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개빈 후드
주연 : 아사 버터필드, 해리슨 포드, 벤 킹슬리, 헤일리 스테인펠드
개봉 : 2013년 12월 31일
관람 : 2014년 1월 1일
등급 : 12세 관람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
저희 가족의 2013년 마지막날은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비워뒀지만, 2014년의 첫날만큼은 꼭 영화를 보며 한해를 시작해야겠다고 무언의 다짐을 했습니다. 심사숙고해서 저는 물론이고, 구피와 웅이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물론 후보작들 중에서 [썬더와 마법저택], [저스틴]과 같은 애니메이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4년이면 12살이 되는 웅이에게 이젠 어린이 애니메이션은 유치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제외했고, 결국 12세 관람가 등급의 영화들로 후보작을 추려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엔더스 게임]과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로 좁혀졌습니다. 그 중 제가 선택한 영화는 [엔더스 게임]입니다.
제가 [엔더스 게임]을 저희 가족의 2014년 첫 영화로 고른 이유는 이 영화가 가볍게 볼 수 있는 SF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주로 애니메이션과 슈퍼 히어로 영화를 보던 웅이에게 SF 영화가 가장 알맞아 보였고, 구피와 저 또한 SF 영화를 좋아하기에 [엔더스 게임]은 저희 가족이 모두 함께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엔더스 게임]을 SF판 '해리 포터'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외계 종족인 포믹에 맞서 전쟁을 준비중인 인류. 그러한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해내는어린 소년 엔더(아사 버터필드)의 성장담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막상 직접 보게된 [엔더스 게임]은 결코 만만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인 오슨 스콧 가드의 소설 <엔더의 게임>은 해외에서는 교육 교재로 사용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라합니다.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가족용 SF 영화를 기대하며 [엔더스 게임]을 보던 저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 질문들과 진지한 문제의식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왜 이 영화의 원작소설인 <엔더의 게임>이 교육 교재로 사용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하지만 문제는 웅이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웅이에게 "[엔더스 게임]이 어떤 내용인지 이해되니?"라고 물으니 역시 "조금 어려웠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SF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엔더스 게임]은 폭력적 게임에 길들여진 우리의 청소년들과 전쟁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 속 상황이 현실이라면...
웅이는 스마트폰 게임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물론 구피가 엄격하게 게임하는 시간을 제한하기에 다른 아이들처럼 하루종일 스마트폰 게임을 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는 않지만 한번 스마트폰 게임을 시작하면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몰입합니다.
사실 게임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도 웅이가 하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웅이가 하는 게임을 폭력성이 짙은 게임보다는 <퍼즐 앤 드래곤>, <미니언 러쉬>와 같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나오는 게임으로 한정짓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하는 게임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거의 실사같은 그래픽과 잔혹성과 중독성을 보이는 게임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저 아이들이 하는 게임이 현실이라면... 과연 저 아이들은 게임에서처럼 총을 쏘며 적을 무차별하게 학살할 수 있을까요?
[엔더스 게임]은 그러한 질문에서 시작되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엔더스 워'가 아닌 '엔더스 게임'임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왜 인류는 외계 종족인 포믹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인류의 운명을 맡긴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른에 비해 어린 아이들이 복잡한 컴퓨터 게임을 하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래의 전쟁은 총을 들고 전쟁터에 직접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닌, 몇 명의 조작만으로 대학살을 이룰 수 있는 컴퓨터 게임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처음 엔더를 우주함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선택한 그라프 대령(해리슨 포드)은 엔더의 천재적 전략에 주목합니다. 그는 훈련소의 모든 시뮬레이션 전투 훈련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략을 세워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면모를 과시합니다.
하지만 우주함대의 심리분석가인 앤더슨 소령(비올라 데이비스)은 엔더의 불안정한 내면에 주목하고 그를 좀 더 지켜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엔더는 겉으로 침착한척 자기 자신을 감추지만 그의 내면은 영화 내내 매우 불안해보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미래의 지구에서는 산아 제한으로 인하여 두명의 아이만 허용되었고, 셋째 아이를 낳으려면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합니다. 엔더는 셋째 아이입니다. 그렇기에 엔더는 자신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폭력성이 짙은 형에 대한 두려움과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준 누나인 발렌타인(아비게일 브레슬린)에 대한 의존으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앤더슨 소령은 그러한 엔더의 채 성숙하지 못한 자아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라프 소령은 엔더의 불안정한 내면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포믹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낼 영웅을 원할 뿐입니다. 포믹과의 전투로 엔더의 내면이 무너지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류의 적인 포믹만 없앤다면 엔더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어린 아이들인 또다른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자아를 완성한 성인과는 달리 어린 아이들은 앞으로의 상황과 주변 인물들로 자아를 완성해나갑니다. 그라프 대령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엔더의 자아를 인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전쟁 영웅으로 성장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웅은 외롭다.
아직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컴퓨터 게임에 특화된 아이 엔더. 그는 인류를 구할 영웅이 되어야 했습니다. 50년전 포믹과의 전쟁에서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구한 래컴(벤 킹슬리)처럼 말입니다.
엔더가 인류를 구할 영웅으로 만들으려는 그라프 대령의 과정은 꽤 흥미진진합니다. 그라프 대령은 엔더에게 시련을 안겨줍니다. 그를 철저하게 외톨이로 만듭니다. 그라프 대령은 엔더가 이 세상에 난 혼자뿐이라는 생각을 갖게하게끔 만들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엔더의 이메일을 차단시켜 그가 유일하게 기대는 발렌타인과도 떨어뜨려놓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은둔형 외톨이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착의 대상은 대부분은 컴퓨터 게임입니다. 컴퓨터라는 가상 공간에서는 자기 자신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만큼 컴퓨터 게임은 은둔형 외톨이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공간이자 희망이 됩니다. 어쩌면 그라프 대령이 엔더에게 원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친구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쉽게 희생하지 못합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라프 대령은 어쩌면 엔더의 삶에 대한 미련이 될지도 모를 가족과 친구들을 엔더로부터 떼어놓습니다. 만약 그라프 대령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엔더는 포믹을 전멸시키는데 집착하고, 만약의 순간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영웅으로서의 자아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언제나 어른들의 계획대로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은 이런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며 교육을 시켜도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될지 알수 없습니다.
엔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라프 대령의 계획대로라면 엔더는 고독한 영웅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패트라(헤일리 스테인펠드)를 비롯하여 엔더를 믿고 따르는 친구들이 생겨나고, 엔더를 적대시하는 본소와의 사건이 생겨나며 그라프가 의도했던 엔더의 자아 형성은 실패하고맙니다. 엔더는 사랑하는 누나인 발렌타인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우주함대에 남지만, 더이상 외로운 영웅이 아닌 자신의 팀원을 이끄는 뛰어난 지휘관으로 성장합니다.
[엔더스 게임]의 영화적 재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엔더의 성장담. 물론 어린 아이의 성장담은 영화의 오랜 소재입니다. 하지만 엔더의 성장담은 다른 성장담에 비해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인류의 위기를 구해낼 영웅으로 지목된 상황에서의 성장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래컴이 그러했듯이 엔더가 포믹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고 전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이후의 엔더가 어떤 고통을 겪을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웅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이기심이죠.
인류를 구한 이후의 엔더를 걱정했던 앤더슨 소령이 우주함대를 그만두며 더이상 엔더를 걱정해줄 이가 사라진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엔더는 우주함대에서 친구를 만나고,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따를 동료를 만나며 영웅이 아닌 한명의 휼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적을 이해하려 시도한 적이 있는가? (스포 포함)
[엔더스 게임]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적을 처부술 정도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 적을 사랑하게 된다."라는 자막이 먼저 뜹니다. 과연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살아가면서 이미 온갖 편견에 사로 잡힌 어른들은 남을 이해할 여유가 없습니다. 특히 이해해야할 존재가 50년전 인류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렸던 외계 종족 포믹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전쟁의 섬뜩한 기억은 아주 두터운 편견의 벽을 만들고(우리나라가 바로 그러합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 편견의 벽을 깨부수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경우는 편견의 벽에서 자유롭습니다. 엔더는 어렸을 적부터 포믹의 공격과 인류를 구한 래컴의 희생을 반복 시청하며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편견의 벽에 갇힙니다. 하지만 엔더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왜 포믹은 지구를 공격했을까?' 편견의 벽에 갇힌 어른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포믹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엔더는 한 것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포믹을 이해하려는 엔더의 시도는 포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의지이기도합니다. 하지만 엔더는 진정으로 적을 이해하게되는 그 순간 적을 사랑하게 됩니다.
저는 [엔더스 게임]의 후반부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처음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SF 영화라는 기대로 [엔더스 게임]을 보기 시작했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인류를 구할 고독한 영웅이 아닌 진정한 지휘관으로서의 엔더의 성장에 푹 빠져서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엔더스 게임]의 진정한 묘미는 후반부에 있습니다. 훌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한 엔더는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 시험 관문을 멋지게 통과해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엔더가 시뮬레이션 훈련이라 생각했던 마지막 시험 관문은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포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아무런 죄책감없이 다른 우주함대를 희생했던 엔더. 희생된 우주함대에 타고 있던 수천명의 군인은 물론이고, 포믹의 고향별을 파괴하며 엔더는 한 종족을 멸족시켰습니다. 게임이 실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입니다. 만약 게임 속 상황이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는 게임을 하듯이 총을 난사하며 적을 소탕할 수 있을까요? 컴퓨터 화면 속에 죽어 쓰러져가는 적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실제 사람이라면 우린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을까요? 전쟁은 게임이 아닙니다. 승리를 하고 '스테이지 클레어'를 외치며 환호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수천명의 군인과 우주의 한종족을 멸족시켰다는 죄책감에 빠진 엔더는 그제서야 적인 포믹을 이해하게 됩니다. 포믹은 그저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살기 위해 지구를 침략했지만 1차 침략전쟁의 패배이후 그들은 다른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50년전 전쟁에 의한 편견에 벽에 갇힌 인류만이 2차 침략을 대비했고, 포믹을 공격했으며,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이용하여 결국 그들을 멸족시키는 대학살을 벌인 것입니다.
왜 진작에 포믹을 이해하고, 대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 것일까요? 포믹을 이해했다면 양측 모두 평화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엔더는 포믹을 이해하게 되었고,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포믹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포믹의 별을 소멸시킴으로서 인류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포믹을 사랑하게된 엔더의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이기적인 영웅 게임이 아닌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이... [엔더스 게임]의 다음 이야기를 진심으로 기다려봅니다.
[엔더스 게임]의 인류처럼 우리 역시 60년전 벌어진 전쟁의 두려움에 살고 있다.
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흑백 논리의 편견에 휩싸여 있다.
진정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적을 먼저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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