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노벰버 맨] - 영화의 단점보다 흥미로운 설정이 돋보였다.

쭈니-1 2014. 10. 23. 17:09

 

 

감독 : 로저 도널드슨

주연 : 피어스 브로스넌, 올가 쿠릴렌코, 루크 브레이시, 빌 스미트로비치

개봉 : 2014년 10월 16일

관람 : 2014년 10월 22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일주일만에 극장으로 고고씽!

 

저희 회사 창립이래 처음으로 가을 야유회를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오는 2박3일 일정이라서 관리부 입장에서는 준비할 것도, 신경쓸 것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무사히(크고 작은 사건들은 있었지만 이젠 모두 추억으로...) 가을 야유회를 마치고나니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직원들이 재미있었다고 응원해주니 기분만큼은 뿌듯합니다. 

하지만 가을 야유회가 끝나자마자 저를 기다리는 것은 굵직굵직하고 골치아픈 회사 일거리들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가을 야유회 여운이 지워지기도 전에 월, 화요일 야근을 하며 골치아픈 일거리들을 처리하다보니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프더군요. 그래서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캔맥주와 TV 예능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직 못본 기대작들인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노벰버 맨]은 제게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주에는 기대작들이 네편이나 개봉하는 만큼 제겐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밤 10시 30분. 충동적으로 영화를 보겠다고 혼자 집을 나섰습니다. 캔맥주 생각이 간절했고, 눈은 스르륵 감기고 있었지만, 최소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노벰버 맨] 중의 한편은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캔맥주와 졸음의 유혹을 떨쳐버린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무려 일주일만에 제 선택을 받은 영화가 바로 [노벰버 맨]입니다.

 

제가 개봉하자마자 2주 연속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을 제치고, 개봉 첫주 국내 박스오피스 4위에 그친 [노벰버 맨]을 선택한 이유는 딱 두가지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흥행 성적이 부진한 [노벰버 맨]은 오늘이 아니면 상영하는 극장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비록 개봉 3주차를 맞이하지만 비수기 극장가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한 만큼 신작이 개봉해도 개봉관을 어느정도 확보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벰버 맨]은 개봉 1주만에 대부분의 상영관을 신작에게 빼앗길 것이며, 조만간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장에서 [노벰버 맨]을 보고 싶다면 신작이 개봉하기 전인 수요일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이 영화의 장르가 제가 좋아하는 스파이 액션 영화라는 점입니다. 스파이 액션 영화의 원조인 '007 제임스 본드'와 스파이 액션의 새로운 대세 '본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은 제게 시원시원한 액션의 쾌감을 안겨줬었습니다. 게다가 [노벰버 맨]의 주연을 맡은 배우는 제5대 제임스 본드였던 피어스 브로스넌입니다. 비록 지금은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제임스 본드 자리를 물려줬지만, [007 골든아이]부터 [007 어나더 데이]까지 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영화들은 제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노벰버 맨]에 기대한 것은 바로 스파이 액션 특유의 화끈하고 속시원한 액션이었던 것입니다.

 

 

화끈한 스파이 액션은 기대하지 말자!

 

하지만 [노벰버 맨]은 제가 기대했던 화끈한 스파이 액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 출신이라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노벰버 맨]에 '007 제임스 본드' 영화와 같은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셨을테지만, 기본적으로 [노벰버 맨]은 액션보다는 스릴러에 방점을 찍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노벰버 맨]은 솔직히 그다지 치밀한 구성을 자랑하는 영화도 아니었습니다. 캐릭터는 불분명했습니다. 피터 데버로(피어스 브로스넌)가 지나간 자리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황량한 겨울 같은 풍경이 생겨난다는해서 그의 별명이 '노벰버 맨'(11월의 사나이)이라고 했다는데, 영화 속의 피터 데버로는 그런 무시무시한 별명과 어울리지 않을만큼 오히려 푸근한 아저씨 같았습니다. 뭔가 대단한 활약을 할 것 같았던 러시아의 여성 킬러는 별 활약 없이 허무하게 쓰러지고, 차기 러시아 대통령 후보인 알카시 페데로프 장군 또한 영화 후반부엔 너무 무기력할 뿐이었습니다. 

구성 역시 약간은 엉성합니다. CIA 고위 간부인 헨리(빌 스미트로비치)가 은퇴한 피터 데버로를 굳이 작전에 끌어들인 이유도 잘 설명이 안되었고, 페데로프 장군의 감춰진 과거 비밀 또한 그다지 새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데이빗 메이슨(루크 브레이시)이 피터 데버로의 약점을 찾는 장면은 너무 허술해서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버젓이 사진이 있는데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이라는 CIA에서 지금까지 피터 데버로의 약점을 찾지 못했다니...

 

이러한 약점들로 인하여 [노벰버 맨]은 제 기억에 오래 남을 스파이 액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벰버 맨]을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물론 오랫만에 극장에서 보는 영화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노벰버 맨]에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선 저는 피터 데버로와 데이빗 메이슨의 관계가 흥미로웠습니다. 선배와 후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표적이 바로 피터와 데이빗의 관계입니다. 그들의 이런 흥미로운 관계는 [노벰버 맨]의 오프닝인 2008년 암살 저지 작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참 요원인 피터와는 달리 신참인 데이빗은 암살자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듭니다. 그 순간 피터는 "제발 내 명령대로 움직이란 말이야."라며 데이빗에게 호통을 칩니다.

하지만 사실 데이빗이 피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암살자에게 섣부르게 방아쇠를 당긴 것은 피터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암살자가 피터에게 다가오며 총을 쏘는 상황에서 피터를 구하기 위해서 데이빗은 단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터의 호통에 데이빗은 어쩔 수 없었다며 강하게 항변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5년 후로 시간을 건너뜁니다.

 

 

피터 데버로와 데이빗 메이슨의 흥미로운 관계

 

5년 후 적이 되어 다시 만난 피터와 데이빗.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죽이지 못하고 뒤돌아섭니다. 피터로서는 데이빗을 죽일 명분이 확실합니다. 비록 조직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데이빗이 피터의 옛 연인인 나탈리아를 저격했기 때문입니다. 데이빗 역시 피터를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피터를 죽이지 않으면 그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노벰버 맨]이 냉혹한 스릴러 영화라면 피터와 데이빗의 대결로 영화를 박진감 넘치게 진행시킬테지만, [노벰버 맨]은 그것보다는 피터와 데이빗의 흥미로운 관계를 통해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시킵니다. 

피터와 데이빗의 흥미로운 관계는 [노벰버 맨]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영화 오프닝에서 피터는 음식점의 여종업원과 시시덕거리는 데이빗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는 적에게 약점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년 후 데이빗을 뒤쫓는 피터는 데이빗과 사랑에 빠지는 이웃 여성 사라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마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어린 아들에게 체벌을 가하듯이...

피터를 제거하는데 머뭇거리는 데이빗에게 CIA 고위 간부는 서류를 전해줍니다. 그 서류에는 데이빗에 대한 피터의 평가가 담겨 있는데, 피터의 평가는 '부적절'이었습니다. 이에 데이빗은 자신의 집에 침입한 피터에게 울먹이며 말합니다. "왜 나를 그렇게 평가했어요?" 그리고 데이빗은 피터가 가르쳐준대로 피터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여 피터에게 제대로 한방 먹입니다.

 

이렇듯 피터와 데이빗의 관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직은 미숙한 아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려는 아버지와, 그러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탈리아가 죽은 이후 피터가 이 위험천만한 생존 게임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나탈리아에 대한 복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데이빗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만약 피터의 주장대로 나탈리아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면 저격수인 데이빗과, 데이빗에게 저격을 명령한 CIA 고위 간부만 죽이면 피터의 복수극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피터는 데이빗을 죽이지 않을 뿐더러, 데이빗에게 저격을 명령한 CIA 고위 간부에게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 데이빗의 곁에서 맴돌며 못다한 교육을 마치고, 페데로프 장군과 CIA가 얽힌 추악한 진실을 데이빗에게 알려줌으로써 그가 CIA의 꼭두각시 살인 기계가 아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스파이가 되도록 이끌어줍니다.

데이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마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아들처럼 행동합니다. 5년전 자신의 실수 때문에 CIA를 떠난 피터에게 '나를 버리고 떠났다.'며 원망하고, 자신에 대한 피터의 평가에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피터와 데이빗의 흥미로운 관계가 있기에 [노벰버 맨]은 단점이 보이는 스파이 액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재미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후 제 글이 본의 아니게 스포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길...)

 

 

냉전시대와는 다른 21세기 스파이 전쟁

 

[노벰버 맨]은 빌 그랜저의 인기 스파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빌 그랜저가 쓴 '노벰버 맨'을 주인공으로한 책은 모두 13권인데 이 중에서 [노벰버 맨]은 7번째 작품인 <There Are No Spies>을 각색했다고 합니다. 

<There Are No Spies>은 냉전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동과 서의 갈등이 극에 치달았던 냉전시대는 스파이 소설, 스파이 영화의 전성기였습니다. 하지만 냉전시대는 끝이 났고, 냉전시대를 배경으로한 스파이 영화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벰버 맨]은 원작과는 달리 냉전시대가 아닌 현시대로 배경을 옮겨야 했습니다. 피터와 데이빗의 관계 외에도 [노벰버 맨]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한 원작과 그러한 원작을 모티브로한 영화라니...

냉전시대에는 서로의 이념으로 대립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따위 이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그러한 이익을 차지하려면 누구 먼저 고급 정보를 확보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됩니다. 그렇기에 현대를 정보시대라고들 합니다. [노벰버 맨]에서도 페데로프 장군의 과거행각을 알고 있는 밀라 필라포바라는 이름의 여인을 확보하기 위한 은밀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차기 러시아 대통령으로 유력한 페데로프의 약점을 확보하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정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노벰버 맨]은 한술 더 뜹니다. 영화의 후반 헨리는 말합니다. 매일 아침이면 바뀌는 정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CIA가 페데로프의 과거 정보를 얻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보를 이용해서 페데로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냉전시대와는 다른 21세기 스파이의 전쟁인 것이죠.

 

페데로프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는 밀라 필라포바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꽁꽁 숨어버렸고, 그러한 밀라를 찾기위한 유일한 끈은 난민구제센터에서 일하는 엘리스(올가 쿠릴렌코)입니다. 페데로프도, CIA도, 엘리스를 뒤쫓는 것은 바로 밀라 필라포바라는 소중한 정보가 되는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익보다 소중한 것은 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CIA는 페데로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를 러시아 대통령에 앉혀야합니다. 분명 그것이 미국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페데로프가 저지른 죄는 어떻게 될까요? 그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은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할까요? 영화의 후반, 엘리스의 항변은 바로 그것에 대한 작은 외침입니다. 모두들 이익을 위한 정보와 싸울 뿐,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엘리스가 스스로 칼을 꺼내들었고, 숨기보다는 스스로 나서서 진실을 밝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진실에 관심이 없기에...

과연 국가의 이익을 위해 진실이 감춰진다면 그것은 정의일까요? 과거 냉전시대의 스파이들은 이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스파이들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아니, 피터 데버로처럼 진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스파이가 진정한 정의가 아닐까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노벰버 맨]은 비록 잘만든 스파이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기엔 이 영화는 헛점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1시간 40분 동안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흥미로운 설정과 더불어 엘리스의 작은 외침에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피터 데버로의 무심한 액션, 앨리스의 작은 외침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진실이 감추고 획득한 국가의 이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