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왕가위
주연 : 양조위, 장쯔이, 장첸, 송혜교
개봉 : 2013년 8월 22일
관람 : 2013년 8월 28일
등급 : 12세 관람가
당신은 아직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상업적 재미를 원하는가?
1990년의 일입니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중앙극장에서 [아비정전]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당시는 [영웅본색], [첩혈쌍웅]으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전성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아비정전]에는 유덕화, 장국영, 장만옥, 장학우, 양조위 등 홍콩의 스타급 배우들이 무더기로 출연하니 당연히 많은 분들이 [아비정전]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비정전]은 많은 분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홍콩 느와르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왕가위 감독만의 독특한 화법을 적응하지 못했던 관객들은 중앙극장 앞에서 환불소동을 피우는 촌극이 벌어진 끝에 [아비정전]의 극장 간판이 내려졌고, 그렇게 [아비정전]은 우리나라에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습니다.
이후 왕가위 감독은 1995년 [중경삼림]으로 신드룸을 일으켰습니다. 특별한 스토리 라인은 없지만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젊은 관객을 매료시켰던 [중경삼림]은 왕가위 감독을 일약 스타 감독으로 올려 놓았습니다. [중경삼림]이후 왕가위 신드룸은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로 이어졌고, 환불소동까지 벌어졌던 [아비정전]이 개봉했을 때와는 달리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관객의 열렬한 환호를 얻어냈습니다.
저 역시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 흠뻑 빠져 왕가위 감독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중경삼림]도 [타락천사]도 아닙니다. 바로 [동사서독]입니다.
1995년 개봉한 [동사서독]은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양가휘,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양채니 등 [아비정전]을 넘어서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동사서독]을 홍콩 무협영화로 기대했습니다. 당시는 [동방불패], [백발마녀전] 등 홍콩 영화의 추세가 느와르에서 무협 영화로 넘어가는 시점이었고, [동사서독]은 겉보기에는 완벽한 무협영화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사서독]을 극장에서 혼자 봤습니다. 요즘은 두편중 한편은 혼자 보는 영화이지만, 당시에는 영화를 혼자 본다는 것은 제겐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그 순간 다른 분들은 '뭐야, 이게...'라며 욕을 하며 극장 밖을 나섰지만, 저는 영화의 여운이 남아 한동안 멍하니 극장 안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동사서독]을 친구와 함께 봤다면 긴 여운을 아직까지 간직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열혈남아]에서부터 최근 개봉한 [일대종사]까지 한결같았습니다. 문제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잘못된 기대감이죠. [아비정전]의 환불소동은 화끈한 홍콩 느와르를 기대한 관객들의 촌극이며, [동사서독]의 흥행 실패 역시 무참하게 깨진 무협 영화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일대종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견자단의 [엽문]은 잊어라.
[일대종사]는 중국의 무술가로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에 대한 영화입니다. 사실 엽문은 이미 여러차례 영화화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엽위신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견자단이 엽문으로 열연한 영화 [엽문]은 무술 영화팬들에게 걸작 칭호를 얻을만큼 유명합니다.
엽위신 감독의 영화 [엽문]의 내용을 잠시 보면 1930년대 수많은 무술가들의 메카가 된 불산에서 영춘권의 고수인 엽문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중국 전역에 명성을 떨칩니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해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불산은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일본은 불산의 무인들을 비열한 방법으로 하나하나 격파해 나갑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 엽문은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던 신념을 버리고 국민들이 일본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무예를 가르치며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무술로 일본에 저항합니다.
사실 제가 무술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엽문]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서극 감독의 걸작 무술 영화 [황비홍]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의 배경이 그러하죠. 일본의 탄압에 대항하는 무술인의 영웅담이라는 측면에서 [황비홍]과 [엽문]은 분명 비슷한 점이 많은 영화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영웅본색] 식의 홍콩 느와르를 기대했다가 실망을 넘어 분노로까지 치닫게 했던 [아비정전], [동방불패]식의 무협 영화를 기대했다가 '이게 뭐야?'라는 푸념만 늘어 놓게 만든 [동사서독]처럼, [일대종사]를 보는데 있어서 [황비홍], [엽문]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는다면 분명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일대종사]는 그런 영화입니다. 사실 제가 [일대종사]를 기대작에 넣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무술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소룡의 영화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고, [황비홍] 시리즈 역시 1, 2편만 보고 나머지를 안봤을 정도로 제 취향에는 무술 영화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대종사]의 감독이 왕가위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 기대작이었던 [R.I.P.D. : 알.아이.피.디]와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을 본 이후 '볼 영화가 없나?'라는 마음으로 상영작을 살펴보던 저는 [일대종사]에 실망했다는 어느 분의 글을 읽고 '그래, 이 영화다.'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 분은 무술 영화를 기대했다가 실망했거든요. 저는 그 분의 글에서 [동사서독]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쩌면 [동사서독]을 보고 느꼈던 그 기나긴 여운을 [일대종사]에서 다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늦게 [일대종사]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지하자면 [동사서독]에서 느꼈던 여운을 [일대종사]에서는 느낄 수 없었지만([동사서독]은 넘사벽!!!) '역시 왕가위 감독의 영화답군.'이라는 찬사가 나올 만큼 영화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그러한 아름다움 만큼 스토리 전개는 상당히 불친절했지만,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그러한 것은 당연히 감안해야할 일입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 : 영화에 알맞는 기대를 해라.)
무술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일대종사]의 최대 장점은 아름다운 영상미입니다. 사실 그러한 부분은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들에게 일관되게 드러나는 장점입니다. [중경삼림]으로 왕가위 신드룸이 생기자 김의석 감독은 왕가위 스타일과 비슷하게 [홀리데이인 서울]을 연출했고, 박기용 감독은 아예 [중경삼림]의 카메라 감독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도일을 한국으로 모셔와 [모텔 선인장]을 찍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김의석 감독과 박기용 감독은 왕가위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카메라 워크에 의한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췄을 정도로 왕가위 감독의 영화 특징은 아름다운 화면으로 대표됩니다.
[일대종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에서 많이 사용되는 비의 이미지는 엽문(양조위), 궁이(장쯔이) 등 영화 속 무술 고수들의 화려한 무술을 더욱 극대화시켜 보여줍니다. 적절하게 표현된 슬로우 비디오와 극장 안 관객석을 진동시키는 강함의 울림은 무술의 강함과 부드러움, 아름다움을 동시에 잡아 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궁이와 마삼이 눈이 휘날리는 기차역에서의 격투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마삼을 쓰러 뜨려야 하는 궁이. 이 두사람의 처절한 대결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결로, 대결에서 이긴 궁이와 대결에서 진 마삼의 마지막 표정이 여운을 깊게 남겼습니다.
사실 [일대종사]에서 무술씬은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무술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지 않았지만 [황비홍]에서 봤던 무술 영화에서의 액션적 쾌감은 [일대종사]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일대종사]의 액션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었고, 캐릭터 간의 심리 묘사에 직접적으로 사용됩니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엽문과 궁이의 대결입니다.
엽문에게 패한 아버지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궁이는 엽문에게 대결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막상 엽문과 궁이의 대결은 승패를 가르기 위한 싸움 대신 서로를 향한 애틋한 몸부림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부인이 있는 엽문과 정혼자가 있는 궁이. 이 두 사람은 서로의 합을 겨루며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애써 감추는 듯했습니다.
그와는 달리 일선천(장첸)이 조직을 나오기 위해 벌이는 결전은 강함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궁이와 어떠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 기대했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일선천. 솔직히 저는 일선천이 굳이 [일대종사]에 필요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의 액션은 무술 영화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명장면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엽문과 궁이의 아버지의 대결에서는 무술의 부드러움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렇듯 [일대종사]는 무술을 단순한 액션적 쾌감에 그치지 않고 영상적 미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동사서독]에서 무협을 영상적 미학으로 그려냈듯이...
중국 근대사에서 무술인이 살아가는 법
[일대종사]의 한가지 안타까운 소문에 의하면 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 양조위는 [일대종사]에서 자신의 분량이 대폭 삭제된 것을 보며 '다시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며 분노했다고 합니다.
[일대종사]는 비록 [엽문]과 비교해서는 안될 영화이지만 분명한 것은 엽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엽문을 연기한 양조위의 분량이 대폭 삭제되었다니 어찌된 일일까요?
사실 [일대종사]는 엽문의 영화라기 보다는 30~50년대를 살았던 중국 무술인을 그린 영화입니다. 당시 영춘권의 고수였던 엽문의 이야기도 비중있게 다뤘지만, 궁가64수의 후계자인 궁이의 이야기 역시 엽문 못지 않게 중요하게 다뤄져 있습니다. 거기에 팔극권의 고수 일선천의 이야기까지 끼어드니 엽문의 비중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엽문의 비중이 줄어든 대신 [일대종사]는 중국의 격동의 시대인 근대사에 살았던 무술인들의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스승을 배신한 마삼, 복수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거역하고 마삼에게 복수한 이후 고향에 가지 못하고 홍콩에서 아편에 중독되어 쓸쓸히 죽어간 궁이, 부유하게 살았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결국 두 딸마저 잃은 엽문. 누군 일본에 굴복하였지만, 대부분의 무술인들은 이 격동의 시대에 비극적인 삶을 맞이합니다.
엽문은 부인인 장영성(송혜교)이 죽었지만 결국 고향으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엽문에게 고향은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지 못한 회한의 장소가 아니었을까요? 무술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자식들조차 지키지 못했던 엽문. 그는 고향에 남겨둔 부인에게 돌아가지 못했을 정도로 그 상처가 너무나도 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왕가위 감독이 이러한 엽문의 이야기를 좀 더 중점적으로 그렸다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인 궁이와 엽문의 애틋한 로맨스를 초점을 맞췄다면, 어쩌면 [일대종사]는 훨씬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영화 속에 펼쳐 보입니다. 중국 무술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엽문이라는 인물 하나에 국한하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간 수 많은 무술 고수들의 이야기를 담아 냄으로서 영화는 대중적인 스토리 라인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로인하여 영화의 주제의식은 더욱 깊이가 깊어졌습니다.
[일대종사]는 영화 중간 중간 자막을 통해 중국의 근대사와 그러한 시대를 살다간 무술인들의 동향을 써 놓습니다. 엽문을 비롯하여 궁이, 일선천이 홍콩에 모여들고, 각자의 방식으로 제자를 받으며 그들의 무술을 퍼트렸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쩌면 왕가위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아무리 무술의 고수라고해도 격동의 시대에 그들 역시 상처를 입었고, 그러한 상처를 딛고 일어섰기에 그들의 이름을 널리 떨칠 수가 있었다라는... 결국 [일대종사]는 수평과 수직의 이야기이며, 모든 시련을 딛고 수직으로 일어선 고수의 이야기였습니다.
영화가 끝난 극장 안. 관객을 저를 포함하여 일곱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다섯명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극장 밖으로 서둘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여운을 느끼며 극장 안에 남아 있던 저를 포함한 두명의 관객을 위해 [일대종사]에는 짧은 마지막 히든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그러한 히든 영상 속 엽문이 '당신은 어느 당파냐?'라는 질문을 듣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잘못된 기대를 안고 극장안에 들어선 것입니다.
솔직히 난 중간 중간 끊긴 엽문의 이야기보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궁이의 이야기가 더 좋았다.
아마 양조위가 삐친 것 역시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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