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범구
주연 : 정우성, 이범수, 안성기, 김인권, 이시영, 안길강, 최진혁, 이도경
개봉 : 2014년 7월 3일
관람 : 2014년 7월 7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관객의 눈은 언제나 정확하다.
솔직히 [신의 한수]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런 영화, 이젠 조금 피곤하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들어서 개봉하는 한국영화들은 대부분 남자들의 거친 액션을 주요 소재로 내세우고 있고, 그러한 영화들을 반복적으로 보고나니 정우성의 액션을 내세운 [신의 한수]또한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바둑을 소재로한 영화는 이미 몇 주전에 개봉한 [스톤]이 있었기에 [신의 한수]의 소재 또한 전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신의 한수]가 정면으로 맞대결해야 하는 영화는 개봉했다하면 기본으로 700만 관객은 깔고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시리즈인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이기에 저는 [신의 한수]가 흥행 부진을 겪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은 틀렸습니다. 의외로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의 흥행력이 이전 시리즈와 비교해서 그다지 막강하지 않았고, 그 틈을 타서 [신의 한수]는 목, 금요일에 일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등 기대 이상의 흥행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하여 [신의 한수]에 대해서 '이런 영화, 이젠 조금 피곤하다.'라고 생각했던 저는 '어랏! 이 영화 봐라. 그렇게 재미있나?'라는 호기심을 바뀌었습니다.
목요일과, 일요일에 [신의 한수]를 예매했다가 이런 저런 핑계로 예매를 취소한 이유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영화, 이젠 조금 피곤하다.'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 주말 박스오피스를 확인한 후 제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비록 [신의 한수]는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에 이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와의 격차가 겨우 3만5천명 밖에 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지난 주말 실질적인 박스오피스 승자는 [신의 한수]였습니다.
[신의 한수]의 의외에 흥행 돌풍에 저는 뒤늦게 예매를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예매를 취소하지 않고 월요일 밤, [신의 한수]를 보고 왔습니다. 그렇게 [신의 한수]를 보고나서 들었던 첫 생각은 '관객의 눈은 언제나 정확하다.'라는 점입니다. 지난 6월 17일에 이민기와 박성웅을 내세운 거친 남자들의 느와르 [황제를 위하여]을 봤을 때는 그다지 영화적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지만, [신의 한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관람했습니다. 관객이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가 아닌 [신의 한수]를 선택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둑을 둘줄 모르기에 [신의 한수]의 영화적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바둑을 둘줄 아는 관객이 좀 더 재미있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의 한수]는 [도둑들]을 연상하게 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와 [아저씨]를 연상하게 하는 멋진 액션의 향연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왜 소재는 바둑이어야 했는가?
[신의 한수]를 보기 전에 읽었던 전문가의 20자평에서 제 눈에 띄었던 것은 '바둑 빙자 잔혹 액션'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영화의 소재만 바둑일 뿐, [신의 한수]는 바둑과 동떨어진 잔혹 액션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액션 영화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바둑을 잘 모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복점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장기를 뒀고, 그 덕분에 저는 어깨 너머로 장기를 배울 수는 있었지만, 바둑은 미처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게 바둑은 흰돌과 검은돌이 땅따먹기를 하는 아주 단순하고 재미없는 게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희 친척 중에서 유일하게 바둑을 둘줄 하는 막내 작은아버지께서는 TV에서 중계해주는 지루한(!) 바둑 경기를 몇 시간이고 집중해서 보십니다. 막내 작은 아버지께 바둑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오락인 셈입니다.
바둑은 그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둑을 모르는 이에겐 바둑만큼 지루한 것도 없지만, 바둑을 아는 이에겐 흰돌과 검은돌이 바둑판 위에 하나씩 놓여질때마다 탄성을 지르고 긴장을 하게 되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심오하면서도 재미있는 오락인 것입니다. [신의 한수]는 바로 그러한 바둑의 이중성을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신의 한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바둑이라는 신선 놀음에 푹 빠진 이들 뿐입니다. 그들은 마치 저희 막내 작은아버지께서 바둑 중계를 보실때 무아지경에 빠지시는 것처럼, 바둑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다는 듯 모든 것을 바둑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살수(이범수)가 돈을 원했다면 굳이 내기 바둑이 아닌 다른 불법적인 사업으로 돈을 끌어 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마약이 되었건, 도박이 되었건, 내기 바둑보다 돈을 벌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수는 배꼽(이시영)을 이용하고 중국에서 바둑 천재인 량량(안서현)을 인신매매하면서까지 굳이 내기 바둑 사업에 몰두합니다.
태석(정우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살수(이범수)에게 복수를 원한다면 감옥에서 만난 조폭 두목(최일화)의 힘을 빌리면 됩니다. 조폭 두목의 조직이라면 살수의 조직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박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석은 굳이 조폭 두목의 돈을 빌리고, 동료들을 끌어 모아 바둑으로 살수에게 복수를 하려합니다.
[신의 한수]의 영화 속 세상은 마치 바둑이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표현됩니다. 누군가 바둑을 신선 놀음이라고 했습니다. 신선들의 바둑을 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는줄 몰랐던 나무꾼의 이야기처럼, [신의 한수]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상과 동떨어진 바둑만이 세상의 모든 것인 타락한 신선들의 세상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태석이 살수의 행동 대원들을 하나씩 죽이고, 살수의 조직과 태석이 피비린내나는 칼부림을 벌여도, 그들을 막는 경찰 한명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태석의 세계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속세와는 전혀 다른 판타지적 세상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신의 한수]가 바둑을 소재로 삼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영화의 소재로 바둑을 선택한 것이 매우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적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법
제가 [신의 한수]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신의 한수]가 기본적으로 액션 장르의 영화이지만, 그러한 액션이 펼쳐지는 공간은 마치 판타지의 공간처럼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살수는 별 의미없는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고, 태석은 복수라는 미명아래 살수의 부하들은 수십명 죽이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닙니다. 마치 타락한 신선들의 세상에서 벌어진 살인은 바둑을 모르는 속세의 사람들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 영화 속의 공간을 판타지의 공간처럼 느꼈기 때문일까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역시 판타지의 캐릭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태석은 아무리 감옥에서 싸움을 배웠다고 하지만, 영화초반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소심남에서 수십명의 조폭들과 멋지게 싸우는 액션 히어로로 단번에 변신합니다.
악역일수록 캐릭터를 부여하는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살수는 판타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절대악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만약 [신의 한수]에서 제가 판타지의 느낌을 받지 못했다면 이러한 태석, 살수의 캐릭터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에 충분히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판타지적 캐릭터로 단순화된 태석, 살수와는 달리 [신의 한수]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배꼽은 불분명한 캐릭터로 설정하며 영화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황제를 위하여]에서 박상준 감독은 영화 속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연수(이태임)를 남성 관객을 위한 눈요기로 소모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상업적인 계산대로라면 적절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황제를 위하여]는 대부분의 관객층이 남성일 것이 분명했고, 그러한 남성을 위한 서비스는 흥행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의 한수]는 배꼽을 전혀 다르게 활용합니다. [신의 한수]역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이고, 관객층도 남성 관객이 대부분일 것을 감안한다면 배꼽이라는 캐릭터를 눈요기로 소모했을 수도 있었지만, 조범구 감독은 그러한 유혹을 떨쳐 냅니다. 그 결과 배꼽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닌, 영화의 결말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키포인트가 됩니다.
배꼽은 어찌보면 태석이 복수를 해야하는 적입니다. 그녀는 살수의 부하이며 그녀의 뛰어난 바둑 실력 때문에 태석의 형(김명수)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태석이 출소한 후 살수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아다리(정해균), 선수(최진혁), 왕사범(이도경)을 차례로 응징할 때, 배꼽 역시 태석의 응징 대상에 끼었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오프닝에서 조범구 감독은 태석 형의 죽음을 목격한 배꼽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며 그녀에게 면죄부를 선사합니다. 다른 살수의 부하들은 태석과 그의 형을 비웃지만, 배꼽만큼은 살수의 잔인한 폭력에 고개를 돌리고 마는 것이죠.
중국에서 인신매매로 살수에게 잡혀온 량량이라는 캐릭터가 굳이 필요했던 것도 어찌보면 배꼽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리고 힘없는 량량. 그렇기에 살수가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는 량량의 모습은 배꼽의 처지와 겹쳐지며 관객마저 배꼽의 편이 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그녀는 살수의 여자였을까요? 태석과 배꼽이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고 분노하는 살수를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는 태석을 사랑했을까요? 마지막 태석과 살수의 바둑 대결에서 대결을 무승부를 이끄는 것을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배꼽은 태석과 살수의 중간 지점에서 그 누구의 편도 아닌 지점에 서있습니다.
그 결과 [신의 한수]는 마지막 승부를 가늠할 수 없는 박진감을 안겨줍니다. 배꼽은 살수의 편이지만, 살수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태석의 편이 되기엔 그와의 관계에 확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태석과 살수의 마지막 대결에서 승부를 가를 수 있는 키를 배꼽이 가지고 있으니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죠.
바로 그러한 점이 [신의 한수]가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법입니다. 굳이 남성 관객을 위한 눈요기가 아닌, 남성 영화에서 부각되는 여성의 외적 나약함과 외적 나약함과는 다른 내적인 강인함을 통해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는 것. 그것이 바로 배꼽이 이 영화의 키포인트로써 갖춘 자격입니다.
현실성이 부족한 액션... 하지만 멋있다!
마지막으로 [신의 한수]는 액션 영화로서도 충분한 영화적 재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액션은 앞서 설명했듯이 현실감은 없습니다. 태석은 싸움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범생이에서 갑자기 몸짱에 싸움짱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가 싸움을 일상으로 하는 살수 일당과 일당백으로 싸우는 장면은 그렇기에 액션적 쾌감은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역시 바둑이라는 판타지 장막이 만들어낸 타락한 신선들의 세상이기에 그러한 말도 안되는 액션도 멋있게 느껴지는 것이겠죠.
그러한 액션 중에서 대표적인 예는 태석이 선수와 함께 냉동 창고에서 벌이는 액션씬입니다. 왜 태석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것일까요? 태석의 최종 목표가 선수가 아닌 살수임을 감안한다면 태석이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티나게 복수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로인하여 꽁수(김인권)와 주님(안성기)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니, 태석으로써는 선수 역시 아다리와 마찬가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적 판단과는 별도로 냉동 창고의 액션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멋집니다. 정우성과 최진혁이라는 두 조각미남이 상반신을 노출하고 맞서는 팽팽한 맞대결. 바둑으로 시작해서 액션으로 이어지는 냉동창고씬의 쾌감은 상상 이상입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다.'라는 탄성이 나올만큼...
영화의 마지막, 마치 바둑알처럼 하얀 슈트를 입은 태석과 검은 슈트를 입은 살수 일당의 한바탕 대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장면에 현실성을 부여한다면 감옥에서 만난 조폭 두목의 부하들이 살수 일당을 애워싸고 태석을 도와 살수 일당과 싸웠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그럴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신의 한수]는 현실적 선택을 무시하고 최대한 태석을 폼나게 표현하여 마지막 액션을 마무리짓습니다. 태석이 홀로 수십명의 살수 부하들을 무찌르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되지만, 그래도 영화의 액션만큼은 멋있게 잘 나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범구 감독은 [똑방전설]과 [퀵]을 통해 꾸준히 액션 영화를 연출해 왔습니다. 아직 [뚝방전설]은 보지 못했지만 [퀵]은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시원시원한 도심 난장 액션이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퀵]에 액션의 개연성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화끈한 액션 그 하나만 존재할 뿐입니다. [신의 한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태석과 살수의 액션은 모순 투성입니다. 하지만 멋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겠죠.
[신의 한수]는 바둑을 소재로한 영화라고 해서 바둑만큼 심오하고, 머리를 써야하는 복잡한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바둑은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의 장벽을 만들어냄으로써 [신의 한수]의 세상을 타락한 신선들의 세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역할만 수행합니다. 그 결과 [신의 한수]는 영화의 짜임새가 약간 부족하더라도 이해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액션영화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바둑의 역할은 거기까지이고, 그것으로 저는 충분했습니다.
신선들의 놀음이라는 바둑,
그런데 신선들이 타락하게 된다면 그 놀음은 얼마나 잔인할까?
[신의 한수]의 바둑은 우아함과 잔인함을 함께 지닌 이중적인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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