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3년 아짧평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 - 엉뚱한 주근깨소녀의 수다가 유쾌했다.

쭈니-1 2013. 7. 11. 16:28

 

 

감독 : 다카하타 이사오

더빙 : 이지영, 성선녀, 온영삼

 

 

어린 시절 나는 주근깨 소녀에게만큼은 관대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과 누나와 여동생이 단칸방에서 함께 생활을 했었습니다. 당연히 집에 TV는 한대 뿐이었고, 가끔 누나와 함께 채널 쟁탈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저는 <마징가 Z>와 같은 로봇 만화를 좋아했고, 누나는 <들장미 소녀 캔디>와 같은 순정 만화를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좋아하는 장르의 만화가 다르다보니 제가 보는 만화와 누나가 보는 만화의 방영 시간이 서로 겹칠 때면 서로 아웅다웅 싸워야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일화 한가지. 고집이 쎈 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누나는 저를 설득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당시 누나는 <들장미 소녀 캔디>가 보고 싶었고, 저는 <톰과 제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톰과 제리>를 보고 있던 제게 누나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시켰습니다.

"<들장미 소녀 캔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게집에 '캔디'를 팔겠니?"

"누나, <톰과 제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게집에서 제리(젤리)도 팔아!"

결국 제 승리. 누나는 투덜거리며 친구네 집에서 <들장미 소녀 캔디>를 보겠다며 나가 버렸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착한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내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캔디가 허구헌날 이라이저와 니일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났던 것이죠.

하지만 그런 저도 좋아했던 순정 만화가 있습니다. 바로 <빨간머리 앤>입니다. <빨간머리 앤>이 TV에서 방영하면 누나와 저는 서로 싸우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앤 셜리의 수다를 즐기고는 했습니다.

 

  

 

<빨간머리 앤>이 돌아왔다.

 

지난 1월 10일 반가운 애니메이션 영화 한편이 개봉하였습니다. 바로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입니다. 이 영화는 1979년 제작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빨간머리 앤>을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버전으로 2010년 일본에서 개봉한 화제작입니다.

특히 이 영화가 주목할 점은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니 장편인 TV 애니메이션의 축약판이 아닌, 앤(이지영)이 고아원에서 그린게이블의 무뚝뚝한 남매 매튜(온영삼)와 마릴라(성선녀)에게 입양되는 초반 부분을 담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빨간머리 앤>의 극장판이 이 영화 한 편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죠. 어린 시절 <빨간머리 앤>을 좋아하던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을 극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1월달은 회사일이 너무 바빴기도 했지만, 극장에서 성인 관객을 배려하지 않은 상영 시간대 때문에 도저히 극장으로 달려갈 수가 없었습니다.(저는 밤 시간대에 주로 영화를 보지만 애니메이션은 밤에 상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암튼 그러한 이유로 이렇게 뒤늦게 추억의 친구 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앤을 좋아하는 이유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저는 착하기만한 주인공이 악당에게 당하다가 결국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스토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성공하는 부분은 분명 쾌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러한 쾌감을 느끼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답답함이 저는 싫습니다.

하지만 <빨간머리 앤>은 다릅니다. 분명 앤은 불쌍한 아이입니다. 빨간머리에 빼빼마른, 결코 예쁘지 않은 외모는 그렇다고 쳐도,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열병으로 돌아가시고,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 결국 매튜와 마릴라 남매에게 입양되지만, 앤이 처음 그들에게 들어야 했던 소리는 "우리는 여자 아이가 아닌 남자 아이를 요청했다."였습니다. 결국 앤은 또다시 고아원으로 돌려 보내져야합니다.

하지만 앤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녀 특유의 상상의 힘을 발휘하여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밝게 웃습니다. 그녀가 가진 긍정의 힘은 어른이 된 제게도 미소를 안겨줬는데, 앤이 무뚝뚝한 매튜, 마릴라 앞에서 쉴새없이 수다를 떠는 모습은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만들었습니다.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앤은 긍정적이면서도 불의를 참지 않는 당찬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빨간머리를 놀리는 길버트에게 지지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그를 제치고 대학 장학금을 타기도 했으니까요. 제가 질색하는 지고지순한 순정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앤을 좋아하나봅니다.

 

 

 

그녀의 수다가 궁금해진다.

 

큰 희망을 안고 그린게이블에 오지만, 마릴라에게 "우린 남자 아이가 필요하단다."라는 절망적인 소리를 들어야 했던 앤. 처음에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지만 이내 진정시키고, 다시금 풍부한 상상력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여성 앞에서는 부끄러워하는,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을 하지 못한 독신인 매튜와 상상력을 쓸데 없는 것이라며 앤의 수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릴라도 그러한 앤의 낙천적인 모습과 수다에 매료되고 맙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앤은 그린게이블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11살 소녀 앤의 수다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죠.  과연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의 후속편이 작업을 마치고 극장 개봉을 할 수 있을런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무사히 극장 개봉을 한다면 그린게이블에 살게된 앤과 앤과는 단짝 친구인 다이아나의 유쾌한 수다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땐 꼭 극장에서 어린 시절의 반가운 친구인 앤을 만나고 싶군요.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