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엘리시움] - 나는 하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쭈니-1 2013. 9. 2. 11:59

 

 

감독 : 닐 블룸캠프

주연 : 맷 데이먼, 조디 포스터, 샬토 코플리, 앨리스 브라가

개봉 : 2013년 8월 29일

관람 : 2013년 9월 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미래에는 빈부의 격차가 더욱 커질까?

 

최근 SF영화를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헛점이라 할 수 있는 빈부의 격차에 의한 문제를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2011년에 개봉한 앤드류 니콜 감독의 [인 타임]이 대표적입니다. [인 타임]은 빈부의 격차를 시간이라는 소재로 표현하였습니다.

시간이 화폐처럼 쓰이는 가까운 미래, 유전자 조작으로 모든 사람들이 25세에서 노화가 멈추고 잔여 1년의 시간만 제공됩니다. 그러한 1년의 시간을 가지고 사람들은 음식을 사고, 유흥을 즐깁니다. 하지만 잔여 시간이 없을 경우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시간을 벌기위해서 일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일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즐깁니다.

빈부의 격차를 시간으로 비유한 [인 타임]. 주인공인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가진 자들의 시간을 빼앗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자들이 모두에게 나눠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간을 꽁꽁 숨겨두고 있다는 진실을 안 이후에 로빈훗과 같은 의적이 되어 가난한 자들에게 시간을 나눠줍니다.

 

최근 900만을 넘어 천만 관객을 노리고 있는 우리 영화 [설국열차]도 비슷한 설정입니다. [설국열차]는 가까운 미래,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오고 대부분의 생명체가 얼어 죽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몇몇 선택받은 사람들을 태운 월포드(에드 해리스)의 열차 만이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됩니다.

[설국열차]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열차의 앞칸과 살기 위해 열차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뒷칸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빈부의 격차를 은유적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뒷칸의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앞칸에 가기 위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여기에 [엘리시움]이 새롭게 가세하였습니다. 이미 [디스트릭트 9]으로 인종차별, 불법이민자들의 문제를 SF의 틀 안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닐 블룸캠프 감독은 두번째 영화인 [엘리시움]에서 빈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서기 2154년. 오염으로인해 버려진 지구.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은 지구의 대기권 밖에 '엘리시움'이라는 꿈의 우주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가난도 질병도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구에 남아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버려진 지구에서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나갑니다. 언젠가는 '엘리시움'에 가겠다는 꿈을 안은채...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엘리시움]의 주인공은 맥스(맷 데이먼)입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만난 프레이(앨리스 브라가)를 '엘리시움'에 데려가 주겠다는 어렸을 적의 약속을 가슴에 품은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돈과 권력을 가진 선택받은 이들만의 공간인 '엘리시움'에 고아 소년 소녀인 맥스와 프레이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성인이 된 맥스는 더이상 헛된 꿈과 희망을 품지 않습니다. 그는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근근히 하루 하루를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그에게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공장에서의 사고로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된 맥스. '엘리시움'의 의료기기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그는 5일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살고 싶다고 외치는 맥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시움'에 가기 위한 위험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인 타임]에서는 주인공 어머니의 죽음, [설국열차]에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열차 뒷칸의 상황이 못가진 자들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여 살아가지만,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궁지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잃을 것이 없는 그들은 가진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맥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그는 방사능에 노출되어 버려집니다. '엘리시움'의 의료 기기가 있다면 단 몇 초만에 고칠 수 있지만, 가진 자들은 그를 소모품처럼 버리고 외면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맥스는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궁지에 몰린 쥐가 됩니다.

 

닐 블룸캠프 감독은 버려진 지구와 선택받은 '엘리시움'의 상황, 그리고 맥스와 프레이의 관계를 오프닝의 짧은 장면들로 모두 설명해냅니다.  

특히 어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엘리시움'에 불법으로 침입한 한 여성의 장면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음을 앞둔 맥스와 백혈병에 걸린 어린 딸을 살리고 싶은 프레이가 왜 '엘리시움'에 가야 하는지 효과적으로 설명해냅니다.

그들에게 '엘리시움'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구의 의료 상황으로 맥스의 병도, 프레이의 병도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시움'이라면 그들의 병은 순식간에 완치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시움'의 장관 델라코트(조디 포스터)는 말합니다. 내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델라코트에게 있어서 '엘리시움'의 사람들은 지켜야할 가족이고, 지구에 남겨진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위협하는 버러지에 불과한 셈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엘리시움'은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엘리시움'의 풍요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버려진 지구의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죠. 누군가는 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덕분에 풍요로움을 즐깁니다. 하지만 풍오료움을 즐기는 자들은 일을 하는 자들에게 풍요로움을 나눠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하는 자들이 풍요로움을 가지게 된다면 더이상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결국 '엘리시움'의 풍요로움은 지구의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한 지구의 절박함은 '엘리시움'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는 아이러니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희생, 그리고 과한 설정

 

맥스는 살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욕망에 의해 '엘리시움'에 가기 위한 위험한 모험을 선택합니다. 어린 시절 프레이를 '엘리시움'에 데려가 주겠다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은 성인 된 그에겐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프레이를 다시 만나고, 프레이의 백혈병에 걸린 딸을 '엘리시움'에 데려가달라는 애원을 애써 외면합니다. 궁지에 몰린 맥스는 다른 궁지에 몰린 이들의 사정까지 봐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레이의 딸은 맥스에게 동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키가 너무 작아 나무 위의 과일을 따 먹을 수가 없었던 미어캣의 이야기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맥스는 미어캣이 결국 굶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는 말합니다. 미어캣은 하마를 만나고, 하마의 등에 올라타 과일을 따 먹을 수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하마가 미어캣을 도와 줌으로서 얻는 것을 무엇일까요? 아이가 말하는 대답은 '좋은 친구'입니다. 

처음엔 자신을 위해 '엘리시움'으로 향하던 맥스는 '엘리시움'에서 극한 상황에 처하면서 점점 자기 자신보다는 프레이와 그녀의 딸, 그리고 지구에 남겨진 고통받는 이들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을 보며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다.'라며 박수를 처줍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그러한 상황이 온다면 그러한 선택을 할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만 생각하고, 우리 자신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과연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을 외면하는 '엘리시움'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엘리시움]은 제게 굉장히 인상적인 SF 영화였습니다. 닐 블룸캠프 감독의 전작인 [디스트릭트 9]과 단순 비교한다면 저는 [디스트릭트 9]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만큼 [디스트릭트 9]는 굉장한 영화였으니까요. 비록 [디스트릭트 9]과 비교해서 [엘리시움]의 재미, 감동은 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시움]은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맥스를 끝까지 뒤쫓는 크루거(샬토 코플리)의 설정은 너무 과했습니다. 캐릭터는 생략된채 무조건적으로 잔인하기만한 크루거. 그 덕분에 [엘리시움]의 긴장감은 더욱 살아났지만, 너무 무조건적으로 극단적인 캐릭터 성격 때문에 '왜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맥스를 태우고 '엘리시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크루거가 왜 수류탄을 손에 쥔 그를 자극시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수류탄으로 인하여 얼굴이 박살난 그가 '엘리시움'의 의료기기 덕분에 얼굴을 재생하는 장면에서는 '아무리 SF 영화이지만 너무 과하다.'라며 [엘리시움]을 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이렇듯 [엘리시움]은 [디스트릭트 9]과는 달리 영화의 헛점이 조금 보입니다. [디스트릭트 9]의 주인공이었던 샬토 코플리가 [엘리시움]의 유일한 단점이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엘리시움]이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너무 뛰어났던 [디스트릭트 9]과의 비교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하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러한 단점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시움]을 보고 난 후에 저는 먹먹함을 느꼈습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유토피아 '엘리시움'. 그러한 '엘리시움'을 동경하는 맥스에게 그를 키운 수녀는 말합니다. '엘리시움'에서 바라보는 지구도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영화의 초반, 저 역시 '엘리시움'과 같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도, 질병도, 전쟁도 없는 곳. 그곳이야 말로 유토피아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다면... 과연 우리는 그러한 진실을 알면서도 편안하게 '엘리시움'에 살 수 있을까요? [인 타임]에서 실비아(아만다 세이프리드)가 윌을 도와주는 이유는 그러한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엘리시움'도 아름답지만, '엘리시움'에서 바라보는 지구도 아름다운 법입니다. 1%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1%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나머지 99%와 행복을 나눠가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요? 미어캣에게 등을 내어 준 하마처럼, 맥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진정한 행복을 가진 것은 맥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섰습니다.

 

정녕 우리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가진 자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 포기하고 양보한다면...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은 역시 무리겠지?

그들은 굳이 하마가 될 생각이 없을테니...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