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카트] - 낙숫물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그날까지...

쭈니-1 2014. 11. 19. 16:49

 

 

감독 : 부지영

주연 : 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김강우, 황정민, 천우희, 도경수

개봉 : 2014년 11월 13일

관람 : 2014년 11월 18일

등급 : 12세 관람가

 

 

IMF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아물지 않는 상처

 

1992년, 제가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당시의 최고 직장은 은행이었습니다. 은행은 상업계 고등학교 졸업자가 갈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직장임과 동시에 증권회사와 더불어 가장 높은 급여를 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성적만으로는 은행 입사가 충분했지만, 남자이면서도 45kg밖에 나가지 않는 마른 몸매 탓에 번번히 "그렇게 말라서 직장 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라는 면접관의 면박을 받으며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1년 공부해서 전문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98년 나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졸업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제가 졸업하기 직전에 IMF가 터졌고, 또다시 취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히 IMF의 한파를 버텨내던 어느날 은행에서 창구 업무를 보는 대학 여후배를 만났습니다. 창구 업무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제게 그녀와의 만남은 굉장히 뜻밖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은행 =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공식이 오랜 세월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저는 더이상 그러한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IMF로 취업을 하지 못하다가 은행의 비정규직으로 겨우 취직한 그녀는 비정규직이라는 자신의 처지가 창피했는지 은행을 찾은 저를 애써 모르는척 했습니다. 그리고 1년후 그녀는 계약이 완료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관뒀는지, 더이상 은행 창구에 없었습니다.

 

IMF는 우리 국민에게 참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빚을 이기지 못해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치솟는 은행 이자 때문에 날마다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시던 저희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취업을 하지 못한 저는 그렇게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을 도와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IMF의 가장 큰 상처는 이후 급격히 악화된 노동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IMF로 인하여 위기를 맞이한 기업들은 수 많은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했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를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를 대폭 늘렸었습니다. 처음엔 크게 반발했던 노동자들도 우선 경제를 살리고 보자는 대승적인 차원으로 희생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IMF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경제가 활성화되었어도 비정규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좋아지만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노동자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이 되어 열악한 노동환경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민들은 참 순진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기업을 살리고, 기업이 살고나면 노동자들과 함께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나눌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익을 목표로한 기업이 수익을 노동자들과 나눌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안일한 생각입니다.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로 인한 수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기업은 IMF 위기를 극복하고나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우리 서민들은 여전히 IMF가 남기고간 성처를 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7년 6월 30일 이랜드 홈에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모티브로한 [카트]가 지난 주에 개봉했습니다. 이랜드 홈에버 사태는 이랜드 그룹이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 근로자 700여명을 해고하면서 벌어진 파업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에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6월 30일 상암동에 위치한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무려 512일 동안 파업이 계속되었으며, 해고자 28명 중에서 12명의 노조간부가 퇴사하고 16명이 복직하는 조건으로 2008년 11월 13일에서야 파업이 종결되었습니다. [카트]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 직전에 나온 '노조간부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 절반의 성공이었다.'라는 자막은 그러한 협상 결과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랜드 홈에버는 그러한 무리수를 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 근로자로 전환하면 비용이 증가하고,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랜드 홈에버의 경영진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외주용역으로 돌려서 비용을 절감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고용 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은 그만큼 근로자에게 돌아가야할 노동의 댓가가 줄어듬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랜드 홈에버 경영진은 근로자가 받아야할 마땅한 노동의 댓가를 갈취하려 한 셈입니다.

 

사실 비정규직 보호법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 처한 비정규직 근로자를 위한 법이었습니다. 2년간 한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만들어 IMF이후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려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랜드 홈에버를 비롯한 여러 회사들은 이 법의 헛점을 이용했고,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2년이 되기 전에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해고함으로써 오히려 서민의 고용 불안을 심화시켰습니다.

[카트]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 영화입니다. 이미 시사회를 통해 '잘 만든 영화'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많은 분들이 '의미있는 영화'라며 보기를 추천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비록 [인터스텔라]의 흥행 광풍이 묻히긴 했지만 개봉 첫주 주말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며 흥행에서도 나름 선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카트]를 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저는 즐겁기 위해서 영화를 봅니다. 하지만 [카트]는 즐거운 영화라기 보다는 아픈 영화입니다. 그렇지않아도 몸도 마음도 힘든 요즘, 아픈 영화인 [카트]를 본다는 것은 선뜻 선택하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이 시대의 아픔을 담은 영화라서 쉽게 외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 저는 중소기업의 정규직 직원이지만, 나이가 들어서 지금의 회사를 퇴직하게되면 비정규직 직원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카트]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픈 영화인 [카트]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한 이유입니다.

 

 

세심한 캐릭터의 배려가 돋보인다.

 

일단 기본적으로 저는 [카트]가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또 하나의 약속]의 경우는 의미있는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카트]는 캐릭터 구성, 스토리 전재 등의 짜임새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우선 캐릭터만 봐도 그렇습니다. [카트]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선희(염정아)와 혜미(문정희)입니다. 그런데 이 두 캐릭터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선희는 '더 마트'에서 일하면서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웃으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합니다. '더 마트'의 관리자인 최과장(이승준)으로부터 언제나 칭찬을 듣고, 조만간 정규직 전환도 약속받은 상태입니다. 그와는 달리 혜미(문정희)는 조금은 부정적인 사원입니다. 얼굴엔 불평이 가득하고, 최과장이 추가 근무를 요구해도 단번에 거절해버립니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좋게 볼 수 없는 직원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의기투합합니다. 처음엔 회사 관리자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선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혜미도 점차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엽니다. 선희 역시 혜미가 이전 회사에서 당했던 일들을 들은 이후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혜미를 감싸 안습니다. 어린 아들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혜미에게 "우리 꼭 예전처럼 즐겁게 일하자."라고 다독거리는 선희의 모습은 그렇기에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카트]는 '더 마트'에서 일하는 여러 캐릭터를 내세웁니다. 그러면서 선희와 혜미로 중심을 잡고, 서로 성격이 다른 그들의 캐릭터로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의 화합으로 감동을 이끌어냅니다.

 

[카트]에는 선희와 혜미 외에도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나이가 많은 청소원  순례(김영애), 순박한 옥순(황정민), 그리고 젊고 까칠하지만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미진(천우희)과 정규직이면서도 비정규직 근로자들과 파업을 함께 하는 동준(김강우)까지... 이들 캐릭터들은 너무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덜하지도 않은채, 딱 적당한 분량으로 영화를 가득 채웁니다.

이들이 '더 마트'의 매장을 점거하고, 매장에서 생활하며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은 영화에서 유일한 밝은 분위기임과 동시에  '오늘 우리는 해고되었다. 그리고 하나가 되었다.'라는 영화 포스터의 광고 카피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일한 정당한 댓가를 받고, 그 댓가로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인데...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못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더 가지려는 이들로 인하여 그 평범한 꿈이 무너진 것이죠. [카트]는 그러한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개성있는 캐릭터를 통해 완벽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특히 저는 강동준 대리라는 캐릭터가 신의 한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규직입니다. 그렇기에 함께 일하던 비정규직 근로자의 파업을 안쓰럽게 바라보지만 직접적으로 관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태가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고 나서 노동조합의 대표를 맡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에 비정규직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우리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바로 우리들의 문제가 된다면 모든 것이 달리질 것입니다. 이렇듯 동준은 [카트]와 비정규직 문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캐릭터인 것입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그날까지...

 

제가 [카트]의 완성도를 높이 사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영화의 스토리 전개가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카트]가 그저 부당하게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만을 주 내용으로 한다면 다큐멘터리 영화로 적합할 뿐, 상업 영화로써의 영화적 재미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카트]는 선희의 반항적인 사춘기 아들 태영(도경수)의 이야기를 내세워 의외의 영화적 재미를 확보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태영의 이야기는 또다른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서 선희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맞닿는다는 점입니다.

태영은 고등학교 학생입니다. 그는 저소득층을 위한 급식비 지원 신청을 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쎈 보통의 아이입니다. 파업으로 인하여 급식비를 낼 여력조차 없는 선희. 문제는 수학여행비까지 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반 친구들에게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두려운 태영은 24시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하지만 약속한 2개월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점주에게 폭행까지 당합니다.

이렇듯 태영의 이야기는 요즘 사회적으로 찬반 토론이 진행중인 보편적 무료 급식 문제와 최저임금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미성년자 아르바이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통해 태영은 당연히 자신이 가져야할 것들을 힘있는 자들에게 빼앗기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체험하게 되고, 비정규직 문제로 파업을 하고 있는 선희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는 여전히 아픈 영화입니다. 개성있는 캐릭터 구성과 자연스러운 스토리 전개를 가지고 있지만 영화를 보고있으면 속이 답답하고 아파옵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마트'의 비정규직 직원에 대한 회사의 폭력적인 진압과 사회의 무관심, 그러한 와중에서도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는 선희 일행. 그러나 이랜드 홈에버 사태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그저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을 뿐입니다.

동준은 순례에게 묻습니다. "정말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을까요?" 낙숫물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뜻합니다. 거대한 폭포도 아니고, 거센 파도도 아닙니다. 그저 처마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힘없는 떨어지는 것이 바로 낙숫물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낙숫물이 바위를 뚫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바위를 향해 낙숫물이 떨어진다면 바위를 뚫는 기적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바로 그러한 기적을 바라봐야합니다. 근로자를 비정규직화해서 이익을 극대화시킨 기업이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정규직화해서 자신의 이익을 나눠줄리가 만무합니다. 그들의 조직은 바위처럼 단단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이 단단한 바위가 뚫리지 않을까요? [카트]는 비록 희망을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통해 우리 모두가 바위를 뚫는 낙숫물이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우리가 무관심으로 대한다면

비정규직이라는 바위는 점점 커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아픈 영화를 봐여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