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동사서독 리덕스] - 이건 지독한 그리움과 하염없는 기다림에 대한 잔인한 사랑영화이다.

쭈니-1 2013. 12. 10. 13:54

 

 

감독 : 왕가위

주연 : 장국영, 양가휘, 임청하, 양조위,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양채니

개봉 : 2013년 12월 5일

관람 : 2013년 12월 9일

등급 : 15세 관람가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날, 18년전으로 추억 여행을 하다.

 

1995년 가을의 어느날. 저는 홀로 극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동사서독]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혼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989년 여름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1990년 봄 [죽은 시인의 사회]이후 처음으로 극장에서 혼자 봤던 영화가 바로 [동사서독]이었습니다.

당시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논란적이었습니다. [열혈남아], [아비정전]이 개봉할 때엔 많은 분들이 [영웅본색]과 비슷한 홍콩 느와르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다가 분노했었으며, [동사서독] 역시 많은 분들이 [동방불패]와 같은 무협 영화를 기대했다가 영화가 끝난 후 '이게 뭐야?'라며 당황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라고 생각한 영화가 바로 [동사서독]이며,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고독에 감염되어 [동사서독]을 보고나서 하염없이 거리를 걸으며 고독한 가을남자(일명 추남) 흉내를 냈었던 기억이 납니다.

무려 18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소년티를 갓 벗어난 혈기왕성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지금은 40대가 훌쩍 넘어버린 중년 남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동사서독]은 저를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으로 되돌려 놓네요.

 

겨울비가 거리를 적시던 2013년 12월의 어느날, 저는 1995년 가을의 어느날처럼 홀로 극장에 앉았습니다. 스크린에는 18년 전의 그날처럼 [동사서독]이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2013년의 [동사서독]은 제목 뒤에 '리덕스'가 붙었고, 1995년의 [동사서독]과는 약간 다른 버전의 영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18년 전의 제가 그러했듯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되지 않는 관객들 중에서 아주머니 관객 세명은 18년전의 누군가가 그랬듯이 '이게 뭐야?'라며 투덜거리며 극장 밖을 나갔지만, 저는 슬픈 여운에 젖어 무거운 발걸음을 한걸음씩 떼어내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동사서독]은 참 대단한 영화입니다. 18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고,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고독에 감염되어 마구 울고 싶어졌으니까요.

사람들이 고뇌를 느끼는 것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황약사(양가휘)는 말합니다. 그는 구양봉(장국영)에게 마시면 과거를 잊어버리는 술 '취생몽사'를 건넵니다. [동사서독]은 제게 '취생몽사'입니다. '취생몽사'를 마신 그 순간, 18년이라는 세월은 기억에서 잊혀지고, 20대 초반의 감수성 풍부한 청년으로 돌아가버렸으니 말입니다. 지금 저는 20대 초반의 감수성으로 [동사서독 리덕스]의 영화 이야기를 써내려가려합니다.

 

 

사랑의 아픔, '취생몽사'로 잊을 수 있을까?

 

[동사서독]은 무협영화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사랑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엄청난 실력을 지닌 검객이지만 그들 모두는 사랑의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아픔을 치유하기위해 몸부림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매년 경칩이면 구양봉을 찾아오는 황약사입니다.

[동사서독 리덕스]에서는 생략되었지만 후에 맹무살수(양조위)의 죽음을 불러 일으킨 마적대 괴멸사건의 장본인이 바로 황약사입니다. 그는 천하무적이라고 할만큼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과거를 잊을 수 있는 '취생몽사'라는 술을 가지고 구양봉을 찾습니다. 그는 구양봉에게 '취생몽사'를 권하지만 사실 그것은 명분일뿐, 황약사 자신이 '취생몽사'를 마시고 취해버립니다. 과연 황약사는 무엇을 잊고 싶어서 '취생몽사'를 마신 것일까요?

아무리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황약사이지만 그에게도 사랑의 아픔은 '취생몽사'로 모두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취생몽사'가 필요한 것은 황약사 뿐이었을까요? [동사서독]은 황약사가 '취생몽사'를 마시고 돌아간 이후 구양봉을 찾아오는 캐릭터들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잡아냅니다. 그들 모두는 '취생몽사'를 마시는 황약사처럼 사랑을 잊지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무림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모용연이라는 신분으로 남장을 하며 다니는 모용언(임청하). 그는 "자네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결혼하겠네."라는 술에 취한 황약사의 농담과도 같은 청혼을 받게됩니다. 이미 그녀는 황약사를 사랑했고, 그렇기에 여성의 몸으로 황약사와의 약속 장소에 나갑니다. 하지만 황약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용언이 황약사로 인한 사랑의 아픔을 잊는 방법은 남장을 위한 가짜 신분이었던 모용연의 뒤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모용연은 사랑의 아픔으로 몸부림치는 모용언을 아픔에서부터 구하기위해 구양봉에게 황약사를 죽여줄 것을 청탁합니다.

모용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황약사에 의한 사랑의 상처를 잊어야 함을...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모용언은 황약사를 죽이고 싶은 오빠 모용연과, 황약사와의 사랑을 어떻게해서든 이어나기 싶은 동생 모용언이라는 두개의 자아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아파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지만,  결국 그러한 마음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황약사를 죽이지도, 그렇다고 사랑할 수도 없었던 모용언은 그렇게 괴로움에 몸부림을 칩니다. 그는 그러한 괴로움을 잊기 위해 검술 연마에 집착하고 결국 독고구패라는 이름의 검술의 고수가 됩니다.

 

 

그녀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없는 그들의 사정

 

황약사는 '취생몽사'로 사랑의 아픔을 잊으려합니다. 모용언은 모용연이라는 남성 자아를 만들어내 황약사를 죽여 사랑의 아픔에서 벗어나려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사랑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니까요.

하지만 18년 전이나, 그리고 바로 지금이나 [동사서독]을 보며 가장 제 마음을 아프게했던 맹무살수에게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사랑하는 아내인 도화(유가령)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황약사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된 맹무살수. 그는 황약사를 다시 만나면 그를 죽이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취생몽사'로 인하여 기억을 잃은 황약사를 만나자 그를 죽이지 못하고 뒤돌아섭니다. 도화가 사랑하는 사람을 차마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는 도화의 곁을 떠납니다. 어쩌면 맹무살수는 그것이 도화와 황약사의 관계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화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고, 점점 시력을 잃은 그는 마지막으로 도화를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려합니다.

 

어쩌면 맹무살수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도화를 보고 싶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사랑의 아픔만을 더욱 키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변명거리를 찾아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자돈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구양봉을 찾은 것이죠.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맹무살수. 하지만 그는 마적대를 상대로 마지막 혈투를 벌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화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녀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 곁에 돌아갈 수 없었던 맹무살수. 그는 그렇게 사랑으로 인한 아픔을 안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맹무살수의 목에서 피가 솟구쳐오르는 장면은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슬프고, 또 아름답습니다. "뛰어난 검객이 벤 상처에서 나는 피는 바람 소리가 난다고 한다. 내 피로 그 소리를 듣게 되다니..." 맹무살수가 죽는 순간 그의 나래이션은 제겐 오히려 편안하게 들렸습니다. 이제 더이상 사랑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는 맹무살수 뿐만은 아닙니다. 바로 구양봉 역시 처지가 같습니다. 그는 최고의 검객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자애인(장만옥)을 떠났고, 후에 자애인이 자신의 형과 결혼을 하려하자 그녀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그는 냉소적인 살인 중개인이 되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백타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구양봉은 맹무살수의 죽음 이후 자애인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을 다시한번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구양봉의 깨달음

 

어쩌면 [동사서독]은 구양봉의 깨달음에 대한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냉소적인 살인 중개인 구양봉. 그의 냉소적인 모습은 계란 몇개와 당나귀를 가지고 남동생의 복수를 해달라는 완사녀(양채니)의 부탁을 거절할때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후 완사녀는 구양봉의 집 근처를 떠나지 않고 하염없이 복수를 해줄 검객을 기다리지만, 끝내 구양봉은 그녀를 외면합니다.

하지만 홍칠(장학우)은 다릅니다. 그는 고작 계란 몇개로 완사녀의 청을 들어주고 복수를 해줍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댓가는 컸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잃었습니다. 그런 홍칠에게 구양봉은 묻습니다. "고작 계란 몇 개가 너의 손가락과 바꿀만큼 대단한가?"

완사녀가 구양봉에게 홍칠을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구양봉은 홍칠을 의원에게 데려가지 않습니다. 의원에게 데려가면 돈이 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구양봉에게 홍칠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소."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그 일을 했던 순수한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갔고, 이후 사막 너머도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후에 홍칠은 서독이라 불리던 구양봉과의 대결에서 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홍칠이 떠난 이후 구양봉 역시 자신이 머물던 집을 불태우고 길을 떠납니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맹무살수의 죽음으로 자신 역시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랑이 있었음을 깨달았고, 홍칠을 통해 최고의 검객이 되겠다며 자애인의 곁을 떠났지만 초심을 잃고 돈에 연연하는 살인 중개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봤던 것입니다.   

 

사막 너머에 아무 것도 없다며 냉소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던 구양봉은 그제서야 사막 너머 자애인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애인에 대한 슬픈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황약사가 남기고간 '취생몽사'를 꺼내든 구양봉. 사랑 따위는 잊고 최고의 검객이 되겠다던 구양봉은 자애인의 죽음 앞에 황약사가 그러했듯이 '취생몽사'로 사랑의 아픔을 잊으려한 것이죠.

하지만 '취생몽사'는 자애인이 구양봉에게 던진 농담이었습니다. 결코 '취생몽사'를 마신다고 해도 과거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자애인이 항상 하던 말입니다. 어쩌면 '취생몽사'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자애인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약사가 그러했듯이, 구양봉 역시 '취생몽사'를 마신 후 마치 과거를 잊은 듯한 행동을 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첫 장면과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구양봉은 결코 자애인을 잊지 못할 것이고, 그로인한 사랑의 상처 역시 안고 살테지만, 그는 잊은 척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동사서독]은 그리움에 대한 영화입니다. 구양봉은 자신이 자애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황약사 역시 자애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취생몽사'를 마셔버립니다. 맹무살수는 아내인 도화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동사서독]은 기다림에 대한 영화입니다. 자애인은 비록 구양봉을 거절했지만 평생 그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모용언은 황약사를 기다리고, 도화는 겉으로는 남편 맹무살수를 기다리지만 마음 속으로는 황약사를 기다립니다.(맹무살수는 죽기전 구양봉에게 부탁합니다. 황약사에게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라고.) 결국 [동사서독]은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겐 가슴 한켠을 쥐어짜는 잔인한 사랑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P.S. [동사서독 리덕스]를 볼 당시에는 18년 전의 감수성에 푹 빠져 허우적거렸는데, 하룻밤 사이 취생몽사에서 깨어났나봅니다. 막상 [동사서독 리덕스]의 영화 이야기는 40대의 감수성으로 쓰고 말았네요. ^^ 

 

결국 [동사서독]은 지독한 그리움과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주인공들을 고통을 끝으로 몰아넣는 잔인한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