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태균
주연 : 장혁, 조보아, 선우선, 이도아
그저 단순한 집착녀에 대한 스릴러인줄 알았다.
지난 4월 10일 [가시]가 개봉했을때 저는 [가시]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착녀에 대한 단순한 스릴러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사실 집착녀에 대한 스릴러는 꽤 흔한 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글렌 클로즈의 섬뜩한 연기가 돋보였던 [위험한 정사]와 집착녀 스릴러의 교과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캐시 베이츠 주연의 [미져리]입니다.
[가시]는 그러한 [위험한 정사], [미져리]와 비슷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은교]처럼 여고생을 내세운 조금은 뻔한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가시]가 개봉하고 나서도 이 영화의 기대도는 4월 10일 개봉작 중에서 [헤라클레스 : 레전드 비긴즈]와 [슈퍼미니], [방황하는 칼날]에 이은 4위에 그쳤습니다.
결국 [헤라클레스 : 레전드 비긴즈]와 [슈퍼미니]만을 극장에서 본 후에도 [방황하는 칼날]을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만 짙게 남았을 뿐, [가시]에 대한 아쉬움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다운로드를 통해 [가시]를 보고나니 예상 외로 영화에 대한 여운이 짙게 남네요.
처음엔 조보아의 연기에 흠뻑 빠졌다.
저는 [가시]를 1시간씩 나눠 이틀에 걸쳐 감상했습니다.(다운로드로 영화를 감상하면 그러한 점이 편합니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1시간 57분이기에 그저 단순히 러닝타임의 절반인 1시간을 단위로 나눠 감상한 것인데, 흥미롭게도 지난 화요일에 감상한 [가시]의 초반 1시간과 어제 감상한 [가시]의 후반 1시간의 영화적 재미가 극명하게 니뉘었습니다.
화요일 밤에 별 기대없이 보기 시작한 [가시]. 이 영화의 초반 1시간을 보고나서 저는 조보아의 연기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시]의 초반 1시간은 제가 예상했던대로 집착녀를 내세운 뻔한 스릴러 영화로 흘러갔습니다. 고등학교 체육 교사인 준기(장혁)는 당돌한 여고생 영은(조보아)의 고백을 받게 되고, 비가 오는 날 텅빈 교정에서 잠시 영은의 유혹에 흔들립니다. 하지만 준기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하여 준기를 향한 영은의 집착은 더욱 커집니다.
조보아는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미숙한 여고생 영은의 캐릭터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조용조용한 목소리와 설레임 가득한 커다란 눈망울로 준기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조보아는 완벽하게 연기한 것입니다. 제게 조보아의 연기는 [가시]가 처음이지만, 분명 앞으로 지켜볼만한 여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은이 '가시'라면 그 '가시'에 독을 묻힌 것은 무책임한 어른들이다.
[가시]의 초반 1시간을 본 이후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영화를 끊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어제, 나머지 1시간을 마저 감상했습니다. 저는 점점 도를 넘어서는 영은의 광기가 후반 1시간에 그려질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니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영화는 점점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저는 영은이라는 순수의 '가시'에 독을 묻힌 어른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분명 영은은 장미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장미의 '가시'는 찔리면 따끔하게 아프긴 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영은의 '가시'에는 치명적인 독이 스며들었고, 그러한 독은 준기와 그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곰곰히 따지고 보면 영은의 '가시'에 독을 묻힌 것은 바로 준기를 비롯한 어른들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영은의 출생부터가 어린 그녀에게 '가시'를 품어줬습니다. 그녀는 대기업 회장의 숨겨진 딸입니다. (소문뿐일지도 모르지만, 영은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 영화 내내 없었음을 감안한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어른들의 무책임함이 영은을 태어나게 했고, 그녀가 태어난 후에도 그녀의 부모는 번듯한 아파트와 가정부 한명만으로 그녀를 방치합니다. 부모의 사랑없이 성장한 영은은 사랑에 목이 마른 '가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준기의 무책임이 화가 났다.
어쩌면 영은은 준기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무책임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영은으로써는 듬직한 준기에게 금새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영은은 준기에 대한 사랑 표현 역시 서툴기만합니다. 그러한 영은의 서툰 유혹에 준기가 잠시나마 이성을 잃은 것이죠.
물론 준기 또한 사정은 있습니다. 촉망받는 럭비 선수였지만, 부상 후 장인 덕분에 고등학교 체육 교사가 된 준기. 그는 겉보기엔 서연(선우선)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사실은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무시하는 처가 식구들과 서연의 조용한 집착에 억눌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영은의 순수한 도발에 잠시나마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준기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엄연한 어른입니다. 비록 그가 잠시 이성을 잃었고, 위험한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는 영은에게 행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하기만 합니다. 정신을 잃은 영은을 텅빈 교실에 내버려둔채 집에 가버리고, 영은의 전화를 피하고, 영은에게 그저 '이제 그만하자.'라며 애원할 뿐입니다. 그가 진정 책임감이 있는 어른이라면 영은과 많은 대화를 시도해야 했으며, 그녀가 받았을 정신적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했습니다.
영은의 '가시'에 독을 묻힌 서연
준기의 무책임한 회피가 영은의 '가시'를 더욱 크게 키웠습니다. 하지만 영은의 '가시'에 치명적인 독을 묻힌 것은 준기가 아닌 서연입니다. 영화 초반 서연은 준기에 대한 내조를 하는 착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초반 1시간을 본 저는 서연이라는 캐릭터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서연은 그저 영은의 광기에 희생당할 피해자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반 1시간에서 서연은 점점 가해자로 돌변합니다. 준기는 영은과의 관계를 서연에게 고백하려하지만 서연은 그 말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준기와 영은의 관계를 제멋대로 상상해버립니다. 여기까지 그녀는 준기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하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어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서연은 영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폭력을 행동에 옮깁니다. 영은이 준기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믿은 서연은 그녀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정신을 잃은 영은을 데리고 준기의 동료 교사이자, 자신의 친구인 민주(이도아)와 함께 영은의 임신 중절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습니다. 그 순간부터 서연은 더 이상 영은의 광기에 의한 피해자가 아닌 영은의 '가시'에 독을 묻히는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 무서운 것은 영은의 '가시'가 아닌 서연의 독이다.
[가시]를 보며 저는 영은이 불쌍했습니다. 애초부터 그녀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평범한 집의 아이였다면, 준기가 실수한 후에 영은을 피하지 않고 영은과의 대화로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 줬다면, 서연이 자신의 가정을 지키겠다며 그런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영은에게 행사하지 않았다면, 민주가 선생이라는 본분을 되찾고 이성을 잃은 서연의 폭력을 말렸다면...
하지만 결코 위험하지는 않았던 영은의 '가시'에 무책임한 어른들은 치명적인 독을 묻혔고, 결국 영은은 폭주하고 맙니다. 준기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민주와 서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녀는 무책임한 어른들이 묻혀준 독 '가시'를 마구 휘둘러댑니다.
영화의 마지막, 저는 영은보다는 서연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서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기를 납치하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영은이 죽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와달라는 준기의 절규에 "그냥 손을 놔버려."라고 외치고,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영은의 죽음을 외면하는 서연의 모습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영은이 '가시'라면 서연은 독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 생활에 나서는 서연. 그녀는 준기의 럭비 유니폼을 쓰레기통에 버리며(그것도 준기에게 버리도록 시킵니다.) 준기를 더욱 압박합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가정의 행복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서연의 독으로 인하여 준기는 평생 불행할 것입니다. 준기의 마지막 눈물... 그것은 무책임했던 준기를 향한 마지막 형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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