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주연 : 매튜 맥커너히, 앤 해서웨이, 마이클 케인, 제시카 차스테인, 케이시 애플렉, 맷 데이먼
개봉 : 2014년 11월 6일
관람 : 2014년 11월 11일
등급 : 12세 관람가
내 가족에게 [인터스텔라]는 관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극장가의 비수기라는 11월에 개봉하는 영화 중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손꼽히는 [인터스텔라]. 당연히 저와 SF영화를 좋아하는 구피는 [인터스텔라]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변수가 생겼습니다. 지난 생일 선물로 천체 망원경을 선물받은 웅이가 [인터스텔라]를 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웅이와 [인터스텔라]를 함께 보기 위해 주말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변수가 생겼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이모님과 누나, 여동생 부부를 동반하고 일요일에 저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통보를 하신 것입니다. 시댁 식구들의 방문으로 바빠진 구피. 저는 "어머니는 일요일에 오시니, 토요일에 [인터스텔라]를 보러 가자."라고 이야기했다가 예민해진 구피에게 "제 정신이야?"라며 혼만 났습니다. 결국 [인터스텔라]의 관람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다시 미뤄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스텔라]는 호락호락하게 저희 가족의 관람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집으로 가신 시간은 일요일 오후 4시30분. 그제서야 저희 가족에겐 [인터스텔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언제 집으로 가실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미리 영화를 예매하지 못했고, 어머니가 집에 가신 후 [인터스텔라]를 예매하기 위해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지만, '매진'이라는 충격적인 단어만 확인해야 했습니다. 비수기이기에 당연히 표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제 판단착오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인터스텔라]의 관람은 다음주 주말로 미뤄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인터스텔라]는 개봉 첫 주말에 166만이라는 비수기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어메이징한 흥행 성적을 올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는 상황에서 저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번 주말에도 [인터스텔라]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저희 회사에서 재고조사를 합니다. 토요일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재고조사를 해야하는 만큼 [인터스텔라]를 볼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재고조사는 신제품 입고가 많아서 일요일까지 해야합니다. 재고조사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일요일에 [인터스텔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인터스텔라]의 관람을 그 다음주로 미뤄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주는 무박2일로 여수 갈치 낚시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말에 시간이 안된다면 평일 밤에라도 [인터스텔라]를 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평일 밤에 [인터스텔라]를 본다는 것은 웅이와 함께 영화를 볼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웅이와 영화를 보기 위해 주말까지 기다렸다간 [인터스텔라]의 관람을 자꾸 뒤로 밀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저로써는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화요일 밤, 저와 구피가 [인터스텔라]를 보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된 웅이는 삐쳐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 시간이 되면 웅이와 함께 [인터스텔라]를 한번 더 관람해야 겠습니다.
거짓된 희망이 아닌 진짜 희망을 위해서...
이렇게 웅이를 배신하면서까지 서둘러 봐야만 했던 [인터스텔라]는 과연 기대했던 것만큼 경이로운 영화였습니다. 거의 3시간에 육박하는 긴 러닝타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웜홀, 블랙홀 등 어려운 과학이론과 딸에 대한 쿠퍼(매튜 맥커너히)의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스토리도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던 영화입니다.
사실 [인터스텔라]는 평범한 SF적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대규모 황사로 인하여 지구는 더이상 농작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농작물을 경작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전 세계적인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세계 각국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설정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것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입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들의 폭력을 보여주며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고, 인간의 무자비한 본능을 통해 영화적 메시지를 완성하려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비록 평범한 SF적 설정으로 [인터스텔라]를 시작했지만, 그러나 뻔한 전개로 영화를 이끌어가지는 않습니다. [인터스텔라]의 미래는 지구가 황사로 인한 삭막한 곳이 되어 버렸을 뿐,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질서를 유지한다고 해서 그들의 오늘이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농작물이 죽어가고, 먹어야할 식량이 점점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그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내년에는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희망 뿐입니다.
한때 NASA 소속의 우주 비행사였지만, NASA 해체이후 이제는 평범한 농부에 불과한 쿠퍼는 내일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거짓된 희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년에는 괜찮겠지."라며 스스로에게 거짓된 희망을 각인시킬 뿐입니다. 그것이 그가 어린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인간에겐 1차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먹고, 자고, 입는 것. 이러한 1차적 욕구가 총족되어야만 아름다움의 추구, 미지의 탐험 등과 같은 고차원적인 욕구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스텔라]의 사람들에게는 먹는 것이라는 1차원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온통 먹는 것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직업이 농부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 우주 탐험은 그저 배부른 헛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머피(맥켄지 포이)의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우주 탐험과 같은 허황된 꿈을 꾸지 않게 하기 위해 과거의 달 착륙은 조작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쿠퍼는 정부가 비밀리에 시행하고 있는 우주 탐험 계획인 나사로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나사로 프로젝트란, 토성에 만들어진 정체 불명의 웜홀을 통해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찾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미 12명의 우주비행사가 후보 행성에 도착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보내준 데이터를 통해 최종적인 후보 행성 세곳이 선정되었고, 쿠퍼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아멜리아(앤 해서웨이), 러밀리 등과 함께 우주로 향합니다. (이후 스포 포함되어 있습니다.)
플랜 A와 플랜 B
[인터스텔라]는 영화의 초반을 황사로 인하여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 지구의 상황과 그러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 그리고 머피에 대한 쿠퍼의 부성애로 꾸며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영화의 초반은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인터스텔라]의 초반이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미래의 지구에서 SF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의 초반은 [인터스텔라]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터스텔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바로 머피에 대한 쿠퍼의 부성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쿠퍼의 부성애는 역설적이게도 나사로 프로젝트를 위해 머피를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지금 당장의 머피를 위해서라면 쿠퍼가 지구에 남아 머피를 지켜줘야 합니다. 그러나 쿠퍼는 현재보다는 머피의 미래를 생각한 것입니다. "내년에는 괜찮겠지."라는 거짓된 희망으로 버티기엔 지구에서의 미래가 얼마남지 않은 것을 쿠퍼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쿠퍼가 나사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머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머피에게 행복하고 안전한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 머피를 떠나 머나먼 우주로 나갈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한 쿠퍼의 결심은 브랜드(마이클 케인) 박사가 제시한 플랜 A와 플랜 B에서 잘 드러납니다. 플랜 A는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식민지 행성을 개척하는 계획입니다. 플랜 B는 수정란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으로 보내 새로운 인류를 만드는 계획입니다. 당연히 플랜 A가 이상적이지만 플랜 A를 실행하기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변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쿠퍼는 머피에게 새로운 행성에서의 새로운 삶을 선사할 수 있는 플랜 A에 희망을 걸고 나사로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만약 브랜드 박사에게 플랜 B만 있다면 쿠퍼는 나사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플랜 B가 더욱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쿠퍼는 그깟 인간 종족의 보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항상 머피에게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주겠다는 아버지로써의 부성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첫번째 행성에서 아멜리아의 과욕으로 지구에서의 몇십년을 잃은 쿠퍼는 화를 냅니다. 아멜리아에게는 첫번째 행성의 데이터가 중요했지만, 쿠퍼에겐 그깟 데이터보다는 더 늦기 전에 머피에게 진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쿠퍼에게는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찾더라도 머피가 죽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죠.
어쩌면 그러한 쿠퍼의 행동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아멜리아는 쿠퍼에게 집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만 생각한다며 비난을 퍼붓고, 두번째 행성에서 만난 닥터 만(맷 데이먼)은 "인간은 자신과 가족 외의 타인에겐 무서울 정도로 관심이 없다."며 비꼽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어쩌면 인류가 지금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내 자식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안겨주고 싶은 욕심이 우리 인류를 발전시켰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간 종족의 보존이라는 대승적인 목표를 지닌 닥터 만과 지독한 황사로 인하여 죽을 위험에 처했지만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는 톰(케이시 애플렉)을 교차해서 보여줍니다. 플랜 B를 위해서 쿠퍼 일행을 죽이려는 닥터 만의 광기와 거짓된 희망으로 눈과 귀를 막아버린 톰의 무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닥터 만과 톰이 결국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인터스텔라]는 이처럼 머피를 위한 쿠퍼의 부성애가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는 영화입니다. 첫번째 행성에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지구에서의 몇십년을 잃은 쿠퍼. 성인이 된 머피(제시카 차스테인)의 원망에찬 메시지와 마주하게 되는 쿠퍼의 절망적인 모습은 그렇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쿠퍼는 지구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성인이 된 머피는 더이상 쿠퍼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으니까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셈입니다. 그것이 바로 쿠퍼가 스스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이유입니다. 쿠퍼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블랙홀에서 플랜 A를 위한 우주 공간의 변수 데이터를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쿠퍼가 머피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인 셈입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블랙홀 장면은 그렇기에 압도적입니다. 머피를 향한 쿠퍼의 사랑은 블랙홀에 의한 시간의 왜곡으로 변환되고, 결국 그는 어린 시절의 머피와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 초반 어린 머피가 쿠퍼에게 이야기한 유령의 존재가 바로 쿠퍼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간여행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구조인데, [인터스텔라]는 블랙홀을 이용하여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경이로운 장면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인터스텔라]는 웜홀이론, 블랙홀, 시간 여행 등 복잡한 과학 이론들이 총 망라해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과학 이론들을 완벽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영화 속의 과학 이론들은 쿠퍼의 부성애라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설명이 필요없는 간단한 감성의 보조 역할을 수행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쿠퍼의 부성애만 이해한다면 [인터스텔라]를 즐기고 감동을 느끼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인터스텔라]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딜런 토마스의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시를 자주 인용합니다. 이 시의 내용은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고, 빛이 꺼져감을 분노하라."라고 노래합니다. 영화에서 자주 인용되는 만큼 이 시가 갖는 의미는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황사로 인하여 지구가 황폐해지자 사람들은 순순히 그러한 지구에 적응하며 살아가려합니다. 하지만 쿠퍼는 말합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빛을 찾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이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 순간, 모든 희망은 끝이 납니다. 쿠퍼는 머피에게 빛을 안겨주기 위해 우주로 나갔습니다. 물이 가득한 행성의 거대한 파도와 맞서고, 얼음으로 가득 덮힌 행성에서 닥터 만의 광기에 위기를 겪어도 그는 빛이 꺼져감을 분노했고,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냅니다.
이미 늙어 죽을 날을 기다리는 머피(엘렌 버스틴)는, 블랙홀로 인하여 나이가 120살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40대의 육체를 가진 쿠퍼에게 자신에게 머물지 말고 아멜리아에게 떠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머피에게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용기와 희망을 안겨준 쿠퍼의 부모로써의 의무는 이제 끝이 납니다. 쿠퍼가 머피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듯이, 이제 머피 또한 남은 인생을 자신의 자손들과 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머피를 향한 부성애로 수 많은 난관을 해쳐왔던 쿠퍼. 그가 부성애라는 신성한 의무를 끝내고 아멜리아가 기다리는 세번째 행성을 향해 떠나는 장면은 같은 아버지로써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쿠퍼는 머피를 위해 어두운 밤과 맞섰고, 이제 아멜리아를 위해 남은 여정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룩해놓은 인간의 아름다운 우주 대서사시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두운 밤과 맞서 싸운다.
희망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않는한,
어두운 밤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써, 한 여자의 남편으로써,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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