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폴 W.S. 앤더슨
주연 : 킷 해링턴, 에밀리 브라우닝, 키퍼 서덜랜드
개봉 : 2014년 2월 20일
관람 : 2014년 2월 22일
등급 : 15세 관람가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2월 22일. 저는 꽤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에서 제 오랜 블로그 친구이신 나희천사님이 한국에 오셨기에 저는 오랫만에 블로그 친구들과 회포를 풀기 위해 저답지 않은 계획을 세운 것이죠. (저는 원래 무계획적인 인간입니다.) 제가 세운 계획은 오후 4시에 홍대입구 전철역에서 만나 롯데 시네마에서 [관능의 법칙]을 보고, 6시부터 고기와 술을 곁들인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나희천사님에게는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가야할 일이 발생되었고, 약속 당일날 소연님은 신종풀루 확진 판정을 받고 스스로 자신을 격리하였으며, 두부장수종치네님은 급한 일이 생기셔서 참석 확률이 50%라고 통보하셨습니다. 약속시간에 제대로 나온 블로그 친구는 404page님 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관능의 법칙]의 예매를 일단 취소하고 두명으로 재예매를 시도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404page님과 낮 4시부터 단 둘이 술을 마실 수도 없는 노릇.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저와의 약속을 위해 홍대까지 나와주신 404page님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짜증내며 무너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 순간 다행히 누군가가 [폼페이 : 최후의 날] 예매를 취소했고, 홍대로 가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404page님과 볼만한 영화가 없을까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져 있던 저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예매 완료하였습니다. 사실 [폼페이 : 최후의 날]은 구피와 함께 보려고 아껴뒀던 영화이지만 그날은 그런 것들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404page님과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것이 뻘쭘할 것 같아서 홍대 근처에 사는 친화력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친구까지 불러냈습니다. 이렇게 2월 22일 블로그 친구들과의 정모는 404page님과 저와 제 친구의 술판이 되고 말았지만, 오랜만에 홍대에서 실컷 술도 마시고, 집 근처 노래방에서 목이 쉬도록 노래까지 부르고나니 회사에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렸습니다. 물론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냐며 한바탕 쏟아내는 구피의 사랑의 잔소리는 덤!!!
[관능의 법칙]을 보려다가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보게된 [폼페이 : 최후의 날]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모두 인생에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예정에도 없었던 화산 폭발로 인하여 계획과는 전혀 다른 하루를 보내게 되죠.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지... 지금부터 영화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서기 79년 8월의 어느날 폼페이에서는...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합니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은 인근 도시에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쏟아냈는데,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래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하여 폼페이 인구의 약10%인 2천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지만 화산 분출물로 인해 도시가 완전히 파묻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폼페이는 그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폼페이가 화산 분출물에 파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1700여년이 지난 18세기 중엽, 품페이에 대한 최초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폼페이 유적 발굴장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생활상은 물론 탈출하지 못한채 고통스럽게 죽어간 당시 시민들의 인간 화석이 발견되어 엄청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꼭 껴안은 어머니, 자신에게 소중한 물품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서 [폼페이 : 최후의 날]은 서로를 지켜주려 한 연인의 화석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연인들에겐 어떠한 사연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2천여명의 희생자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폼페이 : 최후의 날]은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화적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로마 시대의 [타이타닉]입니다. 분명 여러면에서 [폼페이 : 최후의 날]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과 많은 부분에서 닮은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한 재난 영화라는 점과 그 속에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두 남녀의 사랑을 그려냈다는 점까지...
하지만 [폼페이 : 최후의 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로마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착안하여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까지 끌어들입니다. 그 결과 주인공인 마일로(킷 해링턴)는 로마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노예 검투사가 되었습니다. [글래디에이터]와 [타이타닉]의 결합. 분명 이 두 조합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로 유명한 폴 W.S. 앤더슨 감독은 제임스 카메론도, 리들리 스콧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오락 영화의 감독이었으며, 그렇기에 [폼페이 : 최후의 날]은 재미있는 재난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영화가 되었습니다.
오락 영화 감독의 작품답게 간단명료하다.
오락 영화의 특징이라면 상당히 간단 명료한 전개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폴 W.S. 앤더슨 감독은 전문적인 오락 영화 감독답게 [폼페이 : 최후의 날]의 스토리 전개를 매우 간단 명료하게 정리해놓았습니다.
그 결과 선과 악의 구분은 명확합니다. 특히 잔인무도한 로마의 상원의원 코르부스(키퍼 서덜랜드)는 마일로와 카시아(에밀리 브라우닝) 모두에게 악역이 됨으로서 영화 내의 갈등 상황을 단순화 시킵니다. 그러한 절대악은 단순한 오락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절대악의 존재는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영화의 후반에 절대악에 쓰러지면 그에 따른 관객의 쾌감 역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코르부스가 마일로의 가족들을 학살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켈트족의 반란은 그저 코르부스를 절대악으로 만드려는 단순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실제 켈트족과 로마의 대립만 놓고도 한편의 장대한 대서사시를 만들 수도 있을텐데, [폼페이 : 최후의 날]은 그 모든 것을 건너뛰고, 마일로의 가족들을 학살하는 코르부스의 잔인한 모습만을 부각시킵니다.
로마의 상원의원이 된 코르부스가 폼페이에 와서 카시아에게 하는 행위들 역시 그의 악마적 본능을 부각시킬 뿐입니다. 아무리 권력의 중심인 로마의 상원의원이라 할지라도 폼페이 영주 앞에서는 자신의 추악한 본능을 감출만도 한데, 그는 그따위것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마치 '내가 바로 악당이다.'라고 이마에 써붙여 놓은 캐릭터같이 행동합니다.
코르부스라는 절대악을 간단하게 완성해 놓은 [폼페이 : 최후의 날]은 모든 이야기 전개를 마일로와 카시아에게 맞춤으로서 스토리 전개를 더욱 단순화시킵니다.
사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약 2천명입니다. 그들 중에서는 마일로와 카시아보다 더욱 애절한 사연이 많을 것입니다. [폼페이 : 최후의 날]이 닮고 싶어했던 [타이타닉]의 경우는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 외에도 타이타닉호에 탑승한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그 결과 영화의 러닝타임은 무작정 길어졌지만 마지막 그들의 최후에 관객들을 눈물짓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폼페이 : 최후의 날]은 다른 캐릭터에 눈길을 돌릴 여유를 부리지 못합니다. 마일러와 카시아, 그리고 악당인 코르부스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부각되는 캐릭터라고는 노예 검투사 애티커스(아데웰 아킨누오예 아바제) 뿐입니다. 물론 그나마도 철저한 마일로의 조력자 역할만 해낼 뿐입니다. 카시아의 하녀인 애리어든(제시카 루카스), 코르부스의 부관인 프로쿨루스(사샤 로이즈)처럼 말입니다.
영화를 보며 저는 어떻게 저렇게 캐릭터, 스토리 전개를 단순화시킬 수가 있을까?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타이타닉]과 [글래디에이터]와 닮아 있지만, [폼페이 : 최후의 날]은 철저한 오락 영화로 관객이 영화를 단순하게 즐기게 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일 정도였습니다.
철저한 오락 영화의 재미에 만족하자.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폼페이 : 최후의 날]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애초부터 [타이타닉]과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걸작이 될 생각보다는 관객을 위한 철저한 오락 영화가 될 생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부에 진행되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 장면은 순수 제작비 1억 달러가 들어간 영화답게 최고의 스펙타클은 안겨줍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하여 폼페이의 원형 경기장에 무너지는 장면에서부터 도시에 불덩어리가 덮치는 장면, 그리고 화산 폭발로 인한 해일이 폼페이를 덮치는 장면등 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연속된 재난들이 영화의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지금까지 화산폭발 영화로는 [볼케이노]와 [단테스 피크]가 기억에 남는데, 화산폭발의 스펙타클만 놓고 본다면 단연 [폼페이 : 최후의 날]이 최고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철저한 오락 영화 감독인 폴 W.S. 앤더슨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최대한 발휘해서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오락 영화를 완성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한 이 영화의 오락성은 명확한 장점이자 단점이 됩니다.
장점이라 한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별 생각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후반부에 화산이 폭발하고나서부터는 영화의 스펙타클에 매료되어 제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 영화의 오락성은 다른 한편으로는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계속 제 머리 속을 맴돌았던 것은 검투사들이 경기에 앞서 '죽음을 앞둔 자들이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잔인한 검투사의 세계에서 그들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폼페이 : 최후의 날]은 얼마나 죽음을 앞둔 자들에게 경의를 표했을까요? 이 영화의 제목답게 폼페이에 남은 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록 1900여년이 훨씬 지난 과거의 재난이지만 이 엄청난 재난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쳤을 것이며 고통에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폼페이 : 최후의 날]은 마일로와 카시아의 사랑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폼페이 시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경의를 표한 죽음을 앞둔 이들은 마일로와 카시아 뿐인 것입니다. 2천여명이 죽었는데, 고작 2명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숭고한 사랑에 경의를 표한 것이죠.
그러한 단순화는 오락 영화로서는 장점이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여운은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화산 폭발의 스펙타클만 기억에 남을 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에 쓰러져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슬픔, 여운은 빠져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저는 [폼페이 : 최후의 날]을 보고나서 '재미있었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한 여운은 채 몇분도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간단명료한 오락 영화의 최대 약점이죠.
서로를 지켜주려한 연인 화석보다
아이를 꼭 껴안은 어머니 화석이 더 가슴아팠다.
이 영화가 마일로와 카시아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날의 비극을 맞이한 이들 모두에게 조금씩이라도 관심을 줬다면
영화가 끝나고나서 좀 더 여운이 짙게 남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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