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심성보
주연 :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이희준, 문성근, 김상호, 유승목
개봉 : 2014년 8월 13일
관람 : 2014년 8월 18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빅4중 남은 영화는 [해무]뿐이다.
올 여름을 지배한 한국영화 빅4중 마지막 영화인 [해무]를 드디어 보고 왔습니다. [군도 :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을 굉장히 만족스럽게 관람한 저는 마지막 주자인 [해무]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해무]에 막연히 기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비록 감독은 아니지만 봉준호 감독이 제작과 기획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등으로 흥행성과 작품성을 한꺼번에 움켜쥔 국내에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명입니다. 그가 제작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무]는 제게 충분히 기대할만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카리스마 연기의 대가인 김윤석이 주연을 맡았고, 믿음직한 중견 배우 문성근과 김상호, 여기에 개성강한 젊은 배우 한예리, 이희준이 뒤를 받치고 있다는 점도 [해무]를 기대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배우보다는 아직은 아이돌 가수 이미지가 강한 박유천이 김윤석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점이 약간은 불안했지만, 영화 개봉 이후 박유천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해무]를 즐기는데 큰 걸림돌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비록 [해무]가 개봉하자마자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달려가지는 않았지만, 지난 월요일 밤에 내리는 빗속을 해치고 극장으로 가는 제 마음은 드디어 [해무]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포 영화를 보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0년 전부터 갑자기 공포 영화가 싫어졌습니다. 특히 공포 영화를 보고나면 그날 밤에는 어김없이 악몽을 꿔서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공포 영화는 의도적으로 안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런 제게 여름 극장가는 공포 영화가 많이 개봉하기에 영화 선택에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결국 무더위가 한풀 꺾인 상황에서 "올해도 공포 영화를 모두 피하고 무사히 여름을 보냈구나!" 라며 안도하던 순간 [해무]를 본 것입니다.
물론 압니다. [해무]는 공포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해무]를 보는 내내 등골이 오싹해졌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영화가 끝난 후에는 온 몸에서 기운이 쫘악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악몽을 꾼 것은 당연했습니다. 잠시 방심한 순간 제게 올해 최악의 공포를 안겨준 [해무]. 영화를 보고나서 들었던 첫번째 생각은... "이 영화를 통해서 나는 오늘 악마를 보았다."였습니다.
'전진호'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해무]의 주무대는 한때 여수를 주름잡던 고깃배 '전진호'입니다. [해무]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전진호' 선원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줍니다. 배에서 밥도 해먹고, 빨래도 하고, TV를 보며 여가 생활도 하고, 잠도 자는... 말 그대로 '전진호'는 그들에게 또 하나의 세상인 것입니다.
'전진호'에는 여섯명의 선원이 있습니다. 선장인 철주(김윤석)는 '전진호'를 그 누구보다 아낍니다. 기관장인 완호(문성근)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배에서 숨어 사는 신세이고, 선장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묵묵히 따르는 갑판장 호영(김상호)과 거친 성격의 롤러수 경구(유승목), 그리고 어디서든 욕구에 충실한 선원 창욱(이희준)과 막내 동식(박유천)이 '전진호'의 선원들입니다. 이들은 '전진호' 안에서 만큼은 서로의 가족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IMF가 불어닥치고 '전진호'를 잃을 위기에 처한 철주가 '전진호'를 지키기 위해서 밀항자를 태워 나르는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철주에게 '전진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전진호'가 아니면 갈 곳이 없는 다른 선원들 역시 철주의 선택에 큰 불만을 내뱉지 않습니다. 그렇게 '전진호'는 불행을 향하여 마지막 항해를 나선 것입니다.
[해무]는 아주 천천히 영화를 진행시킵니다. IMF라는 시대적 상황, '전진호'를 잃을 위기에 처한 철주와 선원들의 캐릭터 등을 [해무]는 서두르지 않고 완성해냅니다. 그 중 다방 종업원을 '전진호'에 불러 들여 재미를 보려는 경구와 그런 경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찌질한 면을 선보이는 창욱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의 초반은 밀항자가 '전진호'에 타는 중반을 거쳐, 후반에 이르러서는 살벌한 살육전을 위한 세밀한 장치가 됩니다.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완호, 선장의 충실한 부하 호영, 그리고 경구와 창욱의 우스꽝스러운 욕구마저 영화 후반에는 공포로 돌변합니다. 그들은 바다위 '전진호'라는 또 다른 세상에서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악마가 된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해무]의 정보를 전혀 모르고 영화를 본 것은 아닙니다.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영화의 줄거리에서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해무가 몰려오고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라며 [해무]를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무]의 후반부는 제가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초반의 캐릭터 구축, 중반의 분위기 고조, 그리고 결국 후반에 제 예상을 뛰어넘는 최악의 공포를 선사하는 [해무]는 그렇기에 제겐 끔찍한 공포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스포 포함)
집착이 낳은 비극
[해무]는 '전진호'라는 작은 세상에 상상하기도 끔찍한 비극을 안겨줍니다. 이러한 비극의 시작은 예기치 못한 작은 사고였지만, 비극을 점점 키운 것은 섬뜩한 집착이었습니다.
'전진호'의 비극은 밀항자들이 해경을 피해 어창에 몸을 숨겼다가 냉각기 고장으로 새어나온 가스로 인하여 모두 목숨을 잃으면서부터입니다. '전진호'의 비극이 밀항자 한 두명의 죽음일 것이라 생각했던 저는 밀항자들의 떼죽음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질 일에 비한다면 밀항자들의 떼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 밀항자들의 떼죽음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때 하필 돈냄새를 맡은 부패한 해경 김계장(윤제문)이 '전진호'를 찾았고, 그때 하필 냉각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가스가 어창에 새어 들어간 것입니다. 철주는 그저 밀항자들을 실어 나르면 될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불가항력적인 비극으로 인하여 밀항자들의 떼죽음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철주의 행동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밀항자들의 떼죽음만으로도 저는 깜짝 놀랐는데, 밀항자들의 시체를 토막내서 바다로 내던지라는 철주의 한마디는 제 마음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잔인한 장면들을 걸러서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무]의 잔인함은 장면이 아닌 캐릭터들의 무서운 집착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다고 해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셈입니다. 사실 후반부터 짙게 깔린 '해무'(海霧 : 바다 안개) 덕분(?)에 영화의 잔인한 장면은 상당 부분 걸러졌습니다. 그러나 캐릭터들의 잔인한 집착은 결코 걸러지지 않았습니다.
철주는 '전진호'를 지켜야한다는 집착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집착은 밀항자를 태우는 선택을 하게 되고, 밀항자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당하자 밀항자들을 토막내서 바다에 던지려 합니다. 그러다가 밀항자 중에서 살아남은 한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살인을 저지르려 합니다. '전진호'를 지키겠다는 그의 집착은 그를 점점 잔인한 범죄자로 만듭니다.
여기에 호영은 앞뒤 안가리고 철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집착을 가지고 있고, 경구는 이 와중에서도 돈을 챙기는 대단한 집착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가장 섬뜩했던 것은 섹스를 향한 창욱의 집착입니다. 영화의 초반 창욱의 그러한 모습은 찌질하고 우스꽝스러웠는데, 영화의 후반, 이 상황에서도 섹스에 집착하는 창욱의 모습은 그 어떤 싸이코 살인마보다 섬뜩했습니다.
동식(박유천)과 밀항자인 홍매(한예리)를 서서히 조여오는 철주를 비롯한 '전진호' 선원들의 무서운 집착. 이는 마치 내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미치광이가 되어 내게 칼을 겨누는 상황처럼 느껴졌습니다. '전진호'라는 작은 세상은 그렇게 지옥의 현장이 됩니다.
침몰하는 그들의 집착
사실 섬뜩한 집착은 동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홍매에 대한 집착은 처음엔 순수한 사랑처럼 보였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철주를 비롯한 '전진호'의 다른 선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가 가족과도 같았던 선원들을 하나씩 죽이는 장면은 그렇기에 주인공의 활약에 의한 쾌감, 혹은 안도감 대신 잔인함만을 안겨줍니다.
또 다른 세상 '전진호'는 지옥이 되고, 또 다른 가족 선원들은 악마가 됩니다. 그들은 별것 아닌 집착에 사로잡혀 흉기를 휘두르는 끔찍한 범죄자가 됩니다. 그러한 지옥의 현장과 악마의 모습을 1시간 가까이 지켜보고 있으려니 제 몸은 딱딱하게 굳어만 갔습니다.
결국 집착이 만들어낸 악마는 '전진호'와 함께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지옥으로부터, 악마로부터 살아남은 동식과 홍매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 따뜻한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IMF 시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세상은 그들에겐 또 다른 지옥이었으니까요.
[해무]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해버린 동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사 현장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동식. 그의 모습에서 6년 전의 풋풋함, 혹은 홍매를 집에 보내겠다는 집착 따위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촛점없는 눈동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옥을 벗어나 더 큰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식의 모습이 [해무]를 보던 제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해무]는 제7 태창호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입니다. 제7 태창호 사건은 2001년 10월, 중국인 49명, 조선족 11명이 태창호에 숨어 2001년 10월 전라남도 여수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사건입니다. 밀입국 과정에서 탑승객 일부가 질식사하자 선장과 선원들이 사망한 26명을 바다에 버렸다는 사실이 알졌습니다. 그러한 제7 태창호 사건은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연극은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심성보 감독과 봉준호 감독은 연극 <해무>의 그 어떤 부분에 매료되어 제작비 100억이 넘는 블록버스터로 만들게 된 것일까요? 어쩌면 IMF라는 영화의 배경, 바다 위의 배라는 폐쇄된 공간의 공포, 집착에 의한 인간의 악마성이 실화를 연극으로, 연극을 영화로 재탄생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제가 유독 [해무]에 공포를 느낀 것도 그러한 것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맞이한 IMF라는 암울한 시절의 기억. 침몰하는 대한민국호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아둥바둥거리던 내 모습. 당시 저는 방문판매 회사에 취업하여 출산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유아교육과 대학생이라고 제 신분을 속이며 값비싼 (하지만 질 떨어지는) 유아 도서를 팔고 다녔습니다. 비록 단 1건의 판매 실적을 남기고 3개월 만에 그 일을 그만뒀지만, 당시의 저는 돈을 벌기 위해 남을 속였던 감추고 싶은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해무]는 극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악마가 되어가는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을 들춰낸 영화입니다. 어쩌면 그 속에서 저는 15년 전 잊고 싶었던 제 모습을 봤고, 그것이 [해무]를 보며 고개를 돌리고 싶었던 공포의 근원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해무]는 제겐 너무나도 끔찍한 공포 영화였습니다.
내가 만약 '전진호' 선원이라면...
나는 과연 선장의 명령에 불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완호처럼 미처 버리거나,
창욱처럼 이상한 집착으로 내 눈을 가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내 모습을 깨닫는 그 순간 [해무]의 진짜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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