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레드카펫] - 알고보면 진솔한 러브스토리

쭈니-1 2014. 11. 1. 21:18

 

 

감독 : 박범수

주연 : 윤계상, 고준희, 오정세, 조달환, 황찬성

개봉 : 2014년 10월 23일

관람 : 2014년 10월 29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이제부터 영화 이야기의 홍수이다.

 

월요일 밤에 혼자 [나를 찾아줘]를 보고, 화요일 밤에는 구피와 함께 [반 고흐 : 위대한 유산] 시사회에 참가했지만, 극장에서 영화 몰아보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시작은 바로 수요일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연차휴가계를 제출한 저는 무려 네편의 영화를 하루에 몰아서 봤습니다.

그날 저는 [레드카펫]을 시작으로 [타임 투 러브], [우리는 형제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마무리했습니다. 아침 8시 35분부터 보기 시작한 영화는 오후 5시 5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나더군요. 오전 9시출근해서 오후 6시 퇴근하는 평소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하루였습니다. 

이제 영화 몰아보기 데이는 끝이 났고, 제게 남아 있는 것은 몰아서 본 영화의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영화 이야기를 쓸 때 영화를 봤던 당시의 감정을 되살리며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네편의 영화가 지금 제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과연 제대로 쓸 수나 있을런지 걱정입니다.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도 없는 텅빈 극장에서 홀로 봤던 [레드카펫]의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네편의 영화를 몰아서 보고나니 그 중 세편의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였습니다. [레드카펫]은 성인영화 감독과 아역출신 배우의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타임 투 러브]는 사랑을 모르는 시나리오 작가가 결혼을 앞둔 한 여성에게 사랑을 느낀 후 그녀의 결혼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의 영화이며,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4년 연애 끝에 결혼한 부부가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본 세편의 로맨틱 코미디에게 단순 순위를 매기자면, 3위는 초호화 캐스팅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타임 투 러브]이고, 2위는 이명세 감독의 원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나이 사랑 나의 신부]입니다. 대망의 1위는 의외로 [레드카펫]이었습니다. 솔직히 [레드카펫]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행복감과 찡한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레드카펫]이 로맨틱 코미디일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성인영화 감독이 톱스타를 자신의 성인영화에 캐스팅하기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 코미디인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포스터 광고 카피도 '근데, 우리 무슨 영화 찍어요?', '들키면 끝장! 그녀 몰래 레디~ 액션'이고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영화의 줄거리도 그렇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 버린 [레드카펫], 도대체 이 영화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레드카펫]은 왜 로맨틱 코미디임을 감춰야 했는가?

 

가끔 영화의 광고와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줄거리가 실제 영화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의 장르 자체가 바뀌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장르는 상업 영화에서 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의 기대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레드카펫]에서 성인영화의 조감독인 진환(오정세)은 신입사원인 대윤(황찬성)에게 말합니다. "코미디 영화는 관객을 웃게 만들면 되고, 멜로 영화는 관객을 울게 만들면 되고, 에로 영화는 관객을 꼴리게 만들면 된다." 그것은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업 영화의 정체성입니다. 그러한 상업 영화의 정체성에 입각한다면 [레드카펫]은 관객에게 무엇을 선사해야 할까요?

만약 이 영화가 톱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한 성인영화 감독의 해프닝을 다룬 영화였다면 [레드카펫]의 장르는 섹스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색즉시공]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섹스 코미디는 적당히 야한 노출과, 성적 농담으로 관객을 웃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지만 [레드카펫]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가 아닌 15세 관람가 등급의 영화입니다.  이는 곧 [레드카펫]이 섹스 코미디로써 제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황당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제가 애초에 [레드카펫]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레드카펫]의 영화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관객이 꿈꾸는 사랑을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재현하여 관객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는 멋지고 예쁜 주인공을 내세웠고, 그들은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지며, 오해로 인하여 잠시 사랑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결국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그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입니다.

[레드카펫]이 정확하게 그러합니다. 주연배우인 윤계상, 고준희는 충분히 사랑스러웠고, 그들이 연기한 정우(윤계상)와 은수(고준희)는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오해로 인하여 은수는 정우의 곁을 떠나고,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정우의 직업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엔 위기가 찾아오지만, 결국 은수는 정우의 진심을 깨닫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레드카펫]은 로맨틱 코미디의 모든 조건을 갖춘 영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홍보는 그러한 로맨틱 코미디보다 15세 관람가 등급의 섹스 코미디라는 앞뒤 안맞는 장르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홍보사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정우의 직업이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점을 내세워 섹스 코미디로 [레드카펫]을 홍보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레드카펫]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성인영화에 대한 편견을 비웃는데, 영화의 홍보는 성인영화에 대한 편견을 이용하고 있는, 영화와는 상반된 전략을 선택한 셈입니다.

 

 

누가 성인영화 감독에게 돌을 던지냐?

 

앞서 언급했지만 [레드카펫]은 로맨틱 코미디의 모든 조건을 갖춘 영화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인 정우가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섹스 코미디로 홍보가 된 어이없는 홍보전략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리 말한다면 그만큼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정우의 직업은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 [레드카펫]은 영화의 초반 성인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에피소드를 영화의 재미로 이용합니다. 여기엔 씬스틸러인 막강 조연 배우들의 역할이 컸는데, 조감독 진환을 연기한 오정세를 비롯하여, 조달환, 아이돌 출신인 황찬성, 그리고 에로 배우 캐릭터를 연기한 신지수, 이미도 등의 물 오른 멋진 연기가 한 몫을 해냅니다.

이렇듯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정우의 직업은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거짓 영화 홍보의 미끼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레드카펫]이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는 다른 차별점 역할을 하기도 하고, 영화 초반을 부담없이 웃고 즐기는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주기도합니다. 하지만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소재는 영화 후반에 더 큰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성인영화 업계 사람들이 겪는 슬픔입니다.

 

과연 성인영화를 단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남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성인영화를 보며 즐깁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성인영화를 찍은 배우, 제작진에게는 손가락질을 하기도 합니다. 성인영화를 즐기면서 성인영화 업계의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입니다.

[레드카펫]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상업적 장르 안에 그러한 일반인들의 이중성을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비록 정우는 경력 10년차의 성인영화 감독이지만, 그의 꿈은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가 쓴 시나리오는 탐을 내면서도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그의 경력을 문제삼아 기회를 빼앗아가 버리는 것이죠.

정우를 색안경끼지 않고 순수하게 그의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것은 은수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톱스타가 되었으면서도 정우가 쓴 시나리오 <사관과 간호사>에 출연을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우의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이력은 그들의 사랑과,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조차도 추악한 스캔들로 둔갑시켜버립니다. 그로인해 정우와 은수의 사랑은 위기를 맞이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스토리 라인인가요?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공식 안에 완벽하게 자리매김 하면서도 실제 성인영화 감독 출신인 박범수 감독이 직접 겪었던 성인영화 감독이 겪어야 하는 비애를 과감하게 해내는 [레드카펫]. 그렇기에 이 영화는 제게 잘만든 로맨틱 코미디로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꿈은 4대 보험이 아니지 않는가?

 

[레드카펫]은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적 재미를 잘 살린 영화임과 동시에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박범수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꿈을 가진, 하지만 꿈을 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정우는 어린 시절 토요일밤이면 부모님과 함께 TV앞에 모여 앉아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 영화 감독의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가족이 함께 볼 수 없는 성인영화 감독입니다. 사실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며 준비를 했지만, 사회의 편견은 번번히 그의 꿈을 빼앗아갔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안주해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정우의 이야기는 저와 비슷합니다. 저 역시 어린시절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 토요일밤이면 '주말의 명화'를 함께 즐겼었습니다. 저는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 영화광이 되었고, 언젠가는 내 이름을 내건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제가 썼던 수 많은 소설들은 제가 만들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 블로그를 운영하며 대리 만족을 하면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안정된 삶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환이 "형은 어릴적 꿈이 4대 보험이었어?"라고 묻는 장면은 저를 뜨끔하게 만들었습니다. 최소한 정우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했기에, 어쩌면 그는 저보다 더 용기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 <사관과 간호사>를 만드는 정우의 열정이 저는 멋져 보였습니다.

 

제가 [레드카펫]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박범수 감독의 분신이라고 할 수 캐릭터 정우의 매력 뿐만 아니라 정우와 사랑에 빠지는 은수의 캐릭터 또한 매력적이라는 점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캐릭터의 매력은 절대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레드카펫]은 로맨틱 코미디로써의 소임을 다한 셈입니다.

사실 저는 고준희라는 배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 초반 은수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전세 사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우의 집에 막무가내로 눌러 앉아 버리는 뻔뻔함. 얼굴은 예쁘지만, 머리는 비었고, 뻔뻔하기까지한 여주인공이라니... 제가 정우였다면 당장 내쫓아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수의 사연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점점 매력적이 되어 갑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역 배우가 된 은수. 하지만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어머니를 따라 낯선 스페인에 가야했던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홀로 서기 위해 다시 배우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녀가 진환과의 오디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하는 장면은 그녀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좋았습니다. 실제 고준희는 학창 시절 멋모르고 배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서른의 나이를 바라보게된 그녀.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좀 더 멋진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진짜 배우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렇듯 [레드카펫]은 충분히 매력적인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이 영화가 15세 관람가이고, 그로인하여 섹스 코미디의 재미를 채워줄 수는 없는 영화이지만, 그러한 기대감을 버리고 사랑하는 연인끼리 함께 본다면 로맨틱 코미디로써의 영화의 재미는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영화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봉만대 감독에 이어 박범수 감독까지...

이제 그들의 재능이 어둠을 벗어나 좀 더 밝은 곳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가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영화를 본다면

그들이 창조하는 영화적 재미를 좀 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