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태윤
주연 : 박철민, 윤유선, 김규리, 박희정, 김영재
[제보자]를 본 후 문득 떠오른 영화
지난 화요일 [제보자]를 봤습니다. 2004년부터 2006년에 걸쳐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논란을 담은 [제보자]는 실화를 영화화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잘 함축된 멋진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제보자]를 보고나니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국내 굴지의 기업인 삼성 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을 얻어 결국 2007년에 세상을 떠난 故 황유미씨와 그의 가족의 실화를 다룬 영화입니다.
[제보자]와 [또 하나의 약속]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이 닮은 영화입니다. [제보자]의 경우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장환(이경영) 박사에 맞서 진실을 밝혀야 하는 윤민철(박해일) PD의 힘겨운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에 반에 [또 하나의 약속]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 진성 반도체에 맞서 백혈병으로 죽은 딸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택시기사 상구(박철민)의 외로운 싸움을 담고 있습니다.
거짓된 희망에 열광하는 집단 광기의 여론과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기업. [제보자]와 [또 하나의 약속]은 도저히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엄청난 존재와 싸우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진정 삼성 공화국인가?
[또 하나의 약속]은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상구의 밝은 모습과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취업 전선에 나선 그의 첫째딸 윤미(박희정)의 기특한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합니다. 첫 출근을 앞둔 윤미에게 "절대 노조에 가입해서 데모같은 것은 하지마라!"라고 당부하는 상구. 그러한 아버지에게 윤미는 "그 회사는 노조같은 거 없어요. 회사에서 돈을 많이 주니까 직원들이 데모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나봐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노조가 없는 대기업... 바로 삼성입니다. 노조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조직입니다. 물론 가끔 이 노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비리에 찌들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거대 기업에 비해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노조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1위 대기업인 삼성 그룹에는 노조가 없습니다.
한때 대한민국을 삼성공화국이라며 비꼬기도 했었습니다. 그만큼 삼성의 힘은 막강합니다. 영화에서도 진성 그룹의 이실장(김영재)은 말합니다. "우리 회사 1년 매출이 얼마인지, 몇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시는지 아십니까? 대한민국 국민을 먹여 살리는게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죠." 소비자가 왕이라고 말하면서 소비자에게 군림하려는 대기업. [또 하나의 약속]은 바로 그러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꾸짓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돈 앞에 장사없다.
백혈병으로 소중한 딸, 윤미를 잃은 상구는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노무사인 난주(김규리)와 함께 고난한 투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상구의 아내인 정임(윤유선)도, 상구의 투쟁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도 상구를 이해해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상구가 보상금을 뜯어내기 위해 저러는 것이라며 빨갱이라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순간 울컸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실제 그러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을 눈 앞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시끌벅적했던 몇 달전, 혼자 점식 식사를 하기 위해 회사앞 순대국집에서 갔었습니다. TV에서는 세월호 사건의 뉴스 특보가 방송 중에 있었는데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몇몇 손님들이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며, 저 사람들은 보상금을 두둑하게 받을테니 앞에서는 울어도 뒤에서는 웃을 거라며 오히려 부러워하더군요. 순간 저는 그들이 악마로 보였습니다. 그 이후 다시는 그 순대국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식의 목숨과 돈을 맞바꾸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약속]을 보니, 대기업이 돈 봉투에 산재 소송을 멈추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욕을 할 수가 없겠더군요. 수술비와 생활비의 압박이라는 현실이 진실을 보다 더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죽음에 대한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의 비애. 그 속에서 진실을 감춘 대기업들은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냉정히 평가해서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또 하나의 약속]은 제 개인적인 시선으로 볼 때 잘만든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제보자]가 실화를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화가 주는 의미와 영화적 재미를 모두 잡은 영화인데 반에, [또 하나의 약속]은 관객의 감정선을 너무 과하게 건드리려 노력하는 신파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실장이 윤미의 병원을 찾아와 "자기가 잘못해서 아픈 것을 왜 회사 탓을 해!"라고 말하는 장면은 너무 선과 악을 선을 명확하게 긋기 위해 불필요한 노력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실화라는 영화의 힘은 분명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상구를 이해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상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과정, 결정적인 순간 진성 반도체의 내부 고발자가 나와 진술을 하는 장면 등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가 아니라면 분명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실화이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되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특히 이 영화는 삼성그룹의 눈치 탓에 투자자를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개인 기부자들의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어여야 했다고 합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후에도 삼성그룹의 외압 의혹을 받으며 극장에서 상영될 기회를 상당 부분 잃었습니. 그러한 사실은 영화 속 실화보다 더욱 [또 하나의 약속]을 의미 깊게 만듭니다. 여전히 삼성이라는 대기업은 진실을 숨기려고 하고 있음을 대한민국 영화팬들에게 알린 꼴이 되었으니... 이렇듯 영화 속 실화의 힘과 삼성그룹의 꼼수가 모여 결코 잘만든 영화가 아닌 [또 하나의 약속]을 의미 깊은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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