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그렉 아라키
주연 : 쉐일린 우들리, 에바 그린, 크리스토퍼 멜로니, 실로 페르난데즈
개봉 : 2014년 12월 11일
관람 : 2014년 12월 1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이상하게 이 영화에 끌린다.
지난 12월 3일에 개봉한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과 오는 12월 17일에 개봉 예정인 [호빗 : 다섯 군대 전투] 사이에는 기대작이 없습니다. 이미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을 관람한 저는 [호빗 : 다섯 군대 전투]가 개봉할 때까지 극장에 가지 않고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12월 둘째주에 개봉하는 영화들을 조금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며칠전만해도 저는 [버진 스노우]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는줄조차 몰랐습니다. 하지만 12월 둘째주에 개봉하는 영화들의 스토리 라인, 스틸 사진, 예고편을 꼼꼼히 살펴보는 와중에 제 눈에 확 들어온 영화가 바로 [버진 스노우]입니다.
일단 [버진 스노우]가 제 시선을 잡아 끈 이유는 쉐일린 우들리와 에바 그린이라는 매력적인 캐스팅 때문입니다. [디센던트]에서 조지 클루니의 반항적인 큰 딸로 출연하여 스타덤에 올랐고, [다이버전트], [안녕, 헤이즐]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의 라이징 스타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쉐일린 우들리. [몽상가들]로 데뷔한 이래 [다크 섀도우], [300 : 제국의 부활], [씬 시티 : 다크히어로의 부활] 등에서 섹시한 악녀를 완벽하게 연기했던 에바 그린. 이 두 개성넘치는 여배우가 모녀 관계로 출연한다니... 제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는 조합이었습니다.
게다가 [버진 스노우]의 스토리 라인과 예고편도 이 영화를 보고 싶게끔 만들었습니다. [버진 스노우]는 이제 막 여자로써 눈을 뜨기 시작한 소녀 캣(쉐일린 우들리)에게 어느날 어머니인 이브(에바 그린)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을 본다면 [버진 스노우]는 당연히 이브의 실종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그려질 것 같았습니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나선 캣. 그 속에서 이브를 둘러싼 비밀과 이브의 실종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평범한 스릴러 영화의 외피를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의 예고편에는 이브의 실종 사건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진 스노우]의 예고편 중에서 가장 제 호기심을 자극시켰던 것은 "엄마가 보고 싶나요?"라는 상담의사의 물음에 "아뇨, 딱히요."라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캣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실종되었지만 궁금하지도, 슬프지도 않다는 캣. 과연 이 모녀에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리고 이브는 정말 딸을 버려두고 떠난 것일까요? 정작 캣은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저는 미치도록 궁금했습니다.
캣의 회상 속의 이브는 나쁜 엄마일 뿐이다.
평일 극장. 저를 포함해서 딱 세명의 관객이 [버진 스노우]를 관람했습니다. 그 중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세명의 관객 모두 혼자 영화를 보러 왔다는 사실이고, 저를 제외하고는 두명의 관객은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한산한 극장 분위기 덕분에 [버진 스노우]를 더욱 몰입하며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버진 스노우]는 처음부터 캣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어머니의 실종 사건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게된 캣. 그녀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의사에게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캣의 태도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이뻐하던 어머니의 모습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 저는 어머니의 애완동물이었어요."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이웃집 남자아이인 필(실로 페르난데즈)과 사귄 후에는 어머니가 히스테릭하게 변했다며 증오섞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와는 달리 아버지인 브록(크리스토퍼 멜로니)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말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회사에 갔다가 회사 동료들이 아버지를 모두 좋아하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캣. 그러한 그녀의 회상에는 '밖에서는 멋진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는 찌질하게 행동한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실제 캣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밀 서랍 속에서 외설적인 잡지를 발견했을 때에도 집 안에 몰래 도색 잡지를 숨겨 놓은 아버지를 탓하기 보다는, 부부 관계를 제대로 해주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히스테리나 부리며 아버지를 깔아뭉개버리는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자위 행위를 해야만 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캣의 이러한 과거 회상은 자연스럽게 이브는 가족을 버리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못된 어머니로, 브록은 집나간 아내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는 순진하고 착한 아버지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캣에 의한 이브에 대한 선입견은 영화 초, 중반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브는 캣의 이야기대로 나쁜 어머니일 뿐이었을까요?
자신을 새끼 고양이 취급을 했다는 어린 시절 캣의 회상은 다르게 보면 어린 캣을 예뻐하는 이브의 모성애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웅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 똥강아지'라고 불렀으니까요. 사춘기가 되어 이성에 눈을 뜬 캣에게 과잉반응하는 이브의 모습은 히스테릭한 어머니가 아닌, 캣을 진심으로 걱정하지만 그 표현 방법이 서툰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캣의 부정적인 시선이 이브를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어머니로 만든 것입니다.
브록은 정말 착한 남편이었을까?
이브와는 달리 브록은 답답하고 순진하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착한 아버지로 캣에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캣의 추억 속에서 어린 시절 브록의 회사에 함께 간 것을 제외하고는 브록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이브에게 "오늘 저녁은 뭐야?"하고 묻는 모습 뿐입니다.
그러한 브록의 모습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캣의 기억 속에서는 다정하게 "오늘 저녁은 뭐야?"라고 묻는 아버지와 그러한 아버지에게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히스테릭한 어머니로 그려졌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상황은 180도로 달라집니다. 젊고 아름다운 이브. 그녀는 어느순간부터 하루종일 집에서 청소와 식사 준비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브 입장에서는 집에 돌아오면 '저녁식사는 무엇을 준비했나?'부터 찾는 브록이 야속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캣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이브의 모습은 그렇기에 더욱 애잔합니다. 하지만 캣은 "그만 쳐다봐. 소름끼쳐!"라며 문을 닫아버립니다. [버진 스노우]가 어머니에게 반항적인 캣의 시선으로 그려진 탓에 이브는 히스테릭하고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그녀는 존재감 없이 가사일에 함몰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에 빠진 보통의 주부일 뿐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캣과 멀어지며 소외감을 느낀 그녀는 "왜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거야?"라며 울부짖습니다. 그것이 이브에 대한 캣의 반항심을 걷고나면 비로서 볼 수 있는 이브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버진 스노우]는 캣의 시선으로 이브의 실종 사건을 그립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캣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실종 사건은 암묵적으로 이브가 가족의 곁을 떠난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영화의 메인 테마라고 생각했던 이브의 실종이 초반에 결말지어 버리고, 영화는 이후 캣의 여자로써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렇다면 [버진 스노우]는 이브의 실종 사건이라는 스토리 라인을 미끼로 깔아놓은 캣의 성장담 이야기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캣의 성장담은 이브의 실종 사건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사춘기 시절 캣은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 떄문에 어머니의 실종 사건의 진실을 똑바로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성장하면서 그녀도 서서히 어머니의 실종 사건에 대한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사실 진실은 그녀의 눈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버진 스노우]가 1988년에서 시작해서 1991년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 1988년 캣은 성에 관심이 많은 열일곱 사춘기 소녀였지만, 3년이 지난 1991년에는 한층 성숙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캣. 그녀는 이제 3년전에는 궁금해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실종 사건에 대한 진실을 똑바로 쳐다볼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진실은 이미 그녀의 눈 앞에 있었다. (스포 포함)
[버진 스노우]의 놀라운 점은 바로 이러한 독특한 전개입니다. 영화의 초, 중반까지 [버진 스노우]는 철저하게 캣의 시선 안에 관객을 가둡니다. 그럼으로써 어머니의 실종 사건에 대한 캣의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난 이브'라는 결론을 관객에게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듭니다. 그리고는 중반까지 이브의 실종 사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캣의 성장담만을 잡아냅니다.
그런데 후반부가 되어 3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더니 그제서야 이브의 실종 사건을 '툭'하고 꺼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뜬금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미 [버진 스노우]는 캣의 꿈을 통해 이브의 실종 사건에 대한 단서를 관객 앞에 던져 놓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사소하게 지나갈만한 설정들이 이브의 실종 사건의 진실이라는 후반부에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하얀 눈밭에서 "나를 꺼내줘."라고 애원하는 이브에 대한 캣의 꿈. 그런데 영화 중반에 코드가 빠져서 시체 썪은 냄새를 진동하는 지하실의 냉동고 장면이 나옵니다. 하얀 눈밭과 냉동고. 그리고 브록의 범행을 의심하지만, 도대체 시체를 어디에 숨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담당 형사의 한마디. 결정적으로 자물쇠로 굳게 닫혀진 지하 냉동고를 발견했을 때에 저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캣이 자물쇠를 풀고 냉동고를 여는 장면은 극한의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어린 캣이 아버지의 비밀 서랍의 자물쇠 비밀 번호를 알아내서 도색 잡지를 찾는 장면은 성인이 된 캣이 냉동고의 자물쇠를 여는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영화에서도 이 두 장면은 교차 편집되어 있습니다. 이는 [버진 스노우]가 초반부터 치밀하게 마지막 반전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입니다.
단서는 이 외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브의 실종 사건 이후 의식적으로 캣과의 섹스를 피했던 필. 섹스를 하고 싶다며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캣에게 "너희 아버지에게 섹스하다 또 들키긴 싫어."라며 필은 애써 캣의 섹스 요구를 거부합니다. 왕성한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필은 캣의 섹스 요구를 거부한 것일까요? 마지막 반전에 이 모든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영화에서 캣의 두 절친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실 스토리 전개상 그들은 그저 캣의 친구 이상의 의미는 없어보이지만, 필요이상으로 너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절친 중의 한명은 게이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반전을 위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입니다. 캣의 게이 친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마지막 반전에 대한 보충 설명이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결국 [버진 스노우]는 스릴러 영화로써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셈입니다.
분명 [버진 스노우]는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는 아닙니다.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딸과 어머니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춘기 소녀 캣이 여자로써 성장하는 과정, 그 가운데 이브의 실종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풀어놓는 [버진 스노우]는 이 영화에 대한 제 호기심를 완벽하게 채워준 영화였습니다.
이브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점차 사라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브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만 남은채...
그런 의미에서 [버진 스노우]는 뛰어난 스릴러임과 동시에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여성 영화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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