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필립 노이스
주연 : 브렌튼 스웨이츠, 메릴 스트립, 제프 브리지스, 오데야 러쉬, 카메론 모나한
개봉 : 2014년 8월 20일
관람 : 2014년 8월 24일
등급 : 12세 관람가
당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꿈꿉니다. 그러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평생 노력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마다 꿈꾸는 행복은 서로 다릅니다. 게다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또한 매우 드뭅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행복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을 '꿈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가며 미래의 원대한 행복이 아닌 지금 당장의 소소한 행복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회사에 나가 돈을 벌고,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면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우리는 오늘의 행복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면 미래의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 우리는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보다 살기 좋은 미래. 결국 꿈을 가진 비범한 사람이건,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건,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미래는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입니다. 유토피아(utopia)는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토피아의 뜻대로 현실에서는 힘들겠지만, 과학이 발전한다면 미래엔 가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미래의 모습이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의 반대어로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어두운 미래상을 말합니다. 자연 재해로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거나,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 혹은 외계 생명체의 공격을 받거나, 혹은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핍박을 받거나, 영화에서의 미래는 항상 그런 식으로 암울합니다.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의 사람들은 전쟁, 차별, 가난, 고통 없이 모두가 평등한 시스템 커뮤니티라는 유토피아를 구축하고 살아갑니다. 커뮤니티에서는 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피부색에 의한 차별이 없습니다.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자신의 직업이 정해지고, 그 직업에 따라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그에 대한 갈등, 분쟁은 전혀 없습니다. 어쩌면 커뮤니티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유토피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 반항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바로 직업 수여식에서 기억보유자라는 낯선 임무를 부여받은 조너스(브렌튼 스웨이츠)라는 소년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 시스템 커뮤니티에 조너스는 왜 반항하는 것일까요?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비록 볼거리가 풍부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SF영화는 아니지만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가진 영화입니다.
유토피아의 댓가는 인간 감정의 제거이다.
[더 기버 : 기억전달자]와 비슷한 미래의 유토피아를 다룬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이버전트]입니다. [다이버전트]의 사회는 다섯개의 분파로 나누어 사람들에게 자신이 속한 분파의 행동규범을 절대적으로 따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철저히 통제된 세상을 구축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통제된 [다이버전트]의 사회에서도 시스템에 저항하는 소녀 트리스(쉐일린 우들리)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열여섯이 되어 평생 살아갈 분파를 결정해야 하는 테스트에서 그 어떤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 금기시 되는 존재 '다이버전트'로 판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다이버전트]에서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린 것은 트리스가 아닌 다섯개의 분파 중에서 뛰어난 두뇌와 지식 탐구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에러다이트의 수장 지니 매튜스(케이트 윈슬렛)입니다.
에러다이트는 이타심을 가지고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하는 사회의 지도 분파 애브니게이션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에러다이트는 다섯개의 분파로 나뉘어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회에 반기를 들어 평화를 깨뜨린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에러다이트가 뛰어난 두뇌와 지식 탐구을 목표로 하는 분파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현명함을 뜻하지만, 그만큼 자만심을 가지게 되고, 욕심도 생기는 것이죠. 아마도 지니 매튜스는 애브니게이션이 아닌 에러다이트가 사회를 지도한다면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자만심은 애브니게이션을 지도층에서 밀어내는 쿠데타라는 폭력의 형태로 드러났고, 결국 에러다이트의 폭력은 유토피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이버전트]의 유토피아가 불완전한 것은 통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유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욕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러한 욕심은 아무리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라고해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그러한 사람들의 욕심마저 차단한 완전한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바로 인간의 감정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감정을 빼버린다면 기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해진 명령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기계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 어떤 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일만을 수행할테니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더 기버 : 기억전달자]가 이루어 놓은 유토피아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기쁨, 즐거움, 사랑, 감동처럼 좋은 감정도 있지만 아픔, 고통, 슬픔, 분노처럼 안좋은 감정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으로 인하여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로인하여 불행하기도 합니다. 결국 인간에게서 감정을 빼앗아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불행함을 막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행복 또한 막아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더 기버 : 기억전달자]에서 커뮤니티 사람들은 모두가 무미건조합니다. 가족간의 사랑도 모르고, 남녀간의 사랑 역시 당연히 모릅니다. 그들은 마치 정해진 명령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기계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기버 : 기억전달자]의 사회는 [다이버전트]보다 안정적인 유토피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유토피아 안에 존재하는 디스토피아
조너스는 기억보유자의 임무를 맡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커뮤니티의 수석원로(메릴 스트립)는 사람들의 모든 감정을 제거했으면서도 기억보유자의 임무를 조너스에게 부여한 것일까요? 수석원로는 커뮤니티의 유지를 위해서 인간의 감정은 불필요한 요소라고 역설하지만 기억보유자 임무를 조너스에게 부여함으로써 인간 감정의 회복이라는 마지막 끈을 잘라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기억전달자(제프 브리지스)는 조너스에게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원로들에게 올바른 충고를 하기 위해 기억보유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미 수석원로는 로즈메리(테일러 스위프트)의 실패로 인하여 기억전달자의 임무를 어린 소년, 소녀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 요소를 떠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조너스에게 그러한 위험한 임무를 부여한 것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언젠가 인간 감정을 회복시켜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조너스는 기억전달자를 통해 행복한 감정들을 전달받습니다. 사랑, 기쁨, 환희, 쾌감... 조너스는 "왜 커뮤니티는 이렇게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빼앗아갔냐?"며 항변합니다. 그러자 수석원로는 기억전달자에게 명령합니다. 조너스에게 아픔, 고통의 감정을 전달하라고... 결국 조너스는 기억전달자에게 전쟁이라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범죄의 기억을 전수받습니다.
자! 그렇다면 조너스는 인간의 감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추악한 면을 보았으면서도 커뮤니티에 저항한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이 [더 기버 : 기억전달자]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조너스가 커뮤니티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를 이루어 놓았다는 커뮤니티에서도 디스토피아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없다면, 우린 양심, 죄책감 또한 잃게 되는 것입니다. 기계는 고장이 나면 새것으로 교체하면 됩니다. 고장난 부품을 버리고 새 부품으로 교체하는데 있어서 고장난 부품에 대한 죄책감 따윈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완벽한 유토피아를 이루어 놓았다는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감정없는 기계와도 같은 취급을 하는 그들에게 임무를 완수할 수 없는 불필요한 사람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는데 있어서 죄책감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감정이 없는 그들에게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그리고 꼭 필요한 행동일 뿐입니다.
하지만 기억전달자를 통해 감정을 배운 조너스는 그것이 끔찍한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폭력, 살인, 전쟁처럼 인간의 감정이 만들어 놓은 디스토피아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끔찍한 범죄이죠. 조너스가 대항한 것은 커뮤니티의 유토피아가 아닌, 감정의 제거가 만들어낸 유토피아 속의 디스토피아적 면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인 셈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되찾은 조너스에게 이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감정을 가진 이후 느끼게된 피오나(오데야 러쉬)와의 사랑과 그녀의 안전이 조너스에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커뮤니티가 인간의 감정을 없애며 긍극적인 유토피아를 완성했다고 해도 조너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결국 커뮤니티라는 한 조직의 거대한 이상향은 개인의 행복에 의해 무너집니다. 아무리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라고 할지라도 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곳은 디스토피아가 되는 것이죠. 조너스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입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설정입니다.
유토피아는 결국 내 자신이 행복한 세상이다.
기억전달자는 커뮤니티라는 유토피아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행한 이유는 그가 기억,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딸인 로즈메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수석원로는 기억전달자에게 "로즈메리 사건이후 변했다."며 기억전달자를 힐책합니다. 로즈메리를 잃은 기억전달자에게 커뮤니티의 유토피아는 오히려 디스토피아가 됩니다.
[더 기버 : 기억잔달자]를 보며 커뮤니티와 같은 유토피아의 세상이라면 인간의 감정 따위는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도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룰 수도 없으며, 나와 사랑하는 이의 결실인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환희의 순간도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을 진정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유토피아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커뮤니티가 이루어 놓은 유토피아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제거한 세상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데 유토피아가 무슨 소용일까요? [더 기버 : 기억전달자]의 설정이 흥미로운 것은 유토피아와 행복이라는 두 단어를 분리시킨 세계관을 완성해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아닌, 행복이 제거된 유토피아라니... 막연히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제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감정을 제거해서 이룩한 커뮤니티의 유토피아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거나, 행복한 사람들을 봤기에 자기 자신의 불행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불행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행복을 없애야하는 것이죠. 커뮤니티는 그렇기에 인간의 감정을 제거해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불행을 차단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인간다운 감정을 가진 이상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유토피아라면 모를까... [더 기버 : 기억전달자]를 보고나서야 저는 유토피아의 사전적 의미인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행복한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언제나 행복한 미래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소소한 것들에 행복을 느낀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조너스로 인하여 무너진 커뮤니티는 이제 인간의 감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쩌면 그로인하여 불행한 사람도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은 "예전이 좋았어."라며 조너스를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너스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지켜냈으니 조너스의 진정한 유토피아는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입니다.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이렇게 커뮤니티라는 유토피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이룩한 한 소년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유토피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만의 유토피아는 의외로 쉽다.
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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