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한재림
주연 : 송강호, 이정재, 백윤식, 조정석, 이종석, 김혜수
개봉 : 2013년 9월 11일
관람 : 2013년 9월 12일
등급 : 15세 관람가
올해 추석 최고의 흥행 기대작?
올해 추석 극장가의 흥행 전쟁은 [스파이]와 [관상]의 대결로 좁혀졌습니다. [스파이]가 먼저 9월 5일 개봉하여 개봉 첫주 누적관객 100만을 넘기며 선제 공격을 날렸습니다. 이에 [관상]은 9월 11일 개봉하며 개봉 첫날 37만 관객을 동원하며 본격적인 전쟁 선포에 나선 것이죠.
현재 상황으로서는 [관상]의 낙승이 예상됩니다. [스파이]가 선제 공격을 날렸다고는 하지만 [관상]의 개봉과 함께 흥행세가 상당히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9월 11일 일일 박스오피스만 봐도 1위 [관상]이 37만 관객을 동원한데 비해, [스파이]는 5만명을 동원하는데 그쳤습니다.
올해 추석에는 제 개인적으로 보고 싶은 영화가 넘쳐납니다. [스파이]는 시시회로 이미 봤지만, 새롭게 개봉한 영화 중에서 [관상]을 비롯하여 [섀도우 헌터스 : 뼈의 도시], [퍼시 잭슨과 괴물의 바다], [몬스터 대학교], [슈퍼 배드 2] 등. 추석 연휴가 5일이나 된다고 하지만 이들 영화를 모두 보려면 추석 연휴가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가 고른 첫번째 영화는 [관상]이었습니다. 구피에게 [관상]을 예매했다는 문자를 보내자 구피는 '왜 [관상]이야?'라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왜 저는 수 많은 기대작 중에서 가장 먼저 [관상]을 선택했을까요? 개봉 첫날 보여준 [관상]의 압도적 흥행 때문이기도 하고, 사극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과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라는 초호화 캐스팅에 대한 믿음도 다른 영화들을 제쳐두고 [관상]을 예매한 이유입니다.
목요일 저녁. 갑작스럽게 회사 회식이 잡혔지만 저는 [관상]을 보기 위해 회식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5월 이후 술을 끊은 탓에 회식 자리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곤욕이긴 하지만, 그 만큼 [관상]을 보고 싶다는 내 마음 속의 의지 또한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큰 기대를 안고 봤던 [관상]은 그러나 제 기대를 채워준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관상]에 대한 제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분명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특히 이정재, 백윤식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송강호, 조정석의 능글맞은 코믹 연기, 그리고 김혜수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녀 연기가 어우러져 영화는 강약을 조절하였습니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의 이야기 또한 흥미진진했습니다. 제가 사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인생을 살았던 실존인물들의 파란만장함이 좋기 때문입니다.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수양대군의 야망. 그러한 수양대군을 막으려는 김종서의 충심. 여기에 김내경(송강호)를 비롯한 가상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해져 영화의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영화의 장르, 시대적 소재도 좋았지만, 2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이 조금 길게 느껴질 정도로 영화의 진행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구피는 영화를 보고나오며 이준익 감독의 사극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떠오른다고 하네요. [관상]에 대한 딱 알맞은 표현인듯합니다.
코믹 분위기가 진지모드가 넘어가는 시점
영화의 시작은 산 속에 칩거해있는 천재적인 관상쟁이 내경(송강호)을 한양의 유명한 기생 연홍(김혜수)이 찾아오면서 부터입니다. 납루한 차림의 내경과 내경의 처남이자 떠벌이인 팽헌(조정석), 그리고 화려한 여우같은 연홍의 초반 기세 싸움은 영화의 분위기를 코믹하게 몰고 갑니다.
이후 내경과 팽헌은 한양으로 올라가 연홍의 기생집에서 양반들의 관상을 보는 일을 하기로 합니다. 촌놈에 불과한 내경과 팽헌이 눈 뜨고 코 베인다는 한양에서 연홍의 계략에 넘어가 노예 계약을 맺는 장면이 이어지며 [관상]의 코믹한 분위기는 계속됩니다.
사실 송강호라는 배우가 무엇을 해도 관객의 웃음보를 터트리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배우이고, 거기에 [건축학개론]의 납득이로 코믹 조연배우의 떠오르는 샛별 조정석이 가세했기에 [관상]의 코믹한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에 김혜수마저 그동안 숨겨왔던 코믹 연기를 펼쳐 보이니, 영화의 초반은 웃다가 후다닥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관상]은 코미디 영화가 아닙니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수양대군의 시대가 코믹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내경의 아들인 진형(이종석)의 존재는 처음부터 '난 코믹함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갈 생각이 없어.'라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진형은 출세에 관심이 없는 내경과는 달리 관직에 올라 백성들의 억울함을 줄여 주겠다는 야망을 가진 인물입니다. 내경은 진형의 관상을 보며 관직에 오르면 화를 입을 상이라고 말함으로서 영화 후반의 비극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의 초반 내경과 팽헌, 그리고 연홍을 내세워 코믹한 분위기로 영화를 끌고 가던 [관상]은 중반부에 갑자기 영화를 진지모드로 변경시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연결고리가 헐겁습니다.
사실 내경은 관직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돈이나 벌어보려고 연홍의 기생집을 찾았고, 얼떨결에 맺은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고자 꼼수를 쓰다가 당대의 세도가 김종서와 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는 역적 집안의 자손이기에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으며, 오히려 관직에 오르겠다는 야망을 가진 진형을 걱정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수양대군(이정재)은 내경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내경과 팽헌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끌려가 죽을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쯤되면 내경과 팽헌의 특성상 돈과 권력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하지만 내경의 선택은 김종서의 사람이 되어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권력 다툼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경의 선택 때문에 영화는 코믹한 분위기에서 일순간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섭니다. 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기 위해 내경의 표정은 심각해졌고, 영화의 초반 내경과 함께 코믹 모드를 주도했던 팽헌과 연홍의 비중은 확 줄어듭니다.
결국 [관상]은 초반의 코믹 모드와 중반 이후의 진지 모드를 잘 조율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른 셈입니다. 만약 제가 [관상]의 각본가라면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권력 다툼에서 그 어느 편에 서지 않은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며 노력하던 내경이 뛰어난 관상쟁이라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원하지 않은 권력 다툼의 한가운데에서 비극을 맞이하는 설정을 그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종의 비극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내경이 김종서의 사람이 되어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기 위해 노력하며 그 순간부터 영화는 뻔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관상]이 김내경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영화라고는 하지만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권력 다툼의 결말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의 역모는 성공합니다. (설마 이걸 스포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시겠죠?) 그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되어 14년간 조선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러한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적 사실 아래 내경이 스스로 김종서의 사람이 되면서 [관상]은 예정된 비극 속으로 묵묵히 제 갈길을 걸어간 셈입니다.
분명 내경은 예정된 비극을 바꾸기 위해 온갖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그 중에서 수양대군의 이마에 세개의 점을 찍어 역모상으로 만드는 에피소드는 갑작스러운 진지 모드로 인하여 비중이 확 줄어든 연홍의 활약상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웠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못합니다.
단종이 내경의 활약으로 믿고 따르던 수양대군의 역모를 의심하고 그를 귀양보내려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단종도, 내경도, 김종서도 모르는 사실을 관객들은 잘 알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수양대군을 귀양보내 그의 역모 음모를 막으려는 내경과 김종서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안타깝게도 관객들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제가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차라리 가상의 역사를 내세웠다면 결말을 알 수 없었기에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었겠죠. 아니, 내경이 김종서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펼치는 대결의 결말은 알아도 내경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기에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상]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관상]의 후반부는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이 아닌, 하나 뿐인 아들 진형을 구하기 위한 내경의 눈물겨운 부성애로 흘러가 버립니다.
초반의 코믹 모드, 중후반의 진지모드를 거쳐 결말부분에 가서는 감동 모드로 넘어간 셈인데... 이 모든 것이 너무 예상 가능하여 송강호가 아무리 열연을 펼쳐며 눈물을 흘려도 찡한 감동이 가슴속 깊숙이 울려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한가지 영화의 후반부에서 인상적인 것은 바로 정체 모를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의 정체가 밝혀지는 부분이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관상]의 캐스팅 라인에도 소개되지 못한 이 배우는 섬뜩한 연기력으로 예정된 비극 속에 담담하게 영화를 감상하던 제게 소름이 쫘악 끼치게 하였습니다. 예전 TV에서 이덕화가 주연을 맡은 <한명회>라는 사극 드라마가 생각났습니다. 서인석이 세조를, 정태우가 단종을 맡았었죠. 그 드라마에서 단종을 맡은 정태우의 연기도 정말 대단했지만 이덕화가 맡은 한명회라는 주인공의 섬뜩함이 정말 인상깊었었습니다.
[관상]은 영화의 초반에는 문종(김태우)의 모습을 감췄다가 극적으로 드러내고(내경이 문종을 처음 알현하는 장면), 중반에는 수양대군의 정체를 감췄다가 문종이 죽은 후에야 수양대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드러냈으며, 후반에는 영화 내내 베일에 쌓여 있던 한명회의 정체를 밝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의 한계를 한재림 감독은 역사적 인물을 감췄다가 극적으로 드러내며 뛰어 넘으려 했던 것입니다.
호랑이와 이리 사이에서 그들이 사는 법
엄밀하게 따진다면 [관상]은 낙제점수를 줘야할 만큼 엉망인 영화는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단 배우들의 연기력은 일취월장합니다.
특히 저는 이정재를 다시 봤습니다. 그의 연기가 카리스마 넘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도둑들]에서도 카리스마는 김윤석의 차지였으니까요. 오히려 김혜수의 카리스마가 이정재를 압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관상]에서 이정재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백윤식, 송강호 등과 맞붙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이정재의 카리스마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은 수 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 세조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관상]을 본 후 '정재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던 배우였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영화에서 김종서는 용맹한 호랑이 상으로, 이에 맞서는 수양대군은 한번 물면 결코 놓치지 않는 악랄한 이리 상이라 설명합니다. 호랑이와 이리라는 맹수가 싸우는 가운데에 뛰어든 것만으로도 내경의 비극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벼슬에 올라 백성들의 억울함을 덜어주겠다는 진형의 이상을 들은 내경은 '나도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어야 겠다.'라고 선언합니다. 내경이 죽음을 무릅쓰고 김종서의 사람이 된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경은 파도만 봤을 뿐,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아무리 운명을 바꾸려 노력해도 한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죠.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으려 했던 내경의 노력은 바람을 미처 보지 못했기에 허무하게 막을 내립니다. 결국 내경은 관상에는 능통하였으나 호랑이와 이리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영화 [관상]의 아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도 뻔뻔해서 오히려 새로웠던 [연애의 목적]과 조폭의 세계를 우리 시대의 힘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비유했던 [우아한 세계]로 평단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한재림 감독. 그는 [관상]을 연출하면서 호랑이와 이리의 싸움이라는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채택합니다.
하지만 내경이 호랑이와 이리 사이에서 죽음과도 같은 결말을 맞이했듯이 [관상] 역시 단종의 비극과 수양대군의 역모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효과적인 영화적 재미를 구축하는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내경이 그러했듯이 한재림 감독은 파도만 봤을 뿐, 바람을 보지 못한 것이죠.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관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만든 사극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만듦새가 배우들의 연기력에 기대어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극을 만듬에 있어서 역시적 사실과 영화적 재미를 가미하기 위한 가상의 캐릭터의 조화는 필수입니다.
제가 글의 초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언급했던 것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역시 배우들의 연기력은 출중했지만 [관상]처럼 역사적 사실과 가상의 캐릭터의 조화가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관상]은 분명 잘 만든 사극 영화이기는 하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스파이] VS [관상]. 이 두 영화를 영화의 만듦새와는 별도로
영화적 재미만으로 단순 비교하라고 한다면
나에게 박장대소를 안겨준 [스파이]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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