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재은
주연 : 천정명, 김강우, 조이진, 이천희
개봉 : 2005년 6월 2일
관람 : 2005년 5월 30일
처음 [태풍태양]이라는 영화를 알았을때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보기가 꺼려졌습니다. 이제 막 소녀에서 여성으로 들어선 5명의 스무살 동갑내기 친구들의 담담한 일상을 잡아낸 [고양이를 부탁해]는 분명 평론가들 사이에서 걸작 판정을 받으며 정재은 감독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지만 보통 관객의 입장이었던 저는 2시간동안의 지루함이라는 고통을 참아야했던 영화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정재은 감독이 또 청춘 영화를 찍는다는 소릴를 들었을땐 이번엔 '남성판 [고양이를 부탁해]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소재가 인라인 스케이트라는 소리를 들었을때는 조금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소재로 과연 너무나도 정적이었던 [고양이를 부탁해]와 비슷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건 분명 무리였습니다. 아무리 정재은 감독이라고 할지라도 인라인 스케이트 그 자체가 동적입니다. 이렇게 인라인 스케이트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태풍태양]은 지루함의 절정을 달렸던 [고양이를 부탁해]와는 분명 정반대의 영화가 영화가 될것임에 분명해 보였습니다.
신인급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한 모험도 맘에 들었습니다. 천정명, 김강우, 조이진, 이천희, 온주완 등 스타급 배우보다는 신인급에 가까운 젊은 배우들만으로 캐스팅을 완료한 이 영화는 스타급 배우들에만 목매다는 우리 영화계의 현실에서 분명 신선한 바람을 불고 올만한 시도였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한꺼번에 여러명의 가능성있는 신인 배우들을 발굴하는 셈이니 [태풍태양]의 캐스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모험인 셈입니다.
암튼 이런 저런 생각을하며 회사일로 지친 발걸음을 극장으로 옮겼습니다. 젊음의 열기가 가득 묻어나는 신나는 청춘 영화를 기대하며...
시작은 좋았습니다. [태풍태양]은 제가 생각했던대로 인라인 스케이트에 미친 녀석들의 강한 에너지를 품어내며 제 시선을 잡아당겼습니다. 묘기와도 같은 그 위험천만한 인라인 스케이트 기술들을 배우기위해 넘어지고 깨지는 그들의 집념을 보며 그 청춘의 열기가 극장에 앉아있는 제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태풍태양]은 이렇게 처음부터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처럼 에너지 가득 넘치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청춘들의 질주와 함께 [태풍태양]에서 제가 좋았던 것은 바로 어른의 부재입니다. 사업의 실패로 고등학생인 아들만 남겨놓고 해외로 도피하는 소요(천정명)의 부모처럼 이 영화는 청춘 영화속 갈등의 한쪽 추인 어른들을 의식적으로 영화속 밖으로 밀어냅니다. 그럼으로써 정재은 감독은 청춘 그들만의 이야기로 러닝타임을 하나 가득 채워나갑니다.
최근에 봤던 청춘 영화인 [발레 교습소]처럼 어른의 존재는 청춘 영화에서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정해진 틀속에 갇혀 살기를 바라는 어른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하며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청춘 영화의 법칙아닌 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풍태양]은 그러한 법칙을 깹니다. 그러므로써 정재은 감독이 만들어낸 갈등구조는 아이들끼리의 가치관의 충돌입니다.
그냥 단지 인라인 스케이트가 좋아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모기(김강우)와 자신이 좋아하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자신의 미래로 만들고 싶어하는 갑바(이천희)의 갈등은 오히려 어른과 아이의 갈등이라는 청춘 영화의 해묵은 법칙보다도 휠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보다도 지금 현재를 즐기고 싶어하는 모기, 지금 현재보다도 미래에 대한 설계에 관심이 많은 갑바, 그들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의 한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며 듬직한 갑바를 응원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스무살 시절은 갑바보다도 모기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로 흐르며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기나 갑바중 한명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분명 극적일 것이며 그러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이 더욱 설득력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정재은입니다. 그녀에게 이런 상업적인 스토리 라인을 기대한것 자체가 무리였던 겁니다.
정재은 감독은 인라인 스케이트와 청춘이라는 충분히 상업적일 수 있는 소재를 카메라로 잡아냈으면서도 결코 이 영화의 재미 위주의 상업 영화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나 봅니다. 분명 그녀의 전작인 [고양이를 부탁해]와 비교해서 휠씬 재미있어졌지만 젊은 관객들이 열광할만한 더 큰 재미가 내포되어 있는 스토리 라인을 끝까지 포기하고 모기와 갑바의 갈등을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나갑니다. 뭔가 더 멋진 장면이 있을텐데... 라며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저는 이 영화가 2시간이 훌쩍 넘어버리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정재은 감독은 이번엔 흥행에 조금은 신경을 썼는지 모기와 한주(조이진), 그리고 소요간의 삼각관계라는 관객이 좋아할만한 카드를 꺼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업 영화에 서툰 그녀의 연출력은 오히려 상업적인 계산이 깔린 씬에서 어색함을 노출시키며 관객들에게 헛웃음만 안깁니다. 아직은 상업 영화 감독으로써 초보에 가까운 정재은 감독의 어쩔수없는 한계일지도...
초보의 한계는 이 영화의 배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연기는 아직은 설익은듯 중요한 장면에서 어색함을 노출시키더군요. 이 영화의 아쉬운 부분이죠. 결국 상업 영화에 서툰 정재은 감독도, 연기에 서툰 주연 배우들도 결국은 초보의 한계를 넘지는 못한 셈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한주는 소요의 손에 안녕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젠 내 자리로 돌아가야 겠다고... [태풍태양]을 보는내내 솔직히 한주라는 캐릭터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었습니다. 다른 캐릭터처럼 멋진 인라인 스케이트 기술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맇다고 모기와 소요 사이에서 가슴아픈 삼각관계를 형성시키지도 못하는 그녀의 존재가 단지 남자들만이 득실대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홍일점의 역할만 수행하고 있는 있으나마나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을 보니 왠지 한주라는 캐릭터는 정재은 감독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인라인 스케이트의 그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무작정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청춘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고 선언했다는 정재은 감독. 본의 아니게 장편 데뷔작인 [고양이를 부탁해]에 이어 청춘 영화 두편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버렸지만 그녀 스스로는 이것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정재은 감독은 그 특유의 느릿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라인 스케이트의 뜨거운 질주속에서 어렵사리 자신이 하고 싶은 주제와 상업 영화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던 그녀. 그래서 한주라는 캐릭터가 [태풍태양]의 다른 캐릭터에 비해서 자꾸만 겉도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 예상이 맞는다면 정재은 감독의 다음 영화는 그녀 스스로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영화가 되겠죠? 비록 상업 영화로써의 [태풍태양]은 솔직히 실망스러웠지만, 청춘 영화로써의 [태풍태양]이 진솔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정재은 감독의 다음 영화도 기대가 되는 군요. 물론 재미난 상업 영화는 아닐것 같지만 말입니다.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정재은 감독의 자리가 어떤 영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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