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 각각의 의미와 개성을 갖춘 세개의 단편.

쭈니-1 2014. 8. 25. 15:55

 

 

감독 : 안재훈, 한혜진

더빙 : 기영도, 엄상현, 박영재, 이종혁, 남성일, 장광, 류현경

개봉 : 2014년 8월 21일

관람 : 2014년 8월 23일

등급 : 전체 관람가

 

 

쭈니의 운수 없는

 

8월 23일 토요일은 회사 낚시 동호회에서 광어 낚시를 가기로 한 날입니다. 토요일 새벽 2시에 회사에서 출발 예정이었기에 새벽 1시에는 일어나 준비를 해야합니다. 이렇게 낚시가 예정된 날의 전날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낚시라는 것이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꽤 큽니다. 그런데 잠을 제대로 못자고 낚시를 나섰다가는 낚시도중 꾸벅꾸벅 졸게 될것이고, 그런 날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결국 금요일 저녁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심코 보기 시작한 프로야구 중계였습니다. 제가 응원하는 두산 베어스가 삼성 라이온즈에게 4대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 저는 두산의 마무리 이용찬이 깔끔하게 9회를 마무리짓는 것을 보고 기분좋게 잠자리에 들으려했습니다. 하지만 이용찬은 등판하자마자 동점 솔로홈런을 맞고 말았습니다.

동점 솔로 홈런이 나오자마자 저는 TV를 껐습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잠을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올시즌 두산 베어스의 병맛 경기력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거의 2시간 가까이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잠들기를 포기한 저는 동네 편의점에 가서 고카페인 음료를 잔뜩 사왔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다면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려야 했기에 단숨에 커피와 고카페인 음료를 연달아 마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촛점없는 눈으로 멍하니 TV를 바라보며 새벽 1시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씻으러 일어나는 그 순간 제 핸드폰에 온 메시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엔진 고장으로 낚시배가 뜰 수 없다는 선장의 문자 메시지였습니다. 다시말해 토요일 광어 낚시가 취소된 것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우리가 타고갈 낚시배의 엔진이 고장났다고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낚시 동호회의 다른 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취소를 공지했습니다. 그러고나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커피와 고카페인 음료를 마신 탓에 머리는 멍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두산 베어스의 어이없는 경기력과 낚시배의 어이없는 취소 소식까지... 저는 화가나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늦은 시각에 밖으로 나가 술한잔 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저는 금요일 밤과 토요일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나서야 토요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 - 아름다운 화면, 하지만 지루하다.

 

만약 토요일을 집에서 보냈다면 저는 토요일 내내 뒤늦게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종일 꾸벅 꾸벅 졸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여름방학 막바지를 보내고 있는 웅이는 "아빠, 그만 자고 놀아주세요."라고 조를 것이고, 저는 졸음에 못이겨 "방학 숙제 다했어? 방학 숙제 다했으면 그만 놀고 공부해!"라며 웅이에게 버럭 화를 낸 후 낮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토요일은 집에서 보내지 말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예매했습니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비록 집 근처 극장에서 상영하지는 않았지만, 예정에도 없던 바깥 나들이로는 영화만큼 안성마춤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된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우리나라의 현대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는 의미에 충실한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세개의 단편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이효석 작가의 단편을 원작으로한 [메밀꽃 필 무렵]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 작가의 고향이기도한 봉평을 배경으로 한 서정적인 단편 소설입니다.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돌뱅이 허생원(기영도)이 젊은 장돌뱅이 동이(엄상현)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동이를 통해 젊은 시절 하룻밤 사랑을 나눈 어떤 처녀와의 사랑을 회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일 것이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 소설입니다.

 

이렇게 이효석 작가의 단편을 원작으로한 [메밀꽃 필 무렵]은 장단점이 뚜렷한 영화입니다. 우선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 속의 캐릭터들의 대사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영화가 원작에 충실했기 때문인데, 원작 소설의 대사 하나까지 영화에 고스란히 옮겨놓다보니 영화 속 캐릭터와 관객간의 소통에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죠.

<메밀꽃 필 무렵>은 1936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무려 7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이 소설을 원작 그대로를 어린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한다면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학생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대에 맞게 재각색 작업이 필요한 것이죠. 소설도 그러할진데, 영화는 더욱 더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은 이해가 안되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장면이 지나가버리면 끝이기 때문이죠.

솔직히 저 역시도 [메밀꽃 필 무렵]의 캐릭터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그저 영화 속의 분위기, 내가 알고 있는 내용들을 대충 대입해서 영화를 이해한 것이죠. 원작의 사투리 섞인 구어체를 영화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이 영화는 그렇기에 의미는 있지만, 대신 재미는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점 또한 있습니다. 원작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달밤의 메밀밭의 풍경을 이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잡아냈다는 점입니다. 10년 전쯤 봉평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저는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며 10년 전 그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봄봄] - 해학적 재미가 가득하다.

 

사실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며 저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봉평의 메밀밭을 영상화한 이 영화의 영상미는 충분히 박수받을만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린 관객들에게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진수를 보여는 것이 목표라면 좀 더 어린 관객들이 영화를 즐길 수 있게끔 캐릭터들의 대사를 현대에 맞게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만약 나머지 영화들인 [봄봄], [운수 좋은 날]도 이런 식이라면 저는 전날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영화를 보는 도중 졸아버릴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메밀꽃 필 무렵]에 이어 상영한 [봄봄]은 제 피곤함을 싹 가시게할 만큼 유쾌했습니다.

김유정 작가의 <봄봄>은 1935년 발표된 단편 소설로 3년이 넘도록 점순이와 혼인하기 위하여 돈 한푼 안받고 데릴 사위로서 머슴 노릇을 하고 있는 봉필이라는 순진하고 우직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봉필은 장인에게 성례를 시켜달라고 조르지만 고약한 장인은 점순의 키가 작다는 이유로 번번히 성례를 뒤로 미룹니다.

원작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영화 [봄봄]은 그러한 점을 착안하여 판소리를 영화에 접목시킵니다. 점순의 키가 자라지 않아 답답해하면서도 머슴처럼 부려먹는 장인(이종혁)에게 번번히 당하는 봉필(박영재)의 심정은 남상일의 판소리로 해학넘치게 그려지는데, 영화를 보며 몇번이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담장 너머로 물 항아리를 이고 지나가는 점순과 그 앞의 강아지를 통해,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어미 개가 되지만 점순의 키는 그대로인 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재치넘치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점순의 부추김에 봉필은 장인에게 대들고, 그로인하여 봉필과 장인이 한바탕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에서 저는 결국 박장대소를 터트렸습니다. (같은 남자로써 웃으면서도 고통에 공감했던...) 그리고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던 점순이 장인의 편에 서자 점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봉필의 모습에서는 봉필의 억울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봉필군... 여자란 원래 남자가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동물이라네!"라고 진심으로 봉필에게 충고를 해주고 싶었답니다.

[봄봄]은 분명 [메밀꽃 필 무렵]과 비교해서 영화적 재미가 넘쳐납니다. 원작의 구어체를 고스란히 재현한 [메밀꽃 필 무렵]의 당혹스러움과는 달리 [봄봄]은 원작을 재치있게 판소리로 각색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어린 관객들에게도 흥겨움을 안겨줬습니다. 

하지만 [봄봄]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봉평의 달빛어린 메밀밭과 [운수 좋은 날]에서 1920년대 당시 서울의 모습을 재현한 인상적인 야경이 제 눈을 사로잡은데 반에 [봄봄]에서는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영상미와는 별도로 영화적 재미는 세개의 단편중 가장 뛰어났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운수 좋은 날] - 서글프면서 화가 났던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

 

마지막 [운수 좋은 날]은 1924년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화면이 돋보였던 [메밀꽃 필 무렵], 동화적이고 해학적이었던 [봄봄]과는 달리 [운수 좋은 날]의 화면은 시작부터 어두침침합니다. 그리고 캐릭터 묘사 역시 사실적인데 이는 [운수 좋은 날]에 담겨진 주제 때문일 것입니다.

웅이가 유일하게 읽었다는 [운수 좋은 날]은 어느 인력거꾼의 슬픈 하루를 담고 있습니다. 인력거를 끌고 하루종일 뛰어다녀도 하루 밥벌이하기 힘든 김첨지(장광). 그는 아픈 아내(류현경)을 뒤로 하고 비오는 날 인력거를 끌고 거리에 나섭니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은 운수가 너무 좋아 평소와는 달리 많은 돈을 법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운수 좋은 날]을 보며 마음 속으로 김첨지를 욕했습니다. 아픈 아내에게 약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했고, 굶주림에 생쌀을 먹는 아내에게 판잔만 줍니다. 오늘은 내가 너무 아프니 일 나가지 말아달라는 아내의 애원을 뿌리쳤고, 일이 끝나고나서도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돈을 흥청망청씁니다.

"오늘은 설렁탕이 먹고 싶네요."라던 김첨지 아내의 슬픈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려서 막걸리를 마시며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김첨지에게 너무나도 화가 났던 것입니다. 빨리 집에 돌아가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 설렁탕이라도 입에 넣어주면 좋으련만... 김첨지는 집에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아내를 안고 울부짖는 김첨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어쩌면 김첨지는 아내의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집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죠.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에 제대로된 치료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막걸리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술주정을 부립니다.

[운수 좋은 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한평생 미싱을 잡으셨던 아버지. 넉하지 못한 살림이었기에 어머니도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텅빈 집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일을 시켜야하는 아버지의 무능력을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저 역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그제서야 저희 삼남매를 짊어진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은 그렇기에 아들로써, 그리고 같은 아버지로써 김첨지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안쓰러운 영화였습니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이렇게 개성이 강한 세개의 단편을 한데 묶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영상이 아름다웠고, [봄봄]은 해학이 돋보였으며, [운수 좋은 날]은 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서글펐습니다. 이 세가지 단편이 한데 선보인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어쩌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과연 어린 관객들도 이 영화가 재미있었을까요? 그것은 이 영화 제작진의 마지막 숙제입니다.

 

이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좋은 영상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은 필독 도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었다면

영화만큼은 '좋은 영상물'이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봐야하는 영화가 아닌

재미있어서 자발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영화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