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게리 마샬
주연 : 케이트 허드슨, 존 코베트, 조안 쿠삭
개봉 : 2005년 1월 27일
관람 : 2005년 1월 27일
[레이징 헬렌]이라는 아주 낯설은 헐리우드 영화의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귀여운 여인], [런 어웨이 브라이드], [프린세스 다이어리]등을 연출했던 게리 마샬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10일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으로 국내에 알려진 케이트 허드슨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쉽게 헐리우드표 로맨틱 코미디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멜로의 계절 가을은 아니지만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는 언제나 중간이상의 볼거리는 제공하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영화이니만큼 아무리 낯설다고는해도 [레이징 헬렌]은 게리 마샬과 케이트 허드슨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되었던 작년 여름에는 [슈렉 2], [투모로우], [트로이]등 블럭버스터의 향연속에서 효과적으로 틈새시장을 노려 흥행에서도 꽤 짭짤한 성과를 이루어냈다고하니 분명 그리 만만한 영화는 아닌듯 했죠.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레이징 헬렌]의 개봉일이 1월 27일인데 그런 개봉일날 시사회 일정이 잡혔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영화 시사회는 개봉일전에 하는 것이 관례이기에 저는 개봉일에 시사회를 여는 이 영화의 특이한 마케팅이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게다가 개봉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내의 극장에선 이 영화의 간판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저로써는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과연 개봉을 하긴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답은 곧바로 나오더군요. [레이징 헬렌]이 개봉된 서울의 극장은 달랑 을지로의 스카라극장 한곳뿐... 바로 시사회 장소였던 곳이죠. 그것도 일주일정도 상영하고 곧바로 간판을 내릴 예정이라고하니 결국 이 영화는 극장 개봉이 목표가 아닌 결국 비디오 출시가 목표인 영화인 셈입니다.
그래도 게리 마샬 감독인데... 그래도 케이트 허드슨인데...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를 꽤나 좋아하는 저로써는 조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관이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엉망인 영화인가? 영화를 보는내내 저는 그 생각만 했습니다. 과연 얼마나 엉망인 영화인지 어디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죠.
이 영화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맨하탄에서 잘나가는 커리어우먼 헬렌(케이트 허드슨)에게 어느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큰언니와 형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큰언니의 세 아이의 양육권은 헬렌에게 맡겨집니다. 천방지축 막내에게 아이들의 양육권을 빼앗긴 전형적인 가정주부인 둘째 언니 제니(조안 쿠삭)와 미묘한 감정다툼을 벌이며 헬렌은 생전처음해보는 엄마노릇에 직장까지 잃으며 악전고투합니다. 그러나 결국 가정의 소중함도 깨닫고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도 이룹니다.
이 영화의 재미는 멋쟁이 커리어우먼이 엄마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맡게됨으로 벌어지는 좌충우돌 소동기입니다. 직장에선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헬렌이 아이들 앞에서는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웃습니다. 그리고 헬렌이 결국 멋진 엄마로 재탄생하는 영화의 라스트에 가서는 작은 감동까지 받게 됩니다. '맞아. 이 세상에서 가정만큼 소중한 것은 없지'라며...
며칠전에 [인크레더블]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어떤 분과 열띤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엘라스틴걸이 '여성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도록 받아들이게하는 보수적인 캐릭터'라며 비판을 하더군요. 솔직히 그 토론에서 저는 그 의견을 전혀 받아들일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과도한 비약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레이징 헬렌]의 헬렌이라는 캐릭터를 보니 이 영화야말로 여성에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꼬드기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내내 헬렌이라는 캐릭터의 악전고투가 재미있기보다는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때문에 직장도 다녀야하고, 아이들도 키워야하는 헬렌의 입장이 별로 웃기지 않았습니다.
헬렌은 미혼의 직장인입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돈을 벌어다주는 전업주부도 아닐뿐더러 돈이 넘치도록 많아서 아이들과 낑낑거리며 노닥거려도 생활이 되는 캐릭터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헬렌에게 아이들을 셋이나 맡겨놓고 직장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러곤 이야기하죠. '거봐! 직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더욱 보람찬 일이잖아'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한가지 의문점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헬렌의 인생은? 아이들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하라는 말인가?
간혹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나면 기분이 좋아지지않고 오히려 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를 워낙 좋아하며 영화에 그리 심각한 의미를 두지 않는 제게 사실 그런 일은 흔치 않습니다. 최근에는 [스위트 알리바마]를 보며 그런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을 느꼈으니 정확하게 2년하고도 2개월전일이군요. 그런데 [레이징 헬렌]이 바로 절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2년 2개월만에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행복하기는 커녕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레이징 헬렌]은 헬렌에게 멋진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키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멋진 남자를 상으로 내려줍니다. 마치 앞으로의 생활고는 그가 책임질테니 넌 아이나 잘 키워라고 이야기하는 듯이...
전 전형적인 한국의 보수적인 남자입니다. 절대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식의 노골적인 메세지는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위트 알리바마]에서 뉴욕에서 패션디자이너로 성공적인 삶을 살던 멜라니(리즈 위더스푼)가 결국 뉴욕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포기하고 사랑을 위해 시골 마을에서의 평범한 삶을 선택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과연 그러한 멜라니의 선택이 옮바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멜라니가 사랑을 위해서 그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그 순간 과연 남자 주인공이 포기한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레이징 헬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헬렌은 누구나 인정하는 모델 에이전시입니다. 이 영화는 초반부터 그녀가 얼마나 능력있으며 그 일을 좋아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는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뿌듯해합니다. 너무 불공정한 일이죠.
분명 케이트 허드슨은 정말 인형처럼 예뻤으며, 아이들은 너무나도 귀여웠습니다. 그리고 헬렌과 패스토(존 코베트)의 사랑은 흐뭇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들은 전업주부인 제니가 키우고 헬렌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헬렌이 아이들을 키운다고할지라도 과연 모델 에이전시일을 하며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모델 에이전시를 포기하고 중고차판매점에서 일을 한다면 과연 헬렌은 행복하 수 있을까요? 먼훗날 아이들이 큰 후 '너 때문에 내 인생은 엉망이 됐어'라고 울먹이는 제니처럼 되어 있을것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우울해집니다.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구피의 힘든 어깨를 생각하니 더욱 우울해집니다. 영화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지금 구피는 하고 있으니... 로맨틱 코미디는 보고나면 행복해져야하는데 행복해지기는 커녕 [레이징 헬렌]은 절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개봉관을 잡지못한 이유는 아닐런지... 저 혼자 생각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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