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국동석
주연 : 손예진, 김갑수
개봉 : 2013년 10월 24일
관람 : 2013년 10월 26일
등급 : 15세 관람가
만약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 범인의 가족이 [그놈 목소리]를 봤다면?
2007년 2월 우리는 충격적인 영화 한 편을 만났었습니다. [그놈 목소리]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현장 수배극이라는 매우 새로운 장르를 취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현장 수배극 [그놈 목소리]는 1991년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은 2007년 1월 공쇼시효과 만료되며 범인이 잡힌다고 하더라도 처벌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놈 목소리]는 어린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피해 가족의 한풀이와도 같은 영화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놈 목소리]는 단순한 한풀이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실화를 소재로한 스릴러 영화에서 벗어나 실제 범인의 목소리를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삽입하는 파격을 선보인 것입니다. [그놈 목소리]가 실제 유괴살인범의 목소리를 영화 속에 삽입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법적으로 범인을 처벌할 수는 없더라도 사회적으로라도 범인을 잡아 처벌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7년 [그놈목소리]는 300만명이 넘는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300만명의 사람들이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의 범인 목소리를 들었음을 뜻합니다. 아니, 300만명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놈 목소리]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TV 광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 등에서도 범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탔으니 만약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이 살아 있다면 상당한 압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놈 목소리]의 박진표 감독은 한가지 의문을 관객에게 묻습니다. 범인은 그렇다고치더라도, 과연 범인의 가족들은 [그놈 목소리]를 보지 않았을까요? 만약 봤다면 영화 속의 범인 목소리를 가족들은 알아 들었을텐데, 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을까요?
[공범]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다은(손예진)은 친구들과 논란이 되고 있는 영화 <악마의 속삭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 삽입된 한채진군 유괴살인사건의 실제 범인의 목소리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전형적인 딸바보 순만(김갑수).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잘 알기에 다은은 자신의 의심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그럴리가 없어.'라며 스스로 고개를 흔듭니다. 하지만 준영(임형준)의 등장으로 아버지의 감춰진 모습을 보게 되며 다은은 점차 혼란에 빠집니다. '정말 아버지가 범인일까?' 그리고 그러한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버립니다.
[공범]은 '[그놈 목소리]를 만약 범인의 딸이 보게 되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영화입니다. 그렇기에 [공범]은 [그놈 목소리]의 연장선에 서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도저히 [그놈 목소리]를 볼 수 없었던 저는 [공범]을 보며 속편의 개념이 아닌, 서로 다른 영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독특한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제목이 '공범'인 이유!
토요일 아침, 혼자 [공범]을 보고 왔습니다. 잔인한 영화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공범]을 함께 보는 것을 거부한 구피는 영화를 보고나온 제게 대뜸 "그래서 김갑수가 범인이야, 아니야?"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공범]은 순만이 정말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공범'입니다. 이러한 영화의 제목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국동석 감독은 순만이 범인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아버지를 의심하기 시작한 다은의 행동에 모든 역량을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다은이 유괴살인사건의 '공범'이 되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공범]은 시작부터 어린 다은과 그런 다은에게 애틋한 사랑을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 순만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곧이어 취업을 앞둔 대학원생 다은의 투철한 정의감을 보여줍니다. 다은은 면접 준비를 하며 어린 아이를 상대로한 잔인한 범행의 경우는 공소시효를 없애고, 법정 최고형을 선고해야 한다며 확고한 의지로 주장합니다.
이러한 영화의 초반부에서 [공범]은 다은과 순만의 관계, 그리고 다은의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냅니다. 하지만 곧이어 다은이 상영중인 영화 <악마의 속삭임>을 보며 다은과 순만의 관계가 조금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첫 단계는 의심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성향이 강합니다. 다은은 범인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비슷할 뿐이라며 스스로 자신의 의심을 지워버립니다.
이쯤에서 [공범]은 영화적인 극적 설정을 꺼내듭니다. [그놈 목소리]가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인 극적 설정이 끼어들 여지가 부족했던 반면, [공범]은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영화인 만큼 영화적 재미를 위한 극적 설정이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극적 설정은 다은이 순만을 의심하기 위한 장치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극적 설정이 바로 준영의 등장입니다. 순만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준영. 그러한 준영의 등장으로 순만은 그동안 감추고 살았던 단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저렇게 착한 아빠가 그럴리가 없어.'라고 생각하던 다은은 자신이 알고 있던 아빠의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순만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입니다. 이미 다은은 순만이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사망은 점점 좁혀져 한채진군 유괴살인사건의 담당형사인 강형사(김광규)가 순만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때맞춰 순만은 한채진군의 아버지인 인수(강신일)의 공격에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공소시효 만료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순만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다급해진 강형사는 다은에게 자백을 받으려합니다. 하지만 다은은 결국 입을 꾹 닫아버립니다.
당신이 다은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다은이 순만이 범인이라고 확신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그녀는 '공범'이 아닙니다. 그저 범인으로 유력한 용의자의 가족일 뿐이죠. 하지만 그녀는 순만이 범인이라고 확신을 가졌고, 그러한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수사에 협조를 하지 않습니다.
순만이 범인이건, 아니건, 그것은 어쩌면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범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 다은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채진군 유괴살인사건의 '공범'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공범]은 참 독특한 시선을 가진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다은입니다. 게다가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만큼 다은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영화의 초반, [공범]은 그러한 다은의 존재를 잘 이용합니다.
정의감이 투철한 다은. 아버지인 순만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순만을 향한 의심에 확신을 갖기 위해 진실을 캐내기 시작합니다. 확실히 다은은 진실에 다가서는 스릴러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이 되고, 다은이 순만이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그 순간 반전이 일어납니다. 관객들이 믿고 감정이입을 한 다은이 정의의 편이 아닌, 아버지의 편에 서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다은이 '공범'이 되기로 선택하는 그 순간, 다은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불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수가 다은의 뺨을 때려도, 강형사가 다은을 몰아부쳐도, 이미 다은에게 감정이입을 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항변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한 다은을 통해 국동석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이 다은이라면 공범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이 아니었을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다은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한 이유는 '아빠가 그럴리가 없어.'라는 다은의 가족에 대한 믿음을 저 역시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은이 진실을 밝히는 그 순간, 순만의 억울한 혐의도 벗겨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은이 순만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 준영을 범인으로 확신하고 진실이 밝혀지는 그 순간을 기다렸건만 결국 돌아온 것은 의심에 대한 확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이 과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과연 여러분이라면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하고 자백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은처럼 두 입을 꾹 다물어 버릴 까요? 순만의 혐의가 벗겨지는 속 시원한 결말을 원했지만, 제게 돌아온 것은 혼란스러운 감독의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상황에 빠졌다면 다은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그런 면에서 저 역시 '공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래서 난 손예진이 좋다.
[공범]은 우리 스릴러 영화의 진화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고 외치던 [살인의 추억]. 그러한 [살인의 추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은 [그놈 목소리]입니다.
박진표 감독은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고 싶다는 생각에 아예 범인의 목소리를 영화 속에 삽입하는 모험을 했습니다. '미치도록 잡고 싶다면 잡기 위한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줘라.'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미치도록 잡고 싶은 마음에 범인의 목소리를 영화 속에 삽입한 [그놈 목소리]조차 범인을 잡는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공범]을 통해 범인이 아닌, 범인을 숨겨주고, 입을 닫아버린 주위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옮깁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스릴러 영화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손예진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저는 손예진을 좋아합니다. 그녀의 예쁜 얼굴? 연기력? 아니,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가 맡은 과감한 캐릭터 때문입입니다. 손예진은 [연애소설],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예쁘장한 멜로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외출], [아내가 결혼했다],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캐릭터였습니다.
[공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찌보면 다은은 악역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다은의 선택에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 다은은 결코 스릴러의 선한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배우로서 다은을 연기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꺼려지는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 손예진은 언제나 그랬듯 다은을 무리없이 연기해냅니다.
물론 다은을 연기한 손예진이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은 김갑수의 연기가 뒷받침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속삭임>을 본 이후 순만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다은. 그녀는 영화 속의 범인 목소리를 듣다 잠이 듭니다. 그리고 꿈 속에서 잔인한 표정을 짓는 순만과 마주하게 됩니다.
[공범]에서 김갑수의 연기는 그런 식입니다. 너무나도 순박한 딸바보 아빠에서, 어느 한순간 악마적인 눈빛으로 변하는 무시무시한 표정까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다은 앞에서 순박한 표정으로 '난 아니야.'라며 애원하듯 말하는 순만의 모습을 보며 정말 그러한 순만을 믿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준영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의 표정 변화를 보면 정말 어느 것이 순만의 진짜 모습인지 알 수가 없는 혼란을 관객 역시 겪게 됩니다.
하지만 [공범]에도 아쉬운 점은 있었습니다. 실화라는 틀에서 벗어난 [공범]은 자유롭게 극적인 영화적 장치를 취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그러한 영화적 장치가 조금 과해보입니다. 특히 다은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은 다은과 인수의 대화 부분에서 너무 쉽게 드러난데다가, 조금은 억지가 섞여있어서 차라리 마지막 반전 없이 끝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공범]에게 올해 본 스릴러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스릴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 반전 문제가 아닌, 영화를 보는 제게도 추악한 범의 '공범'이 느껴야할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는 것은 그 어떤 스릴러 영화도 해내지 못한 성과이기에, [공범]은 한국 스릴러 영화의 한 획을 그을 만한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계속 나를 괴롭히는 질문은, 만약 내가 다은이라면???
아! 정말 '난 다은과는 달라.' 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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