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신연식
주연 : 강신효, 경성환, 이재혜, 이경미, 김인수
개봉 : 2013년 9월 19일
관람 : 2015년 2월 2일
등급 : 15세 관람가
병원에서의 첫번째 영화.
지난 2월 2일 월요일, 구피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수술 일자는 2월 3일. 저는 회사에 5일간 연차 휴가를 내고 구피의 병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2월 2일 입원날부터 2월 6일 퇴원날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병원에서 구피와 함께 지내려니 시간이 참 천천히 흐르더군요. 병원에서의 시간을 위해 마블 코믹스와 소설책을 몇 권 가져갔지만, 막상 병원에서는 단 한줄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제 스마트폰에서 깊이 잠들고 있던 영화들을 모조리 봤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 보겠다는 생각에 다운로드 받아 놓았지만, 결국 다른 영화들을 보느라 차일피일 관람을 미뤄왔던 영화들. 보고 싶은 영화는 많지만 극장에 갈 수도, 컴퓨터를 켤 수도 없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영화들인 셈입니다. 그 첫번째 영화가 바로 [러시안 소설]입니다.
내가 쓰지 않은 소설이 나를 전설로 만들었다?
[러시안 소설]은 2013년에 개봉한 우리나라의 저예산 영화입니다. 물론 유명한 감독이 연출한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한 배우도 나오는 영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러시안 소설]에 제가 주목한 이유는 이 영화의 독특한 줄거리 때문입니다.
[러시안 소설]은 27년간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소설가 신효(김인수)의 이야기입니다. 27년 전 젊은 신효(강신효)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소설가를 꿈꾸는 청년에 불과했지만 27년 후 깨어나보니 한국 문학계의 전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전설로 만든 소설들이 자신이 쓴 원작과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된 일일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신효가 처한 상황은 정말 미스터리합니다. 만약 누군가 신효의 소설을 훔쳐 유명 소설가가 되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이 쓴 소설을 신효가 쓴 소설인 것처럼 꾸며 신효를 유명 소설가로 만들었다는 설정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러시안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된 이유입니다.
전혀 엉뚱하게 흘러가는 전반부
하지만 [러시안 소설]은 그러한 제 궁금증을 쉽게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는 젊은 신효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하는데, 무려 1시간 30분이 흐르도록 찌질하고 매력없는 젊은 신효의 모습과 그의 주변인물들을 관찰하도록 만듭니다. 솔직히 그것은 곤욕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초반부는 마치 젊은 신효의 소설처럼 흥미롭지만 거칠고 잘 다듬어져있지 않습니다. 젊은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러하고, 영화의 스토리 전개 또한 그러합니다.
제가 기대했던 전설이된 신효에 대한 미스터리는 영화가 시작한지 1시간 50여분이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그제서야 중년의 신효는 자신이 쓴 소설과 출판된 소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누가 왜 자신의 소설에 손을 댔는지 알아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합니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이 2시간 20분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러시안 소설]의 스토리 전개는 고작 30분 정도에 불과한 셈입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의 전, 중반부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러시안 소설]은 젊은 신효의 일상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영화 후반부의 미스터리를 관객 스스로 추리하게끔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신효를 전설로 만든 용의자들... 1
자! 그렇다면 지루했던 영화 초, 중반부를 버텨내며 나름대로 추려본 영화 후반부 미스터리의 용의자들을 나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용의자는 신효의 오랜 친구인 성환(경성환)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기진의 아들이며, 뛰어난 문장력을 가졌지만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아버지가 혹평한 신효를 아버지보다 더욱 유명한 한국 문학계의 전설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두번째 용의자는 여공 출신의 젊은 소설가 경미(이경미)입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문단의 질시와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신효와도 잠시 사랑을 나눈 사이인 경미는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신효를 한국 문학계의 전설로 만듬으로써 학벌 중심의 한국 문학계를 비웃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효를 전설로 만든 용의자들... 2
세번째 용의자는 재혜입니다. 유일하게 젊은 신효의 작품을 좋아했던 재혜는 신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그를 식물인간 상태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효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깊었기에 어쩌면 그녀는 신효가 식물인간이 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신효의 작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지막 용의자는 소설가 김정석의 딸이자 천재성을 감추고 있는 어린 소녀 가림(이빛나)입니다. 그녀는 신효에게 신효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신효를 놀라게 만들었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해서 신효를 전설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실제 중년의 신효는 경미의 행방을 먼저 찾고, 가림과 만납니다. 그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재혜는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성환은 만나는 것을 마음 속으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의외의 인물에게서 이 모든 미스터리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느리고, 길고, 복잡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 영화는 식물인간이 되어 27년만에 깨어난 신효가 자신이 쓰지도 않은 소설로 인하여 전설이 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영화일까? 라는... 분명 신연식 감독의 의도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후반 30분을 위해서 전, 중반 1시간 50분을 희생한 셈입니다.
만약 후반의 미스터리가 신연식 감독의 의도라면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난 중년의 신효를 영화의 초반에 배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는 플래쉬백 형식으로 진행시킴으로써 후반부의 단서 역할에만 국한되게 만들어 놓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신효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후반부의 미스터리를 밝히는 부분은 30분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연식 감독이 하고자 하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 진짜 의도는 영화 속 가림이 했던 말처럼 '러시안 소설'처럼 느리고, 길고, 복잡합니다.
어느 미련한 낚시꾼의 이야기.
[러시안 소설]은 성경의 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옆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라는... 그리고는 곧바로 어느 미련한 낚시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낚시터에서 낚시꾼이 밤새 낚시를 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낚시꾼은 밤새 낚시를 한 물고기를 잡았다가 풀어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새 낚시꾼을 바라보던 또 다른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낚시꾼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낚시꾼은 또다른 낚시꾼에게 대답했다. 어제 잡다 놓친 그 놈을 찾느라 이 고생이라고...'
이 미련한 낚시꾼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여러번 등장합니다. 그만큼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음을 뜻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낚시꾼의 모습이 젊은 신효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인하여 현재를 포기한 어리석은 현대인에 대한 우화일까요?
그런데 전 미련한 낚시꾼의 이야기와 신효의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러시안 소설]은 제겐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결국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운 영화입니다. 가림이가 이야기했듯이 '느리고, 길고, 복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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