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러시 : 더 라이벌] - 라이벌이 있기에 그들은 행복했네.

쭈니-1 2013. 9. 25. 17:10

 

 

감독 : 론 하워드

주연 : 크리스 헴스워스, 다니엘 브륄, 올리비아 와일드

개봉 : 2013년 10월 9일

관람 : 2013년 9월 24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내 인생에 라이벌이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라이벌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중요시했기에 친구는 많았지만 내 인생의 목표에 자극제가 될만한 라이벌은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라이벌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 인생 자체가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잔잔하게 흘러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목표를 달성하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기 보다는 그저 무난하게 인생을 살았던 것이죠. 

사실 그러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저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었습니다. 장래 희망은 있었지만,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다보니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만약 제게 라이벌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러한 라이벌의 존재가 제 삶에 자극제 역할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저는 라이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내 삶의 목표를 뚜렷하게 정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러한 라이벌이라는 존재는 내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라이벌을 가진 이들은 운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죠.  

 

여기 동시대에 같은 꿈을 가지고 살았던 라이벌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제임스 헌트(크리스 헴스워스)와 니키 라우다(다니엘 브륄). 이 두 사람은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레이서에게 있어서 꿈의 무대인 F1에서 최고의 레이서가 되는 것이죠.

타고난 본능적 천재 레이서 제임스 헌트와 철저한 노력파 천재 레이서 니키 라우다. 그들은 성격도 다르고, 레이싱에서의 스타일도 전혀 딴판이지만 서로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최고의 라이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러시 : 더 라이벌]은 1976년을 주요 무대로 F1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였던 제임스 헌트와 니키 라우다의 세기의 대결을 영화로 옮겼습니다. [분노의 역류], [파 앤드 어웨이], [아폴로 13], [뷰티풀 마인드], [신데렐라 맨] 등 수 많은 걸작을 남긴 론 하워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토르 : 천둥의 신], [어벤져스],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영웅 크리스 헴스워스와 우리에겐 조금 낯선 배우인 다니엘 브륄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러시 : 더 라이벌]의 시사회에 초대받았지만 이 영화가 레이싱 영화라고 소개하자 구피는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네."라며 거부 의사를 밝혀 혼자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나중에 구피는 자신이 좋아하는 크리스 헴스워스 주연의 영화라는 사실을 안 후에 "왜 내게 그 이야기는 안해줬냐?"며 격렬하게 따졌습니다.) 실제로 시사회장에서도 여성 관객보다 남성 관객이 더 많아보였던 영화 [러시 : 더 라이벌]. 남자들의 거친 레이싱 세계를 담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임스 헌트 VS 니키 라우다. 당신은 누구 편?

 

[러시 : 더 라이벌]은 1976년 뉘르부르크링에서 니키 라우다의 나래이션으로 시작합니다. 그 순간 저는 '이 영화는 니키 라우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1970년대로 무대가 옮겨지자 이번엔 제임스 헌트의 나래이션이 흘러 나옵니다.

영화에서 캐릭터의 나래이션은 그 영화가 그의 시점으로 진행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영화에서 나래이션은 어느 한 캐릭터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가 대표적인 경우이죠.

[위대한 개츠비]는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의 나래이션으로 시작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지만, 영화는 닉 캐러웨이의 시점에서 진행됨으로서 개츠비의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게 만든 것입니다. 처음 니키 라우다의 나래이션이 흘러 나올 때 저는 [러시 : 더 라이벌] 역시 니키 라우다의 시점에서 자신의 라이벌인 제임스 헌트의 인생을 바라보는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예상이 깨진 것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였습니다. 바로 제임스 헌트의 나래이션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죠. 결국 [러시 : 더 라이벌]은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를 동등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니키 라우다의 시점에서 제임스 헌트를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에서는 제임스 헌트의 시점에서 니키 라우다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러시 : 더 라이벌]은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를 동등한 시선으로 그려냈지만 영화를 보는 저는 둘 중의 누구 하나를 선택해서 그를 응원하며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마음 속으로 응원한 것은 바로 제임스 헌트입니다. 스피드를 즐기는 질주 본능, 주체할 수 없는 자신감, 그리고 너무나도 섹시한 플레이 보이 등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제임스 헌트는 제가 가져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에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니키 라우다는 레이서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입니다. 대개 영화를 통해 본 레이서의 이미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항아입니다. 제임스 헌트가 딱 그러한 캐릭터라면 니키 라우다는 그와는 반대로 조금은 재수가 없는 모범생 이미지입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유머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그는 친구도 별로 없었고, 독일의 뉘르부르크링 대회에서는 너무 위험하다며 경기 취소를 주장하며 모험 보다는 안전을 우선시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영화를 보며 제임스 헌트를 응원했고, 제임스 헌트의 후원사가 자금 문제로 해체되자 자존심을 버리고 멕라렌에 입단하는 과정, 부인인 수지(올리비아 와일드)와의 이별의 아픔을 딛고 챔피온인 니키 라우다의 뒤를 맹추격 할때 마음 속으로 '제임스, 니키를 이겨버려!'를 외친 것이죠. 급기야 뉘르부르크링 대회에서 경기 취소를 주장하던 니키 라우다에 대항하여 결국 경기가 속행하도록 이끈 제임스 헌트의 모습에 속이 시원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캐릭터는 제임스 헌트, 스토리는 니키 라우다

 

하지만 뉘르부르크링 대회에서의 사고로 니키 라우다가 목숨이 위태로운 화상을 입자 영화의 분위기도, 그리고 일방적으로 제임스 헌트를 응원하던 내 마음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뉘르부르크링 대회에서의 사고로 얼굴에 끔찍한 화상과 유독가스 흡입으로 인하여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 된 니키 라우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역경을 딛고 다시 레이서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영화 속에서 뉘르부르크링 대회 취소를 원했던 니키 라우다에 반대해서 대회 속개를 주장하던 제임스 헌트는 죄책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얄미운 니키 라우다의 주장이 무시되고 제임스 헌트가 주장하는대로 뉘르부르크링 대회가 속개된 것에 속 시원함을 느꼈던 저 역시 니키 라우다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상황입니다. 두 라이벌의 대결을 다룬 영화라면 당연히 관객 입장에서 둘 중의 누군가의 편이 되어야 영화가 더욱 재미있어 집니다. 만약 관객 스스로를 누구의 편도 되지 못한채 객관적인 입장으로 둘의 대결을 바라보게 만든다면 최동원과 선동렬의 세기의 맞대결을 담은 영화 [퍼펙트 게임]처럼 영화 자체가 싱거워지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러시 : 더 라이벌]은 해냈습니다. 처음엔 캐릭터가 매력적인 제임스 헌트를 응원하게 만들었던 이 영화는 니키 라우다가 역경을 딛고 다시 레이스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임스 헌트는 물론 니키 라우다도 함께 응원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니키 라우다에겐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스토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6년 시즌 F1의 우승 향방이 결정되는 일본 그랑프리 대회 장면은 [러시 : 더 라이벌]에서 굉장히 중요한 하이라이트가 됩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닌 제임스 헌트도, 그렇다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지닌 니키 라우다도, 일방적으로 응원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둘 다 F1 우승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승부의 세계입니다. 관객 입장에서 제임스 헌트를 응원하기도, 그렇다고 니키 라우다를 응원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 그랑프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러시 : 더 라이벌]은 바로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극적인 재미를 이끌어내고 맙니다. 그것이 [러시 : 더 라이벌]의 해낸 미덕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실존 인물인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가 해낸 세기의 대결 덕분입니다. 만약 이 영화가 실화가 아니라면 일본 그랑프리의 결말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일본 그랑프리 장면은 너무 극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러시 : 더 라이벌]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캐스팅에서부터 싱크로율을 중요시하며 배우를 영입한 영화인만큼 영화 속의 상황 역시 실제 상황을 고스란히 옮겼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일본 그랑프리 장면을 보며 '너무 작위적이다.'라고 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76년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대결이 왜 F1 역사상 가장 극적인 세기의 대결인지 영화를 보고나니 비로서 알겠더군요.

 

 

라이벌이 있기에 그들은 행복했네.

 

일본 그랑프리가 끝나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 : 더 라이벌]은 끝나지 않고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모습을 한참 더 보여줍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승자도, 패자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임스 헌트에게 니키 라우다라는 라이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제임스 헌트는 F1의 마이너인 F3에서 잘나가는 레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통제 불능이었고, 괴팍했으며, 말썽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격 때문에 기업의 이미지를 중요시여기는 스폰서를 잡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후원하던 후원사가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고 자금난으로 해체되자 제임스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멕라렌에 애원하다시피해서 입단합니다. 그러한 그의 굴욕(?)은 니키 라우다를 이기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통제불능의 야생마 제임스 헌트는 니키 라우다를 이기기 위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며 자신의 자존심을 꺾은 것입니다.

만약 니키 라우다라는 라이벌이 제임스 헌트의 인생에 없었다면 그는 그저 F1의 못말리는 통제불능 말썽꾼으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니키 라우다가 있었기에 그는 F1 역사상 가장 극적인 명승부를 펼친 레이서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라이벌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니키 라우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었고,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는 철두철미함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임스 헌트가 없었다면 니키 라우다는 1976년 독일의 뉘르부르크링 대회에서 사고를 당한 불운의 레이서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화상 치료를 받으며 제임스 헌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니키 라우다. 결국 그는 제임스 헌트에게 우승을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니키 라우다의 화상 치료 장면 중에서 폐에 관을 집어 넣어 이물질을 빼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 고개를 돌릴 만큼 괴로운 장면이지만 니키 라우다는 의사를 한번 더 하자며 불러 세웁니다. 화상으로 피부를 이식한 얼굴에 억지로 헬멧을 쓰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니키 라우다의 의지는 그렇게 확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 뒤에는 제임스 헌트가 있었습니다. 제임스 헌트라는 라이벌이 있었기에 그는 불운의 사고를 딛고 재기할 수 있었고, 후에 F1을 대표하는 명레이서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겨야할 적이 있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니키 라우다가 한 말입니다.

[러시 : 더 라이벌]이 끝나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F1를 은퇴후 방송인이 되어 인생을 즐기다 4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은 제임스 헌트도, 월드 챔피언 3회에 빛나는 니키 라우다도, 라이벌이 있었기에 후회없는 인생이었다는...

 

 

니키 라우다는 말했다. 제임스 헌트가 부러웠다고.

어쩌면 제임스 헌트 역시 니키 라우다가 부럽지 않았을까?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라이벌이 있었기에

그들의 이름은 F1 역사에 길이 남겨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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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