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하이힐] - 불편함을 감싸안는 감동

쭈니-1 2014. 6. 9. 13:33

 

 

감독 : 장진

주연 : 차승원, 오정세, 이솜, 고경표, 박성웅

개봉 : 2014년 6월 3일

관람 : 2014년 6월 8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화끈한 액션 영화? 불편한 트랜스젠더 영화?

 

길게는 5일, 짧게는 3일간의 연휴가 끝이 났습니다. 저는 6월 6일 온 가족이 기차와 관광버스를 타고, 남이섬과 춘천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남이섬에서 자연을 벗삼아 자전거도 타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강촌 레일바이크도 타고, 메밀국수 만들기 체험도 했답니다.

토요일에는 웅이와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한 후 웅이가 그토록 보고 싶다고 졸랐던 영화 [그래비티]를 집에서 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연휴의 마지막인 일요일 밤, 구피와 함께 [하이힐]을 보고 왔습니다. 사실 저는 [하이힐]보다는 [우는 남자]가 보고 싶었지만, 요즘 TV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에 푹 빠져 있는 구피가 '장동건보다는 차승원'이라며 [하이힐]을 강력하게 추천하더군요.

구피는 <너희들은 포위됐다> 때문에 [하이힐]이 보고 싶어했지만, 사실 저는 [하이힐]이 왠지 꺼려졌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트랜스젠더라는 이 영화의 소재 때문입니다. 특별히 트랜스젠더에게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차승원이 여장을 하고 나온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하이힐]이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편수가 다섯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영화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회사 동료가 [하이힐]을 보고 와서는 "차승원의 액션 연기가 정말 끝내주게 멋있더라."라며 제게 [하이힐]을 추천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저는 [하이힐]을 보러 가며 여자가 되고 싶은 지욱(차승원)의 열망보다는 차승원의 액션 연기가 영화를 지배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트랜스젠더가 이 영화의 소재라고는 하지만,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는 액션이 부각되는 것이 더욱 유리할테니까요.

하지만 의외로 [하이힐]은 액션보다는 여자가 되고 싶은 지욱의 열망이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그로인하여 여장을 한 차승원의 모습이 영화에 여러차례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처음 지욱이 여장을 하는 장면에서 저는 민망한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근육질의 몸에 멋진 액션을 펼치던 지욱이 어색한 여장을 하니 영화를 보기 전에 우려했던 불편함이 결국 제 눈을 질끈 감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면이 몇 차례 지속되다보니 나중에는 "차승원, 예쁜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기를 소망했던 지욱의 아픔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하이힐]은 제게 성공적인 영화였는지도...

 

 

남자다움에 대한 동경

 

[하이힐]은 처음부터 지욱의 멋진 액션으로 시작합니다. 강력계 형사인 지욱은 말 그대로 '터미네이터'와 같은 존재입니다. 홀홀단신으로 조폭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수십명의 조폭을 단번에 박살내어 버리는...

조폭 두목인 허불(송영창)은 말합니다. "내가 대통령이면 그 인간 훈장을 주거나 총살 시켜버렸을 거야." 그만큼 지욱은 조폭들에게도 악명이 높은 그런 형사입니다.

하지만 지욱에게는 한가지 감춰진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감추기 위해 더욱 거친 남자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고, 강력계 형사가 되어 수십명의 조폭과도 맞짱을 뜹니다. 그렇게 거친 남자로 살아가면 자신 안의 여성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하이힐]은 지욱의 거친 액션을 통해 남자다움의 쾌감을 관객에게 먼저 안겨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장진 감독이 파놓은 함정입니다. 지욱의 액션에 "멋지다."라며 영화에 대한 기대를 안게된 관객들은 영화 중반, 화장을 하고, 여자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지욱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장진 감독의 남자다움의 쾌감이라는 함정은 허곤(오정세)이라는 이상한 악당을 탄생시킵니다. 허곤은 예전 지욱이 우산을 쓴 채 한 손으로 수명의 조직폭력배를 처치하는 모습을 본 후 그의 남자다움을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허곤은 "나, 그 양반 정말 좋아해."라며 지욱에 대한 동경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허곤의 동경은 어느순간부터 지욱을 옭아매는 거대한 폭력이 됩니다.

오랜 형사 생활을 끝마치고, 성전환 수술을 위해 해외행을 선택한 지욱. 하지만 허곤은 그러한 지욱이 해외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습니다. [하이힐]에서 지욱은 영화의 후반부에 허곤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욱의 모습에 허곤은 승리에 도취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분노합니다.

허곤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악당입니다. 하지만 지욱의 남자다움을 동경한다는 점에서 다른 악당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지욱이 약한 모습을 보일때마다 오히려 섭섭해하고, 지욱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폭주해버립니다.

이러한 허곤이라는 캐릭터는 트랜스젠더라는 영화의 소재에 당혹감을 느끼는 관객들을 형상화한 캐릭터입니다. 여자가 되고 싶다는 지욱의 성 정체성 대신 지욱의 남자다운 액션으로 영화가 쭈욱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의 바램에 장진 감독은 허곤이라는 캐릭터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

 

영화 초반, 지욱의 멋진 액션을 선보였던 [하이힐]은 영화 중반으로 가면 갈수록 액션 대신 여자가 되고 싶다는 지욱의 열망을 표현하는데 정성을 다합니다. 지욱의 고교 시절, 동성 친구에 대한 사랑과 그로 인한 아픔에서부터 시작하여, 성 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까지... 그러면서 영화는 액션보다는 드라마가 강조되는데, 그렇게 강조된 드라마는 지욱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지욱의 사정은 [하이힐]이 액션 쾌감만을 선사하는 영화가 아닌, 성소수자에 대한 드라마가 가미된 따뜻한 영화임을 드러냅니다. 어찌보면 우린 성소수자를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아닌 폭력으로 이어졌고, 그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 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욱은 말합니다. 우리는 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너무 바쁜 신이 미처 돌보지 못하고 잊어버렸다고... 그러한 장면은 성소수자가 느끼는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신조차도 잊어버린 존재. 그들은 신에게조차 기대지 못한채 그렇게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때론 자신 안의 본능을 억누르며 아닌 척 살아가기도 하고, 때론 온갖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그것을 참아내며 하루 하루를 버티기도 합니다. 지욱은 처음엔 자신 안의 본능을 억누르는 것을 선택하지만, 더이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누군가는 그러한 지욱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남과 여의 성정체성은 자연의 섭리이고, 그것을 어기고 다른 성정체성을 갖는 것은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성소수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소수자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사정을 자신의 기준에 맞게 함부로 이야기할 자격 또한 없는 것이겠죠.

지욱은 그 누구보다는 남자다움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그로인하여 허곤이라는 적을 만들었습니다. 장진 감독은 [하이힐]은 연출하며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영화 후반 지욱이 당하는 폭력의 잔인함은 지욱의 남자다움에 매료된 허곤의 악행임과 동시에 [하이힐]에 남성다운 액션을 원했던 관객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과,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저는 [하이힐]에서 장미(이솜)와 지욱의 관계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처음 장미가 지욱을 도와주는 장면이 나올때에는 속으로 '말도 안돼.'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개 저런 역할은 여경이 맡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욱은 일반인에 불과한 장미에게 경찰이 해야할 위험한 일을 떠맡기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장미와 지욱의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며 지욱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장미는 지욱의 과거에 대한 유일한 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지욱과 장미가 키스를 하는 장면은 거친 느와르 액션을 표방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지욱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그와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하이힐]에는 지욱의 가족들이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그 대신 장미와 경찰서내 후배인 진우(고경표) 등의 캐릭터가 그에겐 가족과도 같은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욱이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해외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결정적으로 막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족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그것이 지욱의 본능을 억누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는 법이고, 소중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가족의 존재가 소수자의 삶을 억누리는 것은 아닐까요? 가족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이 상처를 받거나, 가족이 자신을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한 것들이 [하이힐]에서는 진욱과 장미, 진우의 관계로 그려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지욱의 액션이 폭발합니다. 하지만 그의 액션은 영화 초반의 호쾌함 대신 무기력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미 허곤에게 무릎을 꿇었던 지욱은 자신을 향한 사시미 칼에 찔리며 그대로 고꾸라집니다. 육백만불의 사나이처럼...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버텨낼 것 같았던 지욱조차도 결국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의 폭력 앞에 쓰러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하이힐]이 처음엔 불편했습니다. 차승원이 처음 여장을 하는 장면에서 극장 안에서 울러퍼지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에 저 역시 동참하였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지욱의 아픔이 공감되었고, 그의 좌절이 너무 슬펐습니다. 그렇기에 관객이 원하는 액션대신 진득하게 지욱의 이야기를 해낸 장진 감독의 뚝심이 대단하게 느껴진 영화였습니다.

 

[하이힐]에서 가장 슬펐던 것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했던 지욱의 선택이다.

우리 주위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아픈 선택을 강요받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