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캡틴 필립스] - 미국의 영웅담이 아닌,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단상

쭈니-1 2013. 11. 1. 15:18

 

 

감독 : 폴 그린그래스

주연 : 톰 행크스, 바크하드 압디

개봉 : 2013년 10월 23일

관람 : 2013년 10월 30일

등급 : 15세 관람가

 

 

필립스 선장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나?

 

지난 2009년 4월, 미국의 화물선 머스크 앨라배마호가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되고, 선장 한 명이 나머지 선원들을 대신해서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국 역사상 200년 만에 벌어진 해적 납치사건으로 화제가 되었던 이 사건은 결국 소말리아 해적들은 소탕되고, 리차드 필립스 선장이 무사히 귀환함으로서 해피엔딩을 맞이했습니다.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으로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영화에서의 능력을 주목받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2회 연속 수상에 빛나는 연기파 배우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아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영화가 [캡틴 필립스]입니다.

사실 제가 [소원]을 보고나서 곧바로 [캡틴 필립스]를 선택한 이유는 [소원]을 보며 느꼈던 답답하고 먹먹한 기분을 미국의 영웅담인 [캡틴 필립스]를 통해 속시원하게 날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캡틴 필립스]는 속 시원한 액션을 곁들인 미국의 영웅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저는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필립스(톰 행크스) 선장에게 감정이입이 되었고, 그가 느꼈을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며 영화를 감상해야 했습니다.

 

특히 필립스 선장이 홀로 소말리아 해적들과 구명보트에 올라타고 나서는 폐쇄공포증적인 답답함에 짓눌린채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필립스 선장은 제이슨 본이 아니었기에 혼자 소말리아 해적들을 물리치는 그런 영웅담은 애초부터 [캡틴 필립스]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만 염두에 두고 영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캡틴 필립스]는 이들 영화보다는 오히려 [그린 존]과 비슷한 영화입니다. '본 시리즈'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이 다시 만나 화제가 되었던 [그린 존]은 이라크 전쟁의 승전 이후 사담 후세인이 숨겨 놓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제거하기 위해 이라크에 급파된 로이 밀러(맷 데이먼)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 정부의 추악한 진실만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린 존]에 이라크를 무대로 옮긴 화끈한 액션을 기대했지만,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듯이 [그린 존]에는 '본 시리즈'와 같은 화끈한 액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전쟁 이후 폐허가된 이라크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듯한 황량한 느낌만을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캡틴 필립스] 역시 정확히 그러합니다. 

 

 

어부였던 그들, 왜 해적이 되었나?

 

[캡틴 필립스]가 속시원한 미국의 영웅담이 되려면 소말리아 해적들은 무조건적인 악당으로 그렸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미해군이 해적들을 소탕했을 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필립스 선장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나쁜 놈들, 잘 죽었다.'를 외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캡틴 필립스]를 속시원한 액션영화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필립스의 일상과 함께 소말리아 해적인 무세(바크하디 압디)의 일상을 보여준 것 자체가 미국인 영웅인 필립스 선장과 소말리아인 해적인 무세를 같은 비중으로 표현하겠다는 관객을 향한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습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리배마호의 선장 필립스와 소말리아의 해적 무세. 이 둘은 서로 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쪽은 해적을 막고 앨리배마호와 선원을 지켜야 하고, 한쪽은 앨리배마호와 선원들을 인질로 미국에게 거액을 뜯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저는 필립스 선장이 무사하길 바라면서도 무세가 이끄는 소말리아 해적들에게도 동정심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영화의 오프닝씬을 보면... 편히 쉬는 무세와 그의 동네 사람들을 향해 총을 든 일련의 무리들이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에게 왜 일을 가지 않았느냐며 호통을 칩니다. 동네 사람들은 "지난 번에 대어를 낚아주지 않았냐?"며 항변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일이고 어서 빨리 대어를 낚어오라며 그들을 몰아부칩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어는 다른 나라의 선박을 뜻합니다.

 

이렇듯 무세를 비롯한 소말리아 해적들은 결국 그들이 보스라고 부르는 이들의 협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해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무세의 사정은 무세와 필립스의 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무세가 지난 번에는 그리스 선박을 납치해서 6백만 달러를 받아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필립스는 "그런데 왜 아직 이 짓을 하지?"라고 되묻습니다. 그렇습니다. 해적짓을 해도 무세와 그의 동료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목숨을 내놓고 해적짓을 하지만 그로인해 거액을 손에 쥐는 것은 그 뒤에서 숨어있는 군벌입니다. 결국 무세 역시 소말리아의 부패한 군벌에 이용당하는 힘없는 희생자일 뿐인 것이죠.

제가 해적에 불과한 무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세가 어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양의 어선들이 아프리카의 바다에서 물고기들을 싹쓸이해가고, 부패한 군벌은 가난한 어부들을 해적으로 내몹니다. 소말리아 해적들 사이에서도 갈비씨라고 놀림을 당하지만 카리스마 만큼은 주인공 못지 않던 무세가 "넌 어부도 아냐."라는 필립스의 한마디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저 어부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오랫 옛날부터 조상들이 어부로 살아왔고, 그들 역시 조상들처럼 어부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부로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들의 상황. 그렇기에 무세는 비록 해적이지만, 자신은 어부라며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최악의 순간 절정에 오르는 톰 행크스의 명연기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그린 존]에서 이라크인들의 사정을 그려냈던 것처럼, [캡틴 필립스]에서도 소말리아 해적들의 사정을 담아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캡틴 필립스]는 필립스 선장의 영웅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무세에게 동정심이 생긴다고 해도 해적인 무세를 응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톰 행크스는 필립스 선장을 완벽하게 연기했습니다. 영화의 초반, 앨라배마호에 탑승한 필립스 선장은 깐깐하게 선원들을 몰아부칩니다. 갑자기 비상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편히 쉬고 있는 선원들에게 '커피 다 마셨으면 일하라'며 채근하기도 합니다. 그런 깐깐한 필립스 선장을 바라보는 다른 선원들의 표정은 '귀찮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필립스 선장의 깐깐함은 실제 위기가 닥쳐오자 빛을 발합니다. 위기 대처 메뉴얼에 충실한 그 덕분에 해적들의 1차 공격을 막아냅니다. 하지만 해적들 또한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앨라배마호는 해적들에게 점령당합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그토록 열광했던 '본 시리즈'의 긴박한 스릴을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해적들이 앨라배마호을 점령한 중반 이후에 아낌없이 발휘한 것입니다. 해적들을 피해 숨어 있는 선원들. 선원들을 찾으려는 무세 일당. 영화는 액션이 난무하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숨어야 하는 선원들과 찾아야 하는 해적들의 숨바꼭질은 그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도 긴박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필립스 선장의 침착한 대응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전기를 통해 해적들이 선원들을 찾으러 나설 것임을 숨어있는 선원들에게 알려주고, 선원들이 숨어 있는 곳을 피해 해적들을 안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필립스 선장도 결국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시종일관 해적에 대항하여 침착한 태도를 보이던 그는 홀로 구명보트에 인질로 끌려간 이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좁은 구명보트. 사방이 막혀 있는 그곳에는 네명의 해적과 필립스 선장 뿐입니다. 그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죠. 필립스 선장은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미해군이 다가오자 이성을 잃은 해적들은 필립스 선장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필립스 선장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라는 절규와 함께...

[캡틴 필립스]는 영화를 3단계로 나뉩니다. 처음에는 필립스 선장과 무세의 상황을 설명하며 캐릭터를 완성했고, 두번째에는 앨라배마호에서의 필립스 선장과 해적의 대치를 통해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안겨줍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서는 구명보트에 홀로 인질이된 필립스 선장의 극한의 상황을 통해 침착함을 유지하던 한 인간이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결국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톰 행크스의 연기력은 바로 그 순간 절정에 오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앨라배마호가 운반하는 화물은 아프리카 구호 물자입니다. 필립스 선장이 그러한 사실을 무세에게 알리자 무세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 돕는 것을 좋아하지."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일까요? 비록 문명이 발전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동안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이 그러한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그들의 자원을 싹쓸이함으로서 그들은 가난해진 것입니다. "너희 배가 와서 싹 쓸어가버리면 우린 뭐가 남지?"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생색만 내는 그따위 구호물자가 아닌, 아프리카인들이 예전처럼 살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아닐까요? 소말리아의 해적을 욕하기 전에 그들이 해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먼저 알고 그것을 고쳐나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이미 [그린 존]을 통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의 석유이권에 대한 욕심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이라크 전쟁은 결국 서양에 대한 아랍계의 반감을 낳았으며, 그러한 반감은 전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테러범을 욕하기 이전에 그들이 테러를 하는 원인을 먼저 알지 못한다면 우린 영원히 테러와의 전쟁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소말리아 해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어부가 아닌 해적이 된 이유를 알고 문제점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뒤에 숨어 있는 부패한 군벌은 얼마든지 가난한 어부들을 해적으로 동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몇 해적들을 처치한다고해서 해적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본 시리즈'를 기대하며 미국의 영웅 필립스 선장의 감동적인 활약담을 기대한 분들에게 [캡틴 필립스]는 당황스럽고 지루한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15분이고, 영화의 후반부는 답답한 조명보트 안에서 진행되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답답함을 느끼도록 연출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린 존]에서도 그랬듯이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차분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합니다. 미국의 전형적인 영웅 이야기처럼 보였던 [캡틴 필립스]를 통해 소말리아 해적의 실상을 진솔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필립스 선장이 무사히 귀환하고, 무세는 체포되었어도 속 시원함보다는 아련한 여운이 느껴집니다.

분명 아직도 소말리아 해상에는 수 많은 해적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을 서양의 강력한 해군이 아무리 처치한다고 해도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듯이, 해적이라는 결과를 없애고 싶다면 원인부터 찾아서 해결해야 겠죠. [캡틴 필립스]를 통해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실제 소말리아 일반인들을 캐스팅했다고 한다.

어쩌면 연기 경력이 전무한 그들이 이렇게 사실적인 명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그들의 현실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