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상의원] - 트라우마에 갇혀 악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비극을 담아내다.

쭈니-1 2015. 1. 7. 11:49

 

 

감독 : 이원석

주연 : 한석규, 고수, 박신혜, 유연석

개봉 : 2014년 12월 24일

관람 : 2015년 1월 4일

등급 : 15세 관람가

 

 

[상의원]은 왜?

 

2014년의 마지막 영화인 [마다가스카의 펭귄]과 2015년의 첫 영화인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통해 2014년 연말 저를 감싸고 있었던 불행바이러스를 완벽하게 퇴치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서 2014년 연말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기대작인 [상의원]과 [기술자들]도 극장에서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중에서 지난 일요일에는 [상의원]을 먼저 보고 왔습니다.

[상의원]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왕실의 의복을 만들던 공간인 '상의원'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한 사극영화는 지금까지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상의원'을 무대로한 영화는 처음이었기에 사극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개봉전부터 [상의원]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주연 배우진도 제 기대감을 높여 놓았습니다.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에 함께 출연했던 한석규와 고수가 다시한번 신구 조화를 이루며 카리스마 맞대결을 펼치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상큼발랄 여배우 박신혜가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사극에 첫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게다가 [건축학개론], [제보자]의 라이징 스타 유연석이 조선의 왕을 연기한다니... 한석규와 고수의 조합이라는 낯익음과 박신혜와 유연석의 사극도전이라는 낯설음이 조화를 이룬 제 호기심을 자극하는 캐스팅을 완성해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기대감과는 별도로 국내 박스오피스 성적은 부진합니다. [상의원]은 개봉 첫주 [국제시장], [기술자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호빗 : 다섯 군대 전투]에 밀려 주말박스오피스 5위에 머물렀습니다. 개봉 2주차에는 순위가 아예 8위까지 떨어지며 별다른 반등없이 극장가에서 쓸쓸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상의원]의 순제작비가 72억 원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성적은 처참한 흥행 실패라고 할만합니다.

김우빈의 원맨쇼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절찬리에 상영중인 [기술자들]보다 [상의원]을 먼저 선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상의원]을 극장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과 매력적인 소재와 매력적인 주연 배우진을 가지고도 왜 흥행에 실패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상의원]이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묵직하고, 비장미넘치는 영화의 분위기도 좋았고, 영화 속의 캐릭터들도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후반부 비극이 너무 안일하게 처리된 부분은 아쉬웠지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습니다. [상의원]을 보고나서 한석규가 주연을 맡았던 사극영화 [음란서생]이 떠올랐지만, 초반의 코믹한 부분과 후반의 비극이 잘 조화가 되지 않았던 [음란서생]보다 개인적으로는 [상의원]이 더 좋았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비장미 넘치는 비극

 

일단 제가 [상의원]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조돌석이라는 캐릭터부터 살펴보죠. 그는 왕(유연석)의 총애를 받는 '상의원'의 어침장이지만, 신분이 천한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천한 신분으로 인하여 온갖 고초를 당했고, '상의원'에 들어와서는 의복을 만드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러한 조돌석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가 이제 6개월만 채우면 양반이 된다는 점입니다. 양반이 된다는 것은 천한 신분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떨칠 수 있는 기회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상의원' 어침장으로써의 능력을 인정받는 최고의 상과도 같습니다. 양반의 신분이 되었을 때 입을 의복을 미리 만들어 놓고, 몰래 양반 흉내를 내는 조돌석의 모습은 그렇기에 신난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천진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공진(고수)의 등장은 이 모든 것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조돌석에게 이공진의 자유분방함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상의원]이 조돌석과 이공진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전개를 선보이지 않습니다. 조돌석은 전통을 무시하는 이공진을 처음엔 무시하고 경계하지만, 결국 이공진과 우정을 쌓고 그의 능력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캐릭터가 매력적인 [상의원]의 장점이 쏟아져 나옵니다. 조돌석은 '상의원'에서 6개월을 채워 양반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그의 오랜 꿈이고, 억누룰 수 없는 욕망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실세인 영의정과 후궁인 소의(이유비)에게 잘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공진이 중전(박신혜)의 편에 섰다는 점입니다. 청나라 사신의 방문으로 인하여 중전과 소의의 권력 다툼은 의복 싸움이 되고, 이는 곧 조돌석과 이공진의 싸움으로 번집니다.

한석규의 연기력은 바로 이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입니다. 조돌석은 이공진과 우정을 쌓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조돌석으로써는 이공진의 천재성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멈출 수도 없으며, 궁에서 살아남아 양반이 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공진을 뛰어 넘어 이공진이 만든 중전의 의복보다 뛰어난 의복을 소의에게 입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됩니다.  

사실 이공진이라는 캐릭터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타고난 천재성과 낙천적인 행동이 돋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조돌석은 다릅니다. 천한 신분이라는 트라우마, 양반이 되겠다는 욕망, 그리고 이공진에 대한 우정과 질투, 이공진을 뛰어 넘어야한다는 압박감에 의한 광기까지... 베테랑 연기자 한석규는 이렇게 복잡하면서도 매력적인 조돌석을 완벽하게 연기했고, 이는 곧 [상의원]의 영화적 재미가 됩니다.

 

 

아무 것도 내 것이지 못한 왕

 

매력적인 캐릭터는 조돌석 외에도 또 있습니다. 바로 궁의 최고 권력자인 왕(유연석)입니다. 그는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가 유난히 조돌석을 신뢰하는 이유가 됩니다. 형인 선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의 트라우마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트라우마는 중전을 향합니다.

[상의원]에서 이공진에 대한 조돌석의 복잡한 심리만큼 매력적인 것은 중전을 향한 왕의 마음입니다. 사실 왕이 대군이었던 시절부터 중전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왕이 선심쓰듯 중전을 자신에게 물려준 그 순간 중전은 선왕에 대한 트라우마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전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선왕의 트라우마에 갇혀 중전에게 다가갈 수 없는 왕.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요?

[상의원]은 중전을 사랑하지만 결코 중전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왕의 이중적인 태도를 담아 냅니다. 그러한 왕의 태도는 영의정이 소의를 중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음모의 빌미를 제공해줍니다. 왕은 그러한 영의정의 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음모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중전과의 합방 또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왕의 이중적인 태도는 [상의원]의 안타까운 비극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어쩌면 [상의원]의 주요 캐릭터를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나눈다면 조돌석과 왕은 악이고, 이공진과 중전은 선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선한 이공진과 중전의 캐릭터는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고수와 박신혜라는 배우의 매력 외에는 캐릭터에 의한 특별한 매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돌석과 왕에게는 특별한 사연을 부여함으로써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상의원]의 그러한 독특한 설정은 영화의 마지막 비극을 돋보이게 만듭니다. 비록  이원석 감독이 캐릭터의 힘을 믿고 마지막 비극을 안일하게 (너무 예상가능하게) 처리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조돌석과 왕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상의원]의 비극은 인상깊었습니다.

자! 이쯤되면 [상의원]은 나무랄데없는 웰메이드 사극영화가 되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이 영화엔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자체가 어깨에 힘이 너무 잔뜩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옷으로 이야기하자면 '뽕'으로 어깨에 한껏 힘을 줬지만, 그것이 너무 과해서 옷이 어색해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원석 감독이 조금 힘을 빼고 영화의 강약조절을 했다면 어떘을까요? 분명 이공진을 남몰래 좋아하는 기생 월향(신소율), 그리고 판수를 연기한 맛깔나는 조연의 대가 마동석이 버티고 있었기에 충분히 강약조절이 가능했을텐데... 결과적으로 [상의원]은 그것에 실패했습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상의원]의 오프닝부터 그러했습니다. 마치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라도 나올 것처럼 '두둥'거리는 효과음을 극장안이 들썩이도록 처음부터 배치시켰습니다. 이는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해냈지만, 효과음과는 별도로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은 '상의원'의 풍경과 왕의 의복을 매만지는 조돌석의 모습 뿐입니다. 이러한 오프닝 장면을 보며 들었던 제 생각은 '효과음만 너무 거창한 시작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상의원]은 그런 식입니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채 멋있게 보이는 것에 치중합니다. 사실 [상의원]의 감독인 이원석 감독은 [남자사용설명서]라는 통통 튀는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영화를 보기 전 [상의원]이 너무 가볍고 코믹하게 진행하지 않을까 걱정했었습니다. 분명 영화의 코믹함은 흥행에 유리한 면이 있고, 이원석 감독은 [남자사용설명서]를 통해 그러한 재능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이원석 감독은 마치 [남자사용설명서]라는 과거의 영화를 지우려는 듯, [상의원]에서 최대한 웃음끼를 빼버립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상의원] 속에는 여러 코믹 코드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양반의 체통을 지키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이공진의 멋진 옷의 유혹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판수에서부터 시작하여, 이공진이 만든 섹시한 옷 때문에 여러 무수리들과 잠자리에 드는 왕의 모습 등등... 그런데 이원석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코믹 코드들을 외면하려 노력하는 바람에 영화 속의 코믹 코드들이 걷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의복을 만드는데 예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조돌석에게 이공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입기 편한 옷이 진짜 좋은 옷이 아니냐는... 그것은 [상의원]을 본 후 제가 이원석 감독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원석 감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상의원]에 녹여 놓고, 그 속에 조화를 찾았다면 [상의원]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뛰어넘는 웰메이드 사극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쉬움과는 별도로 [상의원]은 최소한 제겐 매력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상의원'이라는 공간을 영화화한 뚝심과 조선 옷의 아름다움을 카메리에 담겠다는 야망,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비극까지... 신분에 의한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악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조돌석과 왕의 모습은 제게 신선한 재미를 안겨줬습니다.

이원석 감독이 [상의원]을 비극을 완성하기 위해서 형식과 절차를 지키려는 듯이 자연스럽게 튀어오르는 코믹 요소들을 억지로 억누르지만 않았다면 [상의원]은 [남자사용설명서]에서 보여줬던 이원석 감독의 통통 튀는 개성과 [상의원]의 비극을 잘 조화시키는 이공진이 만든 옷과 같은 자연스러운 멋과 미가 돋보이는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재미있게 본 [상의원]이 흥행에 실패하는 안타까운 광경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에 끄적여봅니다. 

 

영화의 마지막 조돌석의 모습이 굉장히 쓸쓸했다.

트라우마에 갇혀 악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조돌석과 왕.

그들도 자신의 행위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왕은 조돌석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중전이 그렇듯이, 조돌석은 왕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의 상징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