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알렉산더 페인
주연 : 폴 지아매티, 토마스 해이든 처치, 버지니아 매드슨, 산드라 오
개봉 : 2005년 2월 18일
관람 : 2005년 2월 1일
지난 1월 16일 제 6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미국의 베버리힐즈에서 열렸습니다. 아카데미 영화제의 수상을 점쳐볼수 있는 전초전이라는 의미에서 언제나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골든글로브는 이번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에비에이터]에게 드라마부분 작품상을,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사이드웨이]에게 뮤지컬-코미디부분 작품상을 안겨주었습니다.
[에비에이터]는 [갱스 오브 뉴욕]에 이어 마틴 스콜세지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다시 만나, 그 유명한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영화 제작자 하워드 휴즈의 드라마틱한 삶을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 일찌감치 아카데미의 유력한 후보작으로 알려진 영화입니다. 하지만 [사이드웨이]는 제게 너무나도 생소한 영화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분명 아카데미는 이변이 없는한 [에비에이터]를 선택하겠지만, 골든글로브 덕분에 저는 [사이드웨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사이드웨이]에 관심을 가진 이상 저는 이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사이드웨이]는 그리 만만한 영화가 아니더군요. 골든글로브 이외에도 미국내 각종 영화협회의 작품상을 휩쓸었으며, 감독은 [어바웃 슈미트]로 제게 의외의 재미를 안겨주었던 알렉산더 페인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사이드웨이]는 제게 숨겨진 기대작이 될 충분한 자격이 갖추어졌습니다.
그런와중에 운좋게도 [사이드웨이]의 시사회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와인시사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일즈(폴 지아매티)가 와인 애호가라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와인시사회는 스타급 배우도 없고, 거대한 스펙터클도 없으며, 드라마틱한 스토리라인도 없는 상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사이드웨이]만큼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독특한 시사회 아이디어는 저녁 9시가 되도록 밥도 굶고 시사회에 참석한 제겐 거의 쥐약과도 같았습니다. 빈속에 종이컵에 담겨진 싸구려 와인 한잔을 원샷(소주 먹는 버릇이 있어서...)하고나자 갑자기 속이 쏴하더니만 졸음이 밀려오더군요. 게다가 옆좌석에 앉으신 분들은 와인을 마시지않고 컵받침대에 그대로 놔둔 상태였기에 영화를 보는내내 와인향기가 계속 제 콧속을 간지럽혔답니다. 암튼 이런 어려움속에서도 저는 꿋꿋하게 [사이드웨이]의 색다른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답니다.
일단 [사이드웨이]는 재미있습니다. 2003년 3월에 봤던 [어바웃 슈미트]보다도 더 재미있었습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잭 니콜슨이라는 배우가 있었기에 집중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이드웨이]에서는 전혀 스타급 배우가 나오지 않습니다. 폴 지아매티와 토마스 해이든 처치는 얼굴은 많이 본듯하지만 이름은 전혀 낯설은 배우들입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이름조차 모르는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를 보게되다니 정말 오랜만인것 같네요. 하지만 그러한 낯설음은 오히려 영화적인 재미를 증폭시킵니다.
솔직히 [어바웃 슈미트]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슈미트라는 캐릭터는 익숙함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에서부터 시작된 잭 니콜슨의 귀여운 중년의 이미지가 [어바웃 슈미트]를 거쳐 [사랑할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사이드웨이]의 폴 지아매티와 토마스 해이든 처치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 두 배우는 외형적으로 본다면 분명 악역이 더욱 잘어울리는 배우들입니다. (폴 지아매티의 경우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빅 팻 라이어]가 있더군요. 그제서야 기억이 났습니다. 그 영화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완전히 당하는 악덕 헐리우드 제작자가 바로 그였다는 사실을...) 그런 그들이 도저히 미워할래야 할 수 없는 귀여운 중년의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그 의외의 연기는 [사이드웨이]의 외의의 재미로 이어집니다. 영화를 보는내내 저는 생각했답니다. 어떻게 저런 외모로 저렇게 귀여운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외모와는 달리 귀여움의 극치를 달리는 마일즈와 잭(토마스 해이든 처치)의 여행을 따라가다보면 와인에 대한 뜻밖의 깊은 지식과 두 남자들이 벌이는 유쾌한 소동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혼한 부인을 잊지못하여 마야(버지니아 매드슨)와의 새로운 사랑을 망설이는 마일즈와 결혼을 며칠 앞둔 주제에 스테파니(산드라 오)와의 새로운 사랑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잭.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내의 여행을 통해 관객들에게 부담없는 웃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웃으며 영화를 보다가보니 갑자기 [어바웃 슈미트]가 생각나더군요.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 남은 딸의 결혼이라도 막아보겠다는 의지로 시작된 슈미트의 그 유쾌했던 여행. 하지만 여행의 말미에 슈미트가 맛본 것은 쓰디쓴 패배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말합니다. 인생의 보람이라는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슈미트가 단지 심심풀이로 기부했던 77센트의 작은 돈이 탄자니아의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꾼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았던 슈미트는 모든 것을 얻은 듯한 미소를 짓습니다.
마일즈와 잭의 여행에서 슈미트의 모습을 본 것은 바로 그것때문입니다. 마일즈와 잭 역시도 슈미트와 비슷한 상황에서 여행을 시작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갈팡질팡하며 마일즈는 와인을, 잭은 여자를 위한 여행을 시작하고 결국 여행의 말미엔 그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일즈는 여전히 이혼한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자신의 책도 출판하지 못하는 한심한 중년이며, 잭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열정적인 사랑을 뒤로하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써 구속의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의 말미에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그들에게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다시 말합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멀리있지 않다고...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던 잭은 행복한 미소를 띄우며 신부를 맞이하고, 마일즈는 특별한 날을 위해 숨겨둔 와인을 허름한 식당에서 마시며 바로 그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갑니다. 행복을 위해 시작된 그들의 여행은 결국 직접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겁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이제 고작 4편의 영화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비록 그의 이전 영화인 [시민 루스]와 [일렉션]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바웃 슈미트]와 [사이드웨이] 이 단 두편의 영화만으로도 저는 그가 진정한 거장으로 느껴집니다.
그의 영화엔 헐리우드가 그토록 자랑하는 거대한 스펙타클과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으며, 출연료만 몇천만달러씩하는 스타급 배우들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웃음과 그 웃음뒤에 숨어있는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지 않은 영화화법으로 관객들에게 가볍운 웃음을 주며 영화의 주제를 관객에게 전해주는 능력은 정말 그가 아니라면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이번 아카데미는 [에비에이터]에게 돌아갈 것입니다.(제 생각에는...) 하지만 이번 아카데미의 진정한 발견은 알렉산더 페인이라는 젊고 유쾌하지만 깊은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감독의 발견일 것입니다. 이런 감독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부럽기만합니다. 그리고 그가 탐이 납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감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이 영화에서 스테파니를 연기한 산드라 오는 한국계 캐나다 배우라는 군요.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남편이 바로 알렉산더 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더욱 정겹게 느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