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길예르모 델 토로
주연 : 찰리 헌냄, 이드리스 엘바, 키쿠치 린코, 찰리 데이, 론 펄먼
개봉 : 2013년 7월 11일
관람 : 2013년 7월 14일
등급 : 12세 관람가
로봇은 남자들의 로망!
어렸을 적의 저는 상당히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친구들도 거의 없었고, 집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상상을 하며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 제게 유일한 친구는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싸구려 플라스틱 조립식 로봇 장난감이었습니다.
제게는 유일한 공간이었던 다락방에는 로봇 장난감들이 일렬로 줄을 맞춰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정렬되어 있는 로봇 장난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습니다.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거대 로봇물이 영화에서도 등장하였습니다. 바로 2007년 개봉한 [트랜스포머]입니다. 이후 [트랜스포머]는 2011년 3편이 개봉되었고, 현재 4편이 제작 중에 있을 정도로 인기있는 블록버스터 시리즈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물론 영화 자체에 대한 악평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포머]는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세편의 영화가 모두 700만명을 넘는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으며, [트랜스포머 3]의 경우는 얼마 전 [아이언맨 3]에게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아바타]에 이은 외국영화 흥행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도 했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그러한 [트랜스포머]의 흥행 신화에 대해서 로봇물에 대한 남성 관객들의 로망 덕분이라 분석하였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마징가 Z], [로보트 태권 V] 등 로봇 만화를 보고 성장했던 중년 남성들이 극장으로 몰린 결과라 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로봇 만화에 열광했고,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로봇 피규어를 가지고 있고, [트랜스포머]를 보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극장으로 달렸갔기에 그러한 분석에 딴지를 걸 수는 없겠네요.
하지만 그것은 비단 중년 남성들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제 11살이 된 웅이도 로봇물을 좋아하거든요. 2007년 저와 함께 극장에서 [로보트 태권 V]를 보면서부터 시작한 웅이의 로봇 사랑은 제가 구입한 [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DVD를 함께 보며 완성되었고, 2011년에는 [트랜스포머 3]를 극장에서 보며 저와 함께 열광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개봉한 [퍼스픽 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라 아직 어린 웅이와 함께 봐도 될 것인지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웅이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헬 보이]를 DVD로 보다가 무섭다며 포기했을 정도로 그의 영화는 공포스럽거든요. 하지만 [퍼시픽 림]은 로봇 영화라는 흔치 않은 장르의 영화이기에 웅이와 저는 남자라는 같은 키워드로 똘똘 뭉쳐 극장으로 향하였습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 식의 로봇물
일단 [퍼시픽 림]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가 확실합니다. 굳이 그의 이름을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영화의 분위기만 봐도 '이건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네.'라는 느낌이 확 옵니다.
그렇기에 마이클 베이 감독식의 액션 활극이 매력적이었던 [트랜스포머]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다가는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은 로봇의 외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화려한 색상을 자랑합니다. 옵티머스 프라임은 붉은 색과 푸른 색이며, 범블비는 노란 색을 띄고 있는 등 로봇들의 외관은 칼라풀합니다. 하지만 [퍼시픽 림]의 로봇들은 외관의 색상 자체가 금속성의 우중충한 색상입니다. 중국의 로봇인 크림슨 타이푼이 붉은 빛을 띄고 있지만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처럼 결코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성향에서 쉽게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영화 중에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장르는 판타지 영화이지만, 다른 판타지 영화와는 달리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암울한 시대 배경과 그러한 배경에 어울리는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가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조차도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만나면 공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괴한 영화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분위기는 [퍼시픽 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퍼시픽 림]은 2025년 일본 태평양 연안의 심해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그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우주 괴물이 인류를 공격한다는 기본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주에서온 거대한 괴물과, 그러한 괴물에 맞서 싸울 인간이 창조한 거대한 로봇의 대결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감독이 만들었다면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가 나온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고질라]와 로봇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초인 [트랜스포머]가 교묘하게 섞인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두 영화 모두 인류의 위기를 담고 있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적절하게 섞인 유머와 함께 관객들이 영화를 즐기는데 딱 알맞은 가벼움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퍼시픽 림]은 다릅니다. 이 영화의 분위기는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입니다. 우주 괴물인 카이주에 맞서 거대한 예거 로봇을 조종하는 최정예 파일럿들이 영웅으로 떠오르지만, 그것은 희망과는 다른 모양새입니다. 오히려 희망이라기 보다는 희생에 가깝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카이주를 피해 대피소에서 벌벌 떨고, 정치인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방어벽을 만든다며 사람들을 동원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어떤 이들은 카이주의 사체를 돈벌이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거의 파일럿들은 정부조차 외면한 가혹한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대피소에 숨어 떨다 죽느니 카이주에 맞서 싸우다 예거 안에서 전사하겠다고...
희생 위에 싹튼 희망
예거의 조종 방법은 두명 이상의 파일럿이 서로의 뇌를 드래프트하여 공유하고 뇌파를 이용하여 조종을 합니다. 결국 같은 예거에 탄 파일럿들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러한 설정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영화의 초반 주인공인 롤리 베켓(찰리 헌냄)은 형과 함께 미국의 예거 로봇인 집시 데인저에 탑승, 거대한 카이주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카이주의 공격에 그의 형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서로의 뇌에 드래프트한 상태에서 롤리는 형의 죽음을 본 것에 그치지 않고 형이 느꼈을 죽음의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파트너가 죽음의 순간 느꼈을 극한의 공포심을 맛본 롤리는 초반의 영웅 놀이를 집어 던지고 홀로 방랑을 하게 됩니다. 당시 그가 느꼈을 감정은 형을 잃은 슬픔, 카이주에 대한 분노, 형을 구하지 못햇다는 죄책감 등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예거에 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그 순간이 두려운 것이죠.
이렇듯 [퍼시픽 림]의 파일럿들은 애초부터 경쾌한 영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거의 조종 방식에 따른 딜레마입니다. 게다가 뇌파를 이용해서 예거를 조종하다보니 카이주가 예거를 공격할 때의 고통이 고스란히 파일럿들에게 전해집니다.([에반게리온]과 비슷한 설정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할 그들에게 경쾌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것이죠.
점점 막강해지는 카이주와 싸워야하고,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의 공포와 마주친 그들. 그들에게 예거의 화려한 색상을 입힌다는 것은 부질없는 허영일 것입니다. 예거가 금속성의 우중충한 색상을 가진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롤리는 죽음과 다시 한번 맞서기로 합니다. 정부가 새롭게 내놓은 방어책인 방어벽 공사장에서 일하며 방어벽이 카이주를 막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롤리는 무기력하게 죽음의 공포에 떠느니, 다시 싸우면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 합니다.
이미 파트너의 죽음을 느낀 롤리였기에 형을 대신을 새로운 파트너의 선택은 롤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롤리와 마코(키쿠치 린코)의 야릇한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족이 아닌 남에게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보여줘야 하는 상황. 그러한 상황에 처했기에 롤리의 새로운 파트너인 마코와의 로맨스는 비롯 본격적으로 펼쳐지지 않는다고 해도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롤리가 복귀했고, 마코가 롤리의 새로운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이제 롤리와 마코를 중심으로 인류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카이주의 공포에 벌벌 떠는 일반인들의 박수갈채 하나 없이 죽음과 마주치는 희생을 치루기 위해 전투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희생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던 인류의 희망이 됩니다.
사이즈만 보지 말고 그들의 희생도 보라!
사실 저는 너무 과도한 영웅 놀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영웅 놀이는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퍼시픽 림]은 예외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 덕분입니다.
너무나도 막강한 카이주. 죽여도 죽여도 더욱 강한 상대가 나타납니다. 카이주에 맞서는 유일한 희망은 예거. 하지만 막강한 자본이 드는 예거는 이제 네 대 밖에 남지 않았고, 정신 나간 정치인들은 예거를 만드는 것보다 값싼 방어벽을 세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어디에도 희망은 없습니다. 네 대의 예거마저 부쉬지면 인류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거의 파일럿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카이주와의 최후 전투에 임하는 예거 파일럿의 표정이 무표정한 것은 그들 역시 자신의 희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거 파일럿의 대장인 스탁커(이드리스 엘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기에 오히려 그의 표정은 편안합니다.
예기치 못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 롤리는 그로인한 충격으로 5년이라는 세월을 방황하지만, 오히려 죽음을 예감하고 나선 전투에서는 공포를 이겨내고 죽음과 맞서 당당하게 싸웁니다. 그들의 희생이 없이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그들의 희생을 값싼 영웅주의라고 욕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퍼시픽 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예거의 파일럿들에게 희망이 있었다면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영웅이 되려 했을까요? 영웅이 되는 것보다 살아 남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예거이고, 예거는 그들이 아니면 조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습니다. 그들에겐 희망이 없지만, 남아있는 인류에게 그들은 희망이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희생을 그들 스스로 치룬 이유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나서 [트랜스포머] 식의 쾌감은 없었습니다. [트랜스포머]를 본 후에는 옵티머스 프라임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고, 웅이는 범블비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지만, [퍼시픽 림]을 보고 나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주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카이주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습니다.
웅이는 영화를 보고나서 '왜 한국 로봇은 없냐?'고 아쉬워했습니다. 하지만 카이주가 우리나라의 땅에 출몰하여 한국의 예거가 필요한 것보다는 카이주가 일본 땅의 공격에 치중하여 일본 예거는 필요해도 한국 예거가 필요없는 상황이 더 낫지 않냐고 웅이에게 되물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영웅보다는 영웅이 필요없는 그런 세상이 더 좋습니다. 카이주로 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예거 파일럿들의 희생을 보며, 예거라는 거대한 로봇이 활보하는 세상보다는 그러한 로봇이 필요없는 세상이 훨씬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멋진 예거보다 끔찍한 카이주가 더 인상깊었다.
역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취향은 로봇이 아닌 괴물임이 분명하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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