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에코] - 너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쭈니-1 2014. 10. 10. 18:28

 

 

감독 : 데이브 그린

주연 : 테오 할름, 아스트로, 리스 하트위그, 엘라 발슈테트

개봉 : 2014년 10월 8일

관람 : 2014년 10월 9일

등급 : 전체 관람가

 

 

하룻밤 잠을 못잔 후유증은 굉장했다.

 

10월 8일, 직장 동료가 가족상(喪)을 당해서 경상남도 하동에 다녀왔습니다. 오후 6시에 퇴근한 후 다른 직장 동료들과 함께 회사차를 이용해서 하동으로 출발. 하동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훌쩍 넘어버리더군요. 장례식장에서 뒤늦은 저녁식사도 하고, 술한잔을 하며 상을 당한 동료를 위로한 후 새벽 4시 30분에 다시 회사차에 올라탔습니다. 회사에 도착하니 오전 9시. 하동까지 함께간 동료들과 회사 근처에서 해장국으로 피로함을 달래고 집에 도착하니 오전 10시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10월 9일은 한글날이라 공휴일입니다. 원래 제 계획은 오전동안 잠을 푹 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니 구피와 웅이가 한글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화문에 가겠다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피는 웅이와 둘이 다녀올테니 저보고는 집에서 잠이나 푹 자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간단히 샤워만 하고 구피, 웅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에 갔습니다.

광화문에서 한글날 행사에 참가하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고바우가 바라본 우리 현대사>를 관람한 후, 인사동으로 이동해서 떡갈비 정식도 먹고, 쌈지길, 미술관등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오후엔 그냥  집에 돌아오기 아쉬워 극장에서 할리우드의 SF 가족영화인 [에코]까지 봤답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6시 30분. 저는 간단히 세수만 하고 저녁식사도 거른채 그대로 침대로 직행하여 밤 10시까지 죽은 듯이 자고 말았습니다.

 

사실 [에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면서 저는 후회를 했답니다. 종로3가에서 극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는 꾸벅꾸벅 졸았거든요. 졸면서도 머릿 속으로는 '영화는 나중에 보고 그냥 집에 가자고 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에코]를 본다며 좋아하는 웅이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극장에서 도착해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잠을 내쫓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하룻밤을 지샌 후유증은 아메리카노 한잔으로는 극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에코]가 시작한 후에도 저는 계속에서 졸음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아마 영화를 보며 이토록 졸음과 싸워본 것도 정말 오랜만인 듯. 제가 상가집에서 밤을 지새우는 동안 집에서 새벽 4시까지 집안 정리를 했다는 구피는 제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에코]를 보며 이렇게 극장에서 잘 수 있는 구피가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영화가 궁금해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거든요.

고작 딱 하루 밤을 지샌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새벽에 비디오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달간 제대로 잠을 못잤어도 팔팔했는데, 이젠 딱 하루를 못잤는데 이렇게 견딜 수가 없을만큼 힘들고 졸립네요. [에코]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아직 어린 주인공들이 '에코'를 고향 행성으로 돌려보낸 후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좋아했는데, 저는 이제 늙어서(!) 그럴 체력은 안되나봅니다. 졸음과 싸워가며 어렵게 [에코]를 본 후 이런 내 자신이 그냥 씁쓸했습니다.

 

 

현대판 [E.T.]?

 

이렇게 저는 [에코]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졸음과 싸웠어야 했으니 최상은 커녕 최악의 컨디션으로 영화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소년 중의 한명인 턱(아스트로)이 캠코더, 몰카안경등으로 촬영한 장면이 영화에 이용된 것이죠. 그런만큼 영화 화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졸음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제게 어지럼증을 유발한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영화를 보면서 단 한순간도 졸지는 않았으니 나름 성공한 듯...

[에코]를 보는 순간의 제 컨디션이 최악이어서 그런지 [에코]는 제가 기대했던 것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에코]는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로 헤어지게된 세명의 10대 소년이 헤어지기전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휴대폰에 전송된 비밀스로운 지도를 따라 위험한 모험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위험한 모험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하는 소년들의 성장기라는 부분은 로브 라이너 감독의 명작 [스탠 바이 미]를 떠오르게 했고,  카메라를 들고 어른들이 감춰놓은 외계 생명체의 비밀을 파헤치는 부분은 J.J. 에이브럼스 감독의 [슈퍼 에이트]가 연상되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저는 [에코]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와 비슷한 영화일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귀여운 외계인, 외계인을 고향 행성으로 돌려보내주기 위한 어린 소년, 소녀의 모험 등은 제가 초등학생 시절 봤던 [E.T.]의 추억을 되새겨주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코]는 이 영화, 저 영화를 마구 뒤섞는 바람에 무엇 하나 제대로된 영화적 재미를 구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스탠 바이 미]에 담겨진 속 깊은 성장담도 없었고, [슈퍼 에이트]와 같은 긴장감 넘치는 모험도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E.T.]와 같은 외계인과 소년, 소녀 간의 가슴 따뜻해지는 우정도 제 기대와는 달리 미흡하기만 했습니다.

알렉스(테오 할름)와 턱, 먼치(리스 하트위그)가 우발적으로 위험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엠마(엘라 발슈테트)가 뒤늦게 이 모험에 가담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 아이들의 성별을 맞추기 위한 억지처럼 보였고, '에코'를 추적하는 정부 비밀 요원은 [나홀로 집에]의 멍청한 도둑들처럼 어리숙하기만 했습니다. 단지 [에코]는 지금까지의 외계 생명체를 소재로 다룬 영화 중에서 최강의 귀요미를 자랑하는 '에코'와 영화 후반에 선보이는 [트랜스포머]를 능가하는 '에코'의 깜짝 능력이 눈에 띌 뿐입니다.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초중반까지 졸았던 구피는 "그런데 어쩌다가 외계의 거대한 우주선이 마을에 있었던거야?"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졸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본 저 역시도 구피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코]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에코]는 이 영화, 저 영화의 설정을 대충 덕지덕지 끼워 맞춘 까닭에 영화의 스토리 구축 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관람 등급에 맞춰 [에코]를 바라보기

 

하지만 [에코]가 어린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진 영화임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의 약점은 어쩌면 그렇게 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비록 구피는 영화 초중반에 졸았고, 저 역시 최악의 컨디션 때문에 졸음을 참으며 영화를 봐야 했지만, 그런 저희와는 달리 웅이는 [에코]를 아주 재미있게 관람했으니까요.

웅이에겐 왜 거대한 우주선이 미국의 작은 마을에 숨겨졌던 것인지, 왜 '에코'는 무방비 상태로 우주선을 혼자 찾으러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나봅니다. 어차피 저 역시 웅이를 위해서 [에코]를 기대작으로 선정했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함께 본 것이니만큼 [에코]에 대해서는 웅이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부족한 영화적 완성도는 무시하고 철저하게 웅이의 시선으로 [에코]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알렉스와 턱, 먼치, 그리고 엠마가 위험한 모험에 나선 이유입니다. 알렉스, 턱, 먼치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했던 단짝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던 마을에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그들의 부모들은 이사를 가려합니다. 알렉스와 턱, 먼치는 자신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서로 헤어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턱은 이 모든 상황을 캠코더로 찍으며 나름대로의 반항을 하려합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그러한 반항이 어른들에게 통할리가 없죠.

 

[에코]는 바로 그러한 어린 아이들의 무기력함으로 영화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결코 마을을 떠나고 싶지도, 친한 친구들과 서로 떨어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들의 의사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어른들 마음대로 진행됩니다. 마지막날 그들이 무턱대로 휴대폰에 전송된 지도로 모험을 떠난 것은 그런 제멋대로인 어른들을 향한 아이들의 마지막 반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엠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스와 턱, 먼치가 몰래 엠마의 집에 숨어 들었을 때, 엠마는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는 부모와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엠마가 자신의 방에 몰래 들어온 알렉스 일행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도, 무턱대고 그들을 따라 나선 것도 어리다고 자신을 무시한 부모에 대한 십대 소녀의 반항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렉스 일행이 어른인 정부 관계자의 말을 믿지 않고, 처음 본 생명체인 '에코'를 더 신뢰하는 것도 그러한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정든 마을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자기 마음대로 친구 사이인 그들을 떨어뜨리려 하는 어른들.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 입장에서는 그러한 어른들이 악역인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에코'가 어린 아이처럼 귀여운 외모를 가진 것은 그러한 설정 때문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생각해보면 저 역시 어린 시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습니다. 어리다고 무시당하고, 모든 것을 어른들 마음대로 정해버리는 세상에서 내가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나니 어린 시절이 그립습니다. 제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른이된 지금의 제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이 아닌 바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어린 아이들인 셈입니다.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에 맞서 '에코'를 구하는 과정에서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은 초반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게 됩니다. 특히 고아 소년이었던 알렉스에겐 그러한 자신감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와 생활을 하는 알렉스. 그렇기에 그는 더욱더 '에코'에게 집착합니다. 버림 받은 상처가 있는 알렉스는 혼자 남겨진 '에코'를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알렉스와 친구들은 정부의 음모를 막아내고 '에코'를 고향 행성으로 돌려보는데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린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체념하기 보다는 비록 떨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게 됩니다.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죠.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면서 활기찬 웅이를 보니 부러웠습니다. 나도 웅이 나이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단 하룻밤을 지샜다고 그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싶을 뿐인 빈약한 체력의 중년 남자일 뿐이니까요. 웅이는 과연 이러한 제 심정을 알고 있을까요?

분명 [에코]는 잘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의 완성도는 비슷한 소재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서 확실히 뒤떨어집니다. 차라리 가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E.T.]를, 소년 소녀의 모험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싶다면 [슈퍼 에이트]를 더 추천하고 싶습니다. ([스탠 바이 미]는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의 영화이기에 제외) 아마 그러한 이유 탓에 북미에서의 흥행도 실패한 것이겠죠.

하지만 [에코]는 귀여운 '에코'의 디자인과 네 소년, 소녀의 우정, 그리고 그들의 성장에 의한 재미는 가벼운 전체 관람가 등급에 잘 맞춰져 있습니다. 혹시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싶어하는 자녀가 있으신 분이라면 함께 손 잡고 [에코]를 본 후 "너희도 영화 속 아이들처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단다."라고 말해주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영화를 보고나서 곧바로 침대로 직행하느라 웅이에게 그 말을 전해주지 못해답니다. 그 대신 이번 주말에 웅이와 [E.T.]를 보면서 말해줘야 겠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네가 부럽다고... ^^

 

체력이 무한하게 남아돌던 젊은 시절이 그리워진다.

나는 왜 그때 좀 더 그 젊음을 만끽하지 못했던가.

그리고 그러한 젊음보다 더 소중했던 어린 시절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에코]를 보니 영화의 재미보다는 아이들의 무한한 성장이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