한 단순함을 벗어납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경주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저도 경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그냥 멋모르고 경주 여행을 즐겼었습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의 정리를 하기 위해 친구와 두번째로 찾은 경주는 굉장히 스산한 곳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경주에 도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와 제 친구는 아침이 되자마자 여행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까지 했었습니다.
영화 속의 경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도시 한가운데에 거대한 무덤이 있는 곳.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애초에 최현이 경주를 찾은 것도 친한 형의 죽음 때문이었고, 과거의 애인 여정은 최현의 아기를 가졌다가 낙태한 경험이 있습니다. 윤희의 남편은 자살했고, 두번이나 우연히 최현과 스쳤던 모녀 또한 자살한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주]가 최현의 일탈 여행은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죽음의 장면은 경주라는 장소와 묘하게 어울렸습니다.
마지막 10분은 이해불가
어쩌면 여기까지는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나름 독특한 최현의 일탈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현이 윤희의 집을 나서는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제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여정의 의처증 남편이 최현을 뒤쫓고, 도망치듯 식당을 나온 후 전날 여정과 함께 만났던 점쟁이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폭주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하는 장면에서는 제 혼란스러움이 가중되었습니다. 폭주족의 죽음을 목격한 최현은 물이 말라버인 개울가를 혼자 걷고, 영화는 갑자기 7년전 아리솔에서 춘화를 발견하는 최현 일행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여주인의 모습은 3년전에 찻집을 인수받았다는 윤희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것인지...
영화를 본 후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을 한 분들의 글을 한참동안 찾아헤맸습니다. 어떤 분은 중국인이자 한국인인 장률 감독의 정체성과 자신의 영화에 대한 반성이 [경주]에 표현된 것이라 해석하셨는데... 장률 감독의 영화를 처음보는 제겐 공감하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주]에 대해서 다르게 해석할 능력이 제겐 없기에, 그저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저는 멍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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