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안녕, 헤이즐] - 죽음을 이겨낸 사랑의 행복

쭈니-1 2014. 8. 21. 15:11

 

 

감독 : 조쉬 분

주연 : 쉐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 냇 울프, 로라 던, 윌렘 데포

개봉 : 2014년 8월 13일

관람 : 2014년 8월 20일

등급 : 12세 관람가

 

 

[해무]의 충격을 빨리 벗어던지고 싶었다.

 

지난 월요일 밤, 거의 텅빈 극장에서 혼자 관람한 [해무]는 제겐 여러모로 충격적인 영화였습니다. [해무]가 인간군상의 잔인한 면을 건드리는 영화일줄은 알고 있었지만, 떼죽음도 모자라 시체 토막 장면까지 나올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게다가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보는 제게 폐쇄된 공간에서 점점 잔인하게 변해가는 캐릭터들을 지켜보는 것은 제가 그 현장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켜 저를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습니다.

[해무]를 본 후 자정이 넘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혼자 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구피가 묻습니다. "그래서, [해무]는 어떤 내용이야." 구피는 제가 영화의 내용을 이야기해주면 그것을 자장가삼아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에 들곤 합니다. 하지만 [해무]만큼은 구피에게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자장가삼아 해주기엔 너무 잔인한 이야기였고, 저 또한 [해무]의 내용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해무]를 본 후 잠자리에 들었던 그 날밤, 저는 악몽을 꿨습니다.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꿈에서 깨고 나서도 굉장히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서 빨리 [해무]의 충격에서 벗어나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영화로부터 얻은 충격은 영화로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해무]의 충격을 지울 수 있는 밝은 기운의 영화가 제겐 당장 필요했습니다.

 

제가 [해무]의 충격을 씻어내는데 있어서 [안녕, 헤이즐]을 선택한 것은 영화의 포스터, 예고편에서 보여줬던 쉐일린 우들리와 안셀 엘고트의 풋풋한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 사랑을 시작했고, 그 사랑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제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긍정의 에너지였던 것입니다.

물론 [비긴 어게인]도 후보작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음악이죠. [원스]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얻어낸 존 카니 감독이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등 할리우드 스타를 캐스팅하여 자신의 장기인 음악 영화를 선보인 것입니다. 충격을 해소하는데 있어서 음악만큼 좋은 것은 없기에 [비긴 어게인]도 마지막까지 [안녕, 헤이즐]과 경합을 벌였습니다.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왈제네거 등 왕년의 액션 히어로들을 한데 묶어놓은 [익스펜더블 3]도 후보작이었습니다. 형님들의 시원시원한 액션을 한바탕 보고나면 [해무]로 인한 충격 따위는 깡그리 날려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감미로운 음악도, 형님들의 한바탕 액션도 젊고 풋풋한 사랑의 에너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비긴 어게인]과 [익스펜더블 3]를 제쳐두고 [안녕, 헤이즐]을 선택한 제게 유일한 장애물은 극장안을 가득 채울 것으로 예상되는 닭살 커플들 사이에서 40대 중년 아저씨인 저 혼자 이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를 감상해야 한다는 점 뿐이었습니다. 

 

 

시한부 청춘들, 사랑에 빠지다.

 

[안녕, 헤이즐]을 간단하게 설명하라고 한다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소녀 헤이즐(쉐일린 우들리)과 소년 의 거스(안셀 엘고트)의 풋풋하면서도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헤이즐과 거스가 암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사랑에서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도 그저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안녕, 헤이즐]은 특별합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랑은 영화의 소재로 흔하지만, 헤이즐과 거스처럼 죽음을 앞두고도 긍정의 에너지로 사랑을 이어나가는 커플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 환자 모임에서 처음 만난 헤이즐과 거스.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헤이즐과 암으로 인하여 다리 한쪽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당당한 거스는 밀당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사랑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여느 젊은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풋풋하게 데이트를 즐깁니다. 단지 헤이즐은 산소통을 캐리어처럼 끌고 호흡기를 생명줄처럼 차고 다녀야 한다는 점과 바지를 걷으면 거스의 한쪽 다리가 없다는 사실만 다를 뿐입니다. [안녕, 헤이즐]이 더욱 특별한 것은 그들의 남들과 다른 점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분명 헤이즐과 거스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고, 그러한 점을 이용한다면 [안녕, 헤이즐]은 영화 내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녕, 헤이즐]은 그런 뻔한 최루성 멜로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그저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을 평범한 젊은 커플의 사랑 이야기처럼 밝게 그려나갈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안녕, 헤이즐]이 특별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헤이즐과 거스가 평범한 젊은 남녀처럼 풋풋한 사랑을 이어나간다고해도 그들은 여전히 시한부 인생을 사는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안녕, 헤이즐]은 그들의 사랑을 평범하게 꾸며 놓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안녕, 헤이즐]은 헤이즐과 거스에게 불어닥칠 슬픈 운명을 후반부에 서서히 드러냅니다. 그 시작점은 헤이즐이 존경하는 작가 피터 반 하우튼(윌렘 데포)을 만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가면서부터입니다. 피터 반 하우튼은 예의없는 말과 행동으로 헤이즐과 거스에게 분노와 실망, 상처를 주지만, 암스테르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피터 반 하우튼과의 만남이 아닌 피터 반 하우튼의 비서 리더바이(로테 베르빅)가 안내한 안네 프랑크의 집입니다.  

학창시절 필독도서였던 <안네의 일기>를 남기고 1945년 3월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서 언니 마고트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열여섯의 나이에 사망한 안네 프랑크. 그녀는 죽음이 도사리는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2년이 넘는 기간동안 여느 소녀처럼 예쁘고, 발랄하면서도 그 시대에 유대인이 겪어야했던 아픔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어쩌면 안네와 헤이즐은 비슷한 처지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음과 맞서 싸워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예쁘고, 발랄한 모습을 감추지 않은... 폐가 좋지 않은 헤이즐이 계단이 많은 안네 프랑크의 집에 끝까지 올라가는 것은 헤이즐 역시 안네 프랑크의 삶에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안네 프랑크가 살던 다락방에서 거스에게 키스를 함으로써 그동안 죽음이 두려워 조심스러웠던 거스와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펼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은 후반부의 눈물이 되어 관객에게 되돌아옵니다.

 

 

헤이즐이 피터 반 하우튼의 <거대한 아픔> 결말에 집착하는 이유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헤이즐. 그녀는 유독 암스테르담에 칩거중인 괴짜 소설가 피터 반 하우튼의 <거대한 아픔>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에 집착합니다. <거대한 아픔>은 병으로 죽은 소녀와 그녀의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헤이즐이 집착하는 것은 주인공이 죽은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입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헤이즐과 거스는 암스테르담으로 피터 반 하우튼을 만나러 갑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술에 쩔어 있는 피터 반 하우튼에게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헤이즐과 거스의 암스테르담 여행은 안네 프랑크의 집 방문으로 바뀝니다. 그곳에서 안네의 생애를 직접 눈으로 체험한 헤이즐은 거스에게 과감하게 키스를 함으로써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왜 헤이즐은 <거대한 아픔>의 결말에 집착한 것일까요? 죽음을 무릅쓰고 암스테르담까지 작가를 찾아갈 정도로... 그저 <거대한 아픔>이 너무 좋아서? 10대 소녀의 호기심 때문에?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답은 [안녕, 헤이즐]에서 여러번 플래쉬백으로 소개한 암 발병으로 죽음을 앞둔 13살 헤이즐의 기억에 있습니다.

헤이즐의 어머니(로라 던)는 죽음을 앞둔 헤이즐 앞에서 "이제 누가 나에게 엄마라고 불러주지?"라며 남편에게 안겨 흐느낍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헤이즐은 죽음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헤이즐은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헤이즐, 그녀는 그로인하여 사랑하는 어머니가 평생 슬퍼할 것이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헤이즐이 <거대한 아픔>의 남겨진 가족들의 뒷이야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의 가족들 또한 <거대한 아픔>의 주인공 가족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아픔>의 작가인 피터 반 하우튼 역시 병으로 어린 딸을 먼저 저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거대한 아픔> 속에 표현했습니다. 피터 반 하우튼의 그러한 생생한 경험담이 소설 속에 녹아 있기에 헤이즐이 더욱도 <거대한 아픔>를 좋아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아픔>을 쓴 이후에도 피터 반 하우튼은 딸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폐인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망치고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술에 취해 헤이즐에게 상처를 안겨줬던 피터 반 하우튼. 그는 영화의 후반, 말끔하게 차려 있고, 다시금 헤이즐 앞에 섭니다. 하지만 그녀는 피터 반 하우튼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가 병으로 어린 딸을 잃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 차에서 내려요!"라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녀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딸의 죽음 이후 폐인이 되어 버린 피터 반 하우튼의 모습을...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자신의 죽음 이후 피터 반 하우튼처럼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헤이즐의 어머니는 이야기합니다. "네가 죽으면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겠지만, 그래도 살아가겠지." 헤이즐의 어머니는 사회복지사 수업을 듣고 있었고, 언젠가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가며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말을 들은 후에야 헤이즐은 밝은 미소를 짓습니다. 헤이즐은 자신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먼저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헤이즐이 <거대한 아픔>의 결말에 집착한 이유이며, 마지막까지 피터 반 하우튼을 용서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망각을 두려워한 거스

 

자신의 죽음보다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질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걱정한 속깊은 헤이즐. 그녀와는 달리 거스는 처음부터 굉장히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망각입니다. 그는 암 환자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거스는 암으로 인하여 잘려 나간 자신의 다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두 눈을 잃은 친구인 이삭(냇 울프)이 영원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괴로워할 때도 헤이즐, 이삭과 함께 그녀의 차에 계란을 던지며 아주 당당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비록 셋이 합쳐 다리 다섯, 눈 넷, 폐는 2개 반이지만, 우리에겐 계란이 있다."라고요.

거스는 담배를 물고 다닙니다. 하지만 결코 불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거스는 말합니다. "이건 아주 상징적인 거야. 담배는 날 죽일 힘이 있지만, 불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난 담배에게 날 죽일 힘을 허용하지 않는거지." 그의 그러한 당당한 모습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전화기 넘어 그가 "헤이즐 그레이스"라며 이름을 부를 땐 같은 남자지만 굉장히 멋지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까요.

그런 그가 고작 남에게 잊혀질 것을 두려워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거스에게 헤이즐은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잊혀진다고... 하지만 내가 널 영원히 기억하니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고... 망각이 두렵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일입니다. 자신이 죽었는데 남들이 자신을 기억하건, 잊어버리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결국 거스가 두려워한 것은 망각이 아닌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당당하게 행동했지만, 영화 후반, 죽음 앞에 노출된 그는 어린애처럼 울며 두려움에 떱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안녕, 헤이즐]은 평범한 영화입니다. 죽음을 앞둔 연인들의 슬픈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대신 여느 젊은 연인들처럼 평범하게 흘러갈 뿐입니다.

하지만 [안녕, 헤이즐]은 특별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헤이즐과 거스는 죽음을 앞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평범하게 행동합니다. 그 자체가 특별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가 죽음을 앞둔 헤이즐과 거스의 이야기를 등한시한 것도 아닙니다.

<거대한 아픔>의 결말에 집착하는 헤이즐을 통해 자신이 죽은 이후 남겨질 가족들을 걱정하는 헤이즐의 속 깊은 마음을 드러냈고, 망각을 두려워하는 거스를 통해 겉으론 담담한척 하지만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불쌍한 청춘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결국 저는 영화의 후반부에 주루륵 주루륵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너무 예뻤고,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헤이즐과 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깟 죽음 따위로는 이길 수 없는 사랑의 행복을 얼굴에 한가득 묻혀 놓았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전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는 슬픔을 감동으로 포장하는 거예요. 감미로운 노래를 결들여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구요.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그런 버전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죠." 영화 오프닝, 헤이즐의 나래이션입니다. 그러한 나래이션처럼 [안녕, 헤이즐]은 슬픔을 감동으로 포장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청춘 멜로 영화처럼 이끌어나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이 진솔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나니 [해무]의 충격은 어느 사이 잊어버렸습니다. 역시 [해무]에 담긴 잔인한 죽음의 충격을 [안녕, 헤이즐]에 담긴 사랑의 행복으로 이겨내려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오케이 헤이즐... 고마워!!!" 

 

사춘기 시절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랑을 꿈꾼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사랑도, 행복도, 살아야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비록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은 짧았지만,

후회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강렬했기에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