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준익
주연 : 설경구, 엄지원, 이레
개봉 : 2013년 10월 2일
관람 : 2013년 10월 30일
등급 : 12세 관람가
결국 보고 말았다.
지난 10월 15일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와 [프리즈너스]를 동시에 봤습니다. 그리고 10월 26일에는 [공범]을 봤습니다.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유괴 사건을 소재로한 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한 아이의 아빠로서 저는 이들 영화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소원]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원]은 유괴 사건을 소재로한 영화는 아니지만 술에 취한 아저씨한테 끌려가 폭행을 당한 9살 여자아이 소원(이레)이와 가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와 [프르즈너스]를 동시에 본 이후 며칠 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던 저로서는 손예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공범]을 보긴 했지만, [소원]만큼은 건너뛰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블로그 이웃이신 오퀸님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프리즈너스]도 오퀸님이 '영화 보시고 정리좀 해주세요.'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봤었는데, [소원] 역시 오퀸님이 '아빠라면 꼭 보셔야 해요.'라며 강추를 하시는 바람에 또다시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오퀸님... 이 글을 읽으신다면 저를 유혹에 빠뜨린 댓가로 제 블로그에 댓글을 아주 많이 달아주시길 바랍니다. ^^)
2013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서울에서 대구로 이동하는 휴식일인 10월 30일. 저는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 CGV에서 [소원]과 [캡틴 필립스]를 연달아 보고 왔습니다. (그러고보니 [캡틴 필립스]도 거의 포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오퀸님이 강추하셔서 보게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영화를 보며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사실 극장에서 다 큰 중년 남자가 혼자 훌쩍이며 영화를 본다는 것은 조금 창피한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그렇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제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막을 수가 없더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이 제 건너편 옆좌석의 콧물 감기에 걸린 젊은 남성 관객이 영화 관람도중 있는 힘껏 코를 푸는 소리가 여러번 들려와 짜증이 나는 바람에 영화에 깊숙이 빠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용기있게 코를 푸는 사람은 난생 처음입니다.) 그 덕분(?)에 더 많이 흘려야할 눈물을 조금이라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오퀸님은 이 영화를 제게 추천하시면서 힐링무비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온 제 마음은 힐링이 되기 보다는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9살 여자아이보다도 못한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상. 저 역시 그러한 세상에 일조한 어른으로서 소원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소원이가 꿈꾼 동화와 같은 세상
소원이는 참 예쁜 아이입니다. 철강소에서 일하는 아빠 동훈(설경구)은 회사일에 바쁘고, 집에 와서도 프로야구 보느라 소원이를 신경쓰지 못합니다. 작은 문방구를 운영하는 엄마 미희(엄지원)는 의도하지 않았던 임신과 빠듯한 가정 살림 때문에 역시 언제나 바쁘기만합니다.
하지만 소원이는 그런 아빠, 엄마를 원망하기 보다는 어른스럽게 이해해줍니다. 아빠, 엄마는 힘들고 바쁘니까... 9살 소원이는 그렇게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그런 아이입니다.
소원이가 좋아하는 <코코몽>은 착한 소원이가 꿈꾸는 동화와도 같은 세상입니다. 냉장고 나라의 소시지 원숭이 코코몽과 친구들의 모험은 세균킹이라는 악당 캐릭터가 등장하긴 하지만 언제나 밝고 활기차며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끝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코코몽>의 냉장고 나라가 아닙니다. 비가 조금 많이 오긴 했지만, 여느날과 다름 없는 등교길, 학교 앞에서 소원이는 몹쓸짓을 당합니다. 폭행을 당한 후에도 바쁜 아빠,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고 직접 112로 신고한 소원. 그런 소원앞에서 동훈과 미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영화의 초반, 소원이가 너무 귀여웠고, 기특했습니다. 그렇기에 곧이어 다가올 소원이가 당하게될 끔찍한 사건이 저는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동화같은 세상을 꿈꾸며 밝게 자라야할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한 소원. 그런 소원이에게 동훈과 미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범인이 잡혔다는 말에 동훈은 경찰서로 달려가지만 오히려 기자들에게 쫓겨 도망쳐 나옵니다. 미희는 그저 울부짖고 실신하며 스스로의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러한 동훈의 행동도, 미희의 분노도 소원이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며 너무나도 화가 났던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위해 소원이가 입원한 병실로 몰려드는 기자들. 그런 기자들을 피해 도망치듯이 병실을 옮겨야 하는 동훈과 미희에게 소원이는 묻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범인은 오히려 고개를 뻣뻣히 들고,"술에 취해서 아무런 기억이 안납니다."라는 진술만 되풀이합니다. 잘못한 것은 어린 소원이에게 몹쓸 짓을 한 범인이지만, 오히려 죄책감을 느껴야하는 것은 소원입니다. 내가 동훈이라면...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희망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어린 딸이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범인은 잡혔지만 심신미약을 핑계로 가벼운 처벌을 받으려합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동훈과 미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가끔 스릴러 영화에서 범인을 법의 심판이 아닌 스스로의 심판으로 처벌하는 주인공을 만나곤 합니다. 만약 제가 동훈이라는 저 역시도 그깟 12년 감옥에서 편하게 살다가 나오는 처벌보다는 직접 범인을 잡아 처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다르기에 우리는 복수를 하는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상상으로는 수십번 범인을 때려 죽이지만 현실에서 그저 바라만 보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무기력함에 의한 절망. 피해자가 고통과 공포에 떨고 있는 동안 피해자의 가족들 역시 무기력함의 절망의 수렁에 빠져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정숙(김해숙)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습니다.
소원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절망에 빠진 가족들에게도 희망을 갖게 하는 정숙의 조언. 사실 정숙 역시 동훈, 미희와 같은 상처가 있었기에 그러한 진솔한 조언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과연 현실에서 저런 일을 당했을 때 시기적절하게 정숙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도와줄까요?
그렇기에 저는 [소원]이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소원]을 추천한 오퀸님은 '영화 속에는 범인 빼고 다 착하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동훈의 친구이자 철강소 공장장인 광식(김상호)은 병원비로 궁핍한 동훈에게 "내가 마누라 몰래 든 적금이 있는데 필요하면 갖다 써."라며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미희의 친구이기도한 광식의 아내(라미란) 역시 성심성의껏 미희 돕기를 자처합니다. 미희가 광식의 아내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에서 저 역시 맘껏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훈이 다니는 철강소 직원들과 소원이의 학교 학부모들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동훈의 가족을 돕고, 어린 영석은 소원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는 것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정말 범인 빼고 다 착합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소원]을 보며 '참 다행이다. 저렇게 착한 사람들이 소원이의 주변에 있어서...'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이 영화가 현실이라면 오히려 정숙이 겪었던 것처럼 죽음보다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소원이 꿈꿨던 동화와도 같은 세상을 이준익 감독은 주변의 착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어나길 잘 했다.'라고 맘껏 외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소원이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매일 코코몽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동훈의 애틋한 노력 끝에 소원은 점차 닫힌 마음을 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영화는 아름다운 동화로 끝을 맺지 않습니다. 심신미약으로 12년형을 선고받는 범인을 통해 우리나라 법의 허점을 드러내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지막 분노를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하면 음주운전으로 처벌하면서 술을 먹고 어린 아이를 폭행하면 심신미약하라면 처벌을 감면해주는 이상한 우리나라의 법. 그러한 법의 허점은 언론을 통해 여러번 지적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감옥에 있을줄 아십니까?"라며 동훈을 협박하는 범인. 피해자인 소원이와 가족들은 또다시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법은 소원이와 가족들이 또다시 피해를 당하기 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동화를 벗어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단체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함이 아닐까요? 가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런 소수 역시 세금을 내는 국가의 국민입니다. 그러한 소수가 모여 다수가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국가는 법을 통해 국민 한명 한명 모두 빠짐없이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법 체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소원이의 경우만 보더라도 소원이는 너무 어린 나이에 평생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몸의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법은 그런 소원이와 가족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12년이 지나면 또다시 범인은 사회에 나올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것이죠. [소원]의 법정 장면을 보며 제가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소원]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소원의 가족은 다시 예전처럼 평온을 되찾고, 미희가 둘째를 낳자 소원이는 동생인 소망이에게 "태어나길 잘 했다."라고 말해줍니다. 태어나길 잘 했다... 그 한마디는 [소원]이 담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세상은 동화같지 않고 우리의 국가는 국민 개개인을 보호할 능력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와 함께 사는 착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길 잘 했다."
[평양성]의 흥행 실패로 은퇴를 선언했던 이준익 감독.
그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작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약속을 깨고 돌아왔다.
환영합니다. 그리고 외쳐봅니다. 돌아오시길 잘 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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