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존 폴슨
주연 : 로버트 드니로, 다코타 패닝, 엘리자베스 슈, 팜케 젠슨
개봉 : 2005년 2월 25일
관람 : 2005년 2월 21일
이번주에 개봉되는 [숨바꼭질]은 주연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기대작 반열에 오를만한 영화입니다. 헐리우드에서 연기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천재적인 아역배우 다코다 패닝. 이 신구연기파 배우들의 조화는 영화외적으로 [숨바꼭질]을 상당히 매력적인 영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영화외적인 면에서 제 기대를 충족시켜준 영화라고는 하지만 스릴러라는 장르에 기초한 영화적인 재미부분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동안에는 로버트 드니로와 다코타 패닝의 섬뜩한 연기에 감탄을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나면 '로버트 드니로와 다코타 패닝으로 이렇게밖에 못만들다니...'라는 불만이 저절로 터져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제 불만은 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지난 1월 마지막주에 개봉된 [숨바꼭질]은 로버트 드니로와 다코타 패닝의 스타 파워에 의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지만, 2주차에는 저예산 공포 영화 [부기맨]에게 1위 자리를 물려주고 4위로 곤두박질치더니, 3주차에는 7위까지 떨어져 제작사에게 실망스러운 흥행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스릴러 영화에 대한 실망스러운 완성도가 로버트 드니로와 다코타 패닝의 이름만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실망시켰으며, 그 결과가 2주차 박스오피스 성적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버린 겁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제대로만 만들었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다코타 패닝의 천진스러운 얼굴뒤에 숨겨진 섬뜩함과 로버트 드니로 특유의 광기어린 연기, 게다가 조연으로 합세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엘리자베스 슈, [엑스맨]의 팜케 젠슨의 매력적인 모습을 오랜만에 만날수있으니 출연배우만 놓고본다면 더이상 완벽한 스릴러 영화가 나올수 없을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스릴러 영화는 배우놀음이 아닙니다. 매력적인 배우들도 분명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완벽한 시나리오였던 겁니다. 그런데 존 폴슨 감독은 안타깝게도 허술한 시나리오로 이 매력적인 배우들을 불러모은 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요? 로버트 드니로와 다코타 패닝의 조합에 부풀어질대로 부풀어진 제 기대는 이 영화의 어이없는 반전앞에 힘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시작부터 [숨바꼭질]을 몰아부쳤지만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특히 다코타 패닝의 연기는 그야말로 기대이상이었습니다.
다코타 패닝... [아이 엠 샘]에서 숀 펜의 그 천재적인 연기앞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그녀에게 [식스센스]의 할리 조엘 오스먼드와 더불어 천재적인 아역배우라는 칭송은 결코 과한 평가가 아니었습니다. [업타운 걸], [더 캣]과 같은 전형적인 아역배우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트랩터], [맨 온 파이어]와 같은 스릴러 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숨바꼭질]은 그런 다코타 패닝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된 영화입니다. [트랩터], [맨 온 파이어]에서 안타까운 피해자에 불과했던 그녀를 존 폴슨 감독은 가해자의 혐의를 덮어씌웁니다. 그는 다코타 패닝의 귀여운 모습과 천재적인 연기력이 섬뜩함에서도 빛을 발할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다코타 패닝은 그런 믿음에 완벽한 연기력으로 답하였습니다.
다코타 패닝과 더불어 이 영화의 팽팽한 긴장력을 이끌어나가는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는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이 최고였습니다. 비록 영화의 초반 로버트 드니로의 적지않은 나이덕분에 데이비드(로버트 드니로)와 에밀리(다코타 패닝)가 부녀관계가 아닌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암튼 확실한 것은 이번 영화에서도 로버트 드니로는 [케이프 피어], [더 팬]에서 보여주었던 광적인 연기의 진수가 맘껏 펼쳐진다는 겁니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슈와 팜케 젠슨의 조연 연기는 역시 반가웠다고 하지 않을 수 없네요. 특히 엘리자베스 슈의 경우 한때 제가 꽤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할로우 맨]의 실패이후 너무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볼수 없어서 안타까웠답니다. 비록 [숨바꼭질]에서 그녀의 역할은 미비했지만 그녀의 연기력과 매력은 결코 다코타 패닝, 로버트 드니로에 뒤지지 않는만큼 앞으로 그녀가 주연한 영화를 좀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영화의 칭찬은 여기까지... 존 폴슨 감독은 이처럼 매력적인 배우들을 영화속에 배치해놓고 정작 중요한 스릴러의 완성도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 듯 보입니다.
[숨바꼭질]은 시작이 참 좋습니다. 어머니의 자살을 목격한 어린 소녀, 그리고 외딴 시골 마을의 음습한 정적, 이상한 이웃, 그리고 소녀에게 생긴 정체모를 친구까지... 앞에서도 언급한 다코타 패닝과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력만으로도 영화의 초반 흡입력은 상당했습니다. 게다가 '숨바꼭질'이라는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음직한 놀이를 공포의 근원으로 설정한 신선한 소재까지 좋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가 영화와의 게임을 위해 데이비드와 감정을 이입시켜 에밀리의 비밀속 친구인 찰리의 정체를 벗기기위한 게임에 돌입하는 그 순간부터 영화는 곳곳에 헛점을 드러냅니다. 등장인물이 너무 적어 혐의를 둘만한 캐릭터가 별로 없었고, 이 영화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에 혐의를 두었지만 그러기엔 논리적인 상황에 적합한 캐릭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저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존 폴슨 감독이 제시한 단서에 의거해서 이것저것 수수께끼에 대입해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수수께끼는 미궁속에 빠져듭니다. 이 영화속 그 어떤 캐릭터도 찰리가 되기엔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한 셈입니다.
이렇게 제가 당황하는 동안 존 폴슨 감독은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관객에게 제시합니다. 분명 예상치못한 반전이었지만 그 반전으로인하여 영화의 쾌감이 느껴지기는 커녕 어이가 없어집니다. 존 폴슨 감독은 관객을 속이겠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나머지 관객에게 엉터리 단서들을 제시했으며 그 엉터리 단서들로인하여 관객들이 혼란에 빠지자 관객을 속였다며 즐거워한겁니다. 하지만 그건 정당한 승리가 아닌 엄연한 반칙에 불과합니다.
존 폴슨 감독이 관객에게 제시한 단서들은 한결같이 데이비드의 시점에서 제시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데이비드와 감정을 이입할 수 밖에 없으며 그의 시선에서 찰리를 뒤쫓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을 통해 존 폴슨 감독은 찰리는 바로 데이비드라고 말합니다. 그러고선 제가 데이비드의 시선에서 보았던 몇몇 데이비드의 행동들이 이중인격으로인한 헛깨비라고 주장합니다. 애초부터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단서라며 제게 제시한 셈입니다. 존 폴슨 감독은 처음부터 비겁한 반칙을 저지른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엉터리 스릴러일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반전 영화의 영원한 걸작 [식스센스]와 비교해서 설명해드리죠.
어찌보면 [숨바꼭질]의 마지막 반전은 [식스센스]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식스센스]에서도 저는 말콤 크로우 박사(브루스 윌리스)의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하고 영화를 즐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말콤이 사실 사람이 아닌 귀신이었다는 반전이 밝혀졌을때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처음엔 '말도 안돼'라고 불평을 쏟아냈었죠. 분명 영화속 다른 캐릭터들이 말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그가 귀신일 수 있냐고... 하지만 마지막 반전을 미리 알고 영화를 다시한번 본 후 저는 이 영화의 논리적인 단서에 놀랬습니다. 저는 말콤이 다른 캐릭터와 대화를 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제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뿐 말콤은 귀신을 볼수있는 콜(할리 조엘 오스먼드)이외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제 스스로 함정에 빠진 꼴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숨바꼭질]의 반전은 다릅니다. 이 영화 역시 제가 감정을 이입하고 있던 데이비드를 마지막 반전의 주인공으로 설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반전을 위해 존 폴슨 감독이 선택한 함정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장면들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제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다중인격이라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지만 영화를 보고있는 저는 다중인격자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는 것들을 제 눈으로 볼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존 폴슨 감독은 저까지 다중인격자로 설정하고 끊임없이 거짓 화면들을 보여줍니다.
이런 식의 함정이라면 이 세상에 관객을 속이지 못할 스릴러 영화는 단 한편도 없을겁니다. 제대로된 단서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단서를 쥐어주며 '날 이겨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수운 일입니다.
스릴러 영화는 명백히 관객과의 게임을 제시하는 장르의 영화입니다. 그래서 스릴러는 다른 장르의 영화들보다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렵습니다. 남을 속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하물며 영화관에 앉아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속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관객을 속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정당한 밥법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편법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반전이 아니라 사기죠. 존 폴슨 감독도 그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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