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안권태
주연 : 유아인, 김해숙, 김정태, 김성오, 정유미, 이시언
개봉 : 2013년 10월 2일
관람 : 2013년 10월 10일
등급 : 15세이상 관람가
난 밝은 영화가 보고 싶단 말이다.
남자의 계절이라는 가을이기 때문일까요? 요즘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가끔은 이유없이 우울해지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모든 하루 일과가 끝나는 밤 9시가 되면 그냥 마음이 허탈해집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무언가 저질러버리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저는 결국 그렇게 또 버티며 이 계절을 보내겠죠. 그래도 이런 가을 타기를 이길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을 찾으라면 역시 영화 뿐입니다.
문제는 마땅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봐야할 기대작들은 수두룩합니다. 2주간 극장 나들이를 하지 못한 탓에 극장 시간표에는 제가 보지 못한 영화들이 촘촘히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의 분위기가 굉장히 어둡다는 것이 저를 극장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영화는 왜그럴까요? 문화는 사회를 반영한다는데... 우리 사회가 어둡기 때문일까요? [깡철이], [소원],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까지... 최근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영화들은 무겁고, 아픈 영화들 뿐입니다. 저는 밝은 영화를 보고 싶은데 말이죠.
극장 시간표를 이리 저리 굴러봐도 코미디 장르의 영화는 오정세 주연의 [히어로]뿐입니다. 아픈 아들을 위해 어린이 드라마 '썬더맨'이 되는 우리 시대의 허당 아빠의 활약을 담은 이 영화는 그러나 역시 가볍게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요즘 제가 원하는 영화의 스타일은 부담없이, 생각없이 무조건 웃기는 [스파이] 같은 영화인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영화계에 정통 코미디 영화들이 씨가 마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국 제가 고른 영화는 [깡철이]입니다. 부산을 배경으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 순이(김해숙)와 함께 살고 있는 강철이(유아인)의 이야기를 담은 [깡철이] 역시 코미디와는 거리가 먼 영화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코미디 영화를 위해 이 싱숭생숭한 가을 밤을 의미없는 TV 시청과 인터넷 서핑으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내키지는 않지만 [깡철이]를 예매했습니다.
영화 시작 시간인 밤 9시 30분 이전까지 '그냥 예매를 취소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릴까?'라는 고민이 계속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 어딜봐도 '웃을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깡철이]를 봤다가 지금 제가 앓고 있는 가을병이 더 깊어질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침대에서 뒹굴거려도 가을병은 호전되지 않는 것을...
이 남자의 인생, 정말 치열하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됩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치매에 걸린 순이가 말썽을 피웁니다. 높은 목욕탕 굴뚝으로 겁도 없이 성큼 성큼 올라가는 순이. 동네 경찰도 그러한 순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강철이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행동에 강철이는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아마도 이런 일을 한두번 겪어본 것이 아닌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밑에서 안절부절이지만 강철이는 순이가 원하는대로 천연덕스럽게 노래까지 불러줍니다.
[깡철이]의 첫 인상은 그러했습니다. 솔직히 강철이가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안좋습니다. 하나뿐인 가족인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것도 모자라 당장 콩팥을 이식받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도 모를 처지입니다. 하지만 강철이에겐 돈이 없습니다. 부두 하역장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그에게 쥐어진 돈으로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도 빠듯합니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종수(이시언)는 깡패입니다. 언제 칼침을 맞아 죽을지도 모르지만 종수는 '나는 너처럼 살지 않겠어.'라며 으시댑니다.
이 모든 것이 강철이를 답답하게 만듭니다. 탈출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죽음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를 살릴 수도, 죽기를 바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강철이는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마치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는 듯이...
그렇기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강철이의 미소가 제겐 아름답게 보여졌습니다. '세상이 언제 우리 편인 적이 있었어?'라고 외치는 종수와는 달리 강철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 들이며 결코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권태 감독은 강철이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강철이를 더욱 궁지로 몰아세우며 그의 희망을, 그의 미소를 끝내 빼앗아 버립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강철이였기에 '죽었으면 좋겠다... 엄마가!'라며 오열하는 그의 모습은 더욱 아프게만 느껴졌습니다.
종수가 저지른 일의 수습과 순이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강철이가 부산의 사채업자인 상곤(김정태), 휘곤(김성오) 형제와 얽히며 영화의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집니다. 영화의 초중반만해도 강철이의 풋풋한 미소와 치매에 걸린 순이의 귀여운 행동으로 밝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던 [깡철이]는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영화를 어두운 분위기로 감싸 버립니다.
영화를 보며 저는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강철이의 인생이 너무 치열했고, 그 어디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기에, 버스 안에서 강철이가 순이를 붙잡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에서는 나도 그냥 목놓아 엉엉 울고 싶어졌습니다. 깡패같은 이 세상, 깡하나로 버텼던 강철이. 과연 그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뜬금없는 웃음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
[깡철이]는 참 이상한 영화입니다. 영화 자체는 무겁습니다. 스토리 라인의 그 어디를 봐도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공간 따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 영화에서 억지로 웃기려 한다면 영화 자체가 어색해질 수 밖에 없으므로 오히려 웃기지 않는 것이 영화의 완성도 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영화는 웃깁니다. [스파이]처럼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웃을 수 있지는 않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관객의 웃음보를 터트립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분위기일 수 밖에 없는 영화에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관객을 웃게 만들었는데, 그러한 웃음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깡철이]가 그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 아니 캐릭터가 휘곤입니다. 부산 사채업자인 상곤의 동생이자 상곤의 보디가드이기도한 휘곤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막무가내식 깡패입니다.
그런데 그의 첫 등장에서 그만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립니다. 휘곤은 흥분하면 말을 더듬고 혀 짧은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귀여운 혀 짧은 소리를 내는 휘곤 앞에 긴장된 분위기로 영화를 감상하던 저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휘곤의 캐릭터가 그저 관객을 웃기기 위해 억지로 설정된 것이 아니기에 휘곤에 의한 웃음은 어색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권태 감독은 휘곤이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다는 캐릭터 설정으로 휘곤의 캐릭터를 짧고 굵게 설명합니다. 사실 휘곤은 [깡철이]에서 강철, 순이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사고를 저질렀기에 강철이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져드는 것이죠. 휘곤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상곤은 강철을 사건에 끌어들입니다. 절대 깡패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강철 역시 상곤이 쳐놓은 치밀한 덫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휘곤의 말더듬이는 이렇게 중요한 휘곤의 캐릭터를 관객에게 강렬하게 인식시킴과 동시에 휘곤의 막무가내식 성격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어둡기만한 이 영화에 잠시나마 웃음을 안겨줬으니 [깡철이]에서 휘곤의 말더듬이는 신의 한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휘곤 외에 또한번 웃을 수 밖에 없는 장면은 잠시 정신이 돌아온 순이가 강철이를 위해 김밥을 만드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은 '우리 똥강아지, 유치원에 가야지.'라며 강철이에게 유치원 가방을 들려주는 순이의 순수한 미소였습니다. 잠시 감동 모드로 진입하다가 갑작스러운 유치원 가방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장면의 웃음이 역시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웃음이 아무 생각없이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웃게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순이는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인 강철이가 어렸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겠죠. 그러한 순이의 마음을 알기에 웃으면서도 눈물이 났습니다.
깡으로 이 세상과 맞짱 뜨다.
영화는 후반부로 흘러가고, 강철이는 예정된 비극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무리 강철이라 할지라도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강철이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깡패같은 세상, 깡으로 버티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강철이. 영화를 보며 저 역시 마지막 비극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제 머리 속을 계속 맴도는 것이 있었으니 파출서에서 잠시 정신이 돌아온 순이가 강철이에게 '엄마가 꼭 니 신세 갚고 죽을게.'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러한 순이의 약속은 지켜집니다.
어쩌면 강철이의 모든 비극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지만, 반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강철이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빛 역시 어머니였습니다. 이 묘한 아이러니는 영화 내내 강철이를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았던 영화에서 나름 조용히 준비된 해피엔딩이기에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개운한 감동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깡철이]를 보며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들은 누구 하나 흠잡을 수 없는 만큼 완벽한 연기를 해냈고, 스토리 전개 역시 탄탄했습니다. 캐릭터 구축도 잘되었고, 라스트 엔딩까지 가는 동안 무리수 없이 영화가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좋았던 것은 수지(정유미)와 강철이의 로맨스였습니다. 처음 서울에서 여행온 수지가 등장하여 강철이와의 로맨스를 예고했을 때에는 두 사람의 로맨스가 영화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깡패들이 득실거리는 남성 영화에서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는 남자 주인공의 비극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비운의 여성이거나 알몸을 드러내는 눈요기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수지 역시 강철이의 비극 뒤에 남겨지는 비운의 여자 주인공 쯤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수지는 남성 캐릭터가 득실대는 영화에서 주변에 머물며 눈물이나 흘리는 그런 캐릭터가 아닌, 치열한 인생을 사는 강철이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만약 수지가 없었다면 강철이가 어머니의 부재를 견딜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한 깡패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강철이에게 있어서 수지의 존재는 중요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철이의 인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가진 것 하나 없고, 배운 것 하나 없는 강철이는 앞으로 살아가야할 나날이 많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삶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수지와의 사랑은 강철이에게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순이처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깡으로 이 세상과 맞짱 뜬 강철이라면 남은 인생도 깡으로 싸워나갈 것입니다. 부디 강철이가 사는 세상은 깡만으로도 살 수 있는 곳이길 마음 속으로 바래봅니다.
세상이 깡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지막 강철이의 모습이 불안해보였지만,
어쩌면 강철이라면 깡만으로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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